[매경이 만난 사람] 숭례문 상량문 쓴 서예가 정도준

2012. 3. 16. 1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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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숭례문 … 안해도 될일을 한다는 아픔이 컸죠상량문은 내 글씨가 튀어선 안돼…열흘간 글씨쓰며 붓끝에 온 신경…무념의 상태 유지가 가장 힘들어서예는 線하나 얻는데 평생 걸려…부드럽게 먹을 갈면 마음도 차분…청소년들에겐 인내심 길러줄 것

"말할 수 없이 보람되고 흥분됐죠. 서예가라면 누구나 하고 싶었을 일이자 다시 없을 기회니까요." 하얗게 부르튼 입술에서 들뜬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지난 8일 숭례문 상량식이 열리던 날 서울 남산 자락에 위치한 서예가 소헌 정도준 선생(64)의 작업실을 찾았다.

그는 2500자나 되는 숭례문 상량문을 쓴 데다, 문루(門樓) 천장에 가로놓일 목재인 뜬창방에 '서기 2012년 3월 8일 복구 상량'이라는 한자 열다섯 자를 쓴 주인공이다.

이 글자들은 연말에 복구가 완료되는 숭례문이 다시 복원되거나 소실되지 않는 한 영원히 우리와 함께할 민족의 자산이다.

숭례문 상량문은 일종의 '블랙박스'다. 조선 태조 때 창건된 숭례문이 여러 번 중건되고 2008년 어처구니없는 방화로 무너지기까지 우여곡절을 낱낱이 담고 있다.

새롭게 일어설 때마다 중건에 참여했던 관계자들 이름도 빼곡하게 적고 있다. 절절한 역사를 검은 먹으로 담백하게 써 내려간 그를 만나 고대부터 전해져 온 붓글씨의 매력과 느림의 미학, 서예의 현주소를 물었다.

-10m나 되는 상량문을 쓰는 데 어려움은 없었나.

▶열흘간 글씨를 썼는데 잡념을 없애고 무념의 상태를 유지하기가 어려웠다. 붓끝에 모든 신경을 모았다. 처음에 틀리면 나중에 마음이 초조해지기 때문에 시간과 체력 안배에 신경을 썼다. 다른 때 같았으면 링거를 서너 번 맞았을 텐데 입술 부르트는 걸로 그쳤다. 다행스럽게도 비단이 아닌 한지에 글자를 쓰는 것이라서 틀리면 한쪽 면만 바꿔서 다시 썼다.

-숭례문 글씨를 쓴 의미가 개인적으로 각별할 것 같다.

▶사실 그동안 경복궁 근정전 상량문도 썼고 경복궁 흥례문 현판도 썼다. 그런데 숭례문은 달랐다. '국보 1호'의 상징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애초 우리가 하지 말아도 될 일을 하고 있다는 아픔이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1982년 대한민국미술대전에서 '조춘(早春)'으로 대상을 수상했을 때만큼 기뻤다. 유럽 각국 미술관과 박물관에서 여러 초대전을 하며 해외에서 인정을 받고 있지만 이번에 고향에서 제대로 인정받은 것 같아 뿌듯하다.

-상량문이나 현판글씨와 미술관에 전시하는 서예 작품은 어떻게 다른가.

▶궁궐 현판이나 상량문은 전체 건물과의 조화를 먼저 생각한다. 내 글씨가 튀면 안 되니까. 그러면서도 예술성을 입히려 노력한다. 개인적인 작품은 표현에 제한이 없다. 예컨대 한석봉이 글자를 고르고 단정하게 쓴 전문인이라면 추사 김정희는 기존 격식을 파괴한 예술가다. 나는 추사처럼 글씨의 인격보다는 조형성을 더 추구한다.

-글씨를 보면 보통 쓴 사람의 인격이 보인다고 하는데.

▶글쎄.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글씨 쓴 사람을 알게 되면 아무래도 그 사람 성품에 빗대서 인격이 보인다고 하는데 사실 글씨만을 놓고 사람의 됨됨이를 알아채기는 쉽지 않다. 요즘에는 서예가 작품보다 정치인이나 유명인 휘호가 오히려 값이 비싸더라. 서예를 자꾸 인격으로 묶으면 작품은 보이지 않고 쓴 사람만 보인다.

-좋은 글씨는 어떤 건가.

▶선(線)의 질이 중요하다. 판소리에서 득음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처럼 서예가에게는 선을 얻는 일이 중요하다. 나 역시 선(線) 하나를 얻는데 평생을 바쳤다. 그런데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속담처럼 그 선들을 조형적으로 아름답게 구성하는 일도 중요하다. 좋은 글씨는 당장 주목을 받지 못해도 가치는 변하지 않는다.

-서예가 동양예술의 최고봉으로 대접받는 이유는.

▶영국의 비평가 허버트 리드는 "서예는 중국 예술의 기본"이라고 했다. 김홍남 전 국립중앙박물관장도 "서예는 캐다가 그만둔 금광과 같다"는 평가를 했다. 그만큼 서예는 예술의 근간을 이룬다. 문자는 가장 단순한 조형이자 고대로부터 가장 알맞은 비율로 구성돼 있다. 상형문자가 아니더라도 구성만으로도 아름답다. 형태가 아름다운 데다 의미까지 가지고 있으니 이보다 더 놀라운 예술이 어디 있겠는가.

-그런데 국내에서는 "서예가 죽었다"는 얘기도 나온다.

▶참 안타깝다. 중국은 그렇지 않다. 지난해 경매 총액에서 중국 서예가이자 산수화가인 장다첸(張大千ㆍ1899~1983)이 피카소를 제쳤다고 하지 않나. 우리는 외국의 새로운 것이 오면 정신없이 받아들인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것을 놔버리는 데 있다. 중국이나 일본은 다르다. 받아들이되 자신들의 것은 지킨다. 우리는 잃고 나중에 후회한다.

-서예계는 왜 스타가 없나.

▶변명 같지만 원래 서예라는 영역은 시간이 오래 걸린다. 예부터 이런 말이 있다. '소년 문장가는 있어도 소년 서예가는 없다.' 20대 젊은 나이에도 훌륭한 문장이 가능하지만 서예는 부단한 자기 수련이 있어야 한다. 추사도 50대 제주도 유배 시절에 추사체를 완성하지 않았나.

-제대로 서예를 감상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의재필선(意在筆先)이라는 말이 있다. 붓보다 뜻이 먼저라는 것이다. 왕희지가 남긴 말인데 서예가가 작업을 하기 전에 먼저 구성할 뜻을 머릿속에 갖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서예는 까만 선들의 나열이 아니다. 획이 길고 짧은 것, 굵고 가는 것, 세고 약한 것에는 모두 의미가 담겨 있다. 작가의 의도대로 공간이나 여백이 커지고 작아진다. 그래서 예술적으로 봤을 때 첫 느낌도 중요하지만 서예는 아는 만큼 보인다.

-서예가 21세기에 존재해야 하는 이유는.

▶수년 전 내 전시를 초대했던 독일 대학 한 디자인학과장이 이렇게 말하더라. "우리가 편리한 것만 추구하다 보면 음식도 인스턴트만 먹게 된다. 그런데 인생은 그걸 위해 사는 것은 아니지 않나. 저녁에 한 끼 정도는 앞치마를 두르고 정성스러운 음식을 먹는다든가 저녁에 근사한 식당에서 밥을 먹기 위해 살지 않는가." 서예는 느림의 미학을 갖고 있다. 성격이 급한 사람도 붓글씨를 쓰다보면 차분해진다. 먹은 북북 갈면 입자가 굵어져서 안 된다. 부드럽게 원을 그리며 갈다보면 차분해진다.

-요즘 청소년들은 서예를 접하기 어려운데.

▶요즘 아이들은 참지를 못한다. 컴퓨터나 스마트폰을 켜는 데 1분도 안 걸리니 참는 법을 모른다. 붓글씨는 오래 걸리니까 인내심을 길러주고, 기다림과 여유를 가르쳐준다. 또 좋은 글귀를 마음에 새기면서 쓰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정서가 함양된다. 아무리 기계가 발전해도 사람의 손맛이 필요한 게 인간이다.

-서예는 어떤 예술인가.

▶가장 화려한 예술. 흑(黑)은 백(白)을 만났을 때 가장 화려하다. 그런데 여기에 붉은 낙관까지 찍힌다. 삼원색이 합쳐져 만들어진 검은색은 그냥 시커먼 색이 아니다. 먹빛은 100가지 색을 머금고 있으며 모든 걸 표현할 수 있다. 중국에서는 서예를 서법(書法)이라고 하고 일본에서는 서도(書道)라 한다. 우리는 광복 후 서예(書藝)라 부른다. 한마디로 도(道)는 과정이고 결과물은 예(藝)다.

-연초 매일경제 독자를 위해 신년 휘호 '和通韓國(화통한국)' 넉자를 써줬다.

▶힘 있는 예서체로 썼다. 올해는 총선과 대선으로 시끄러운데 이럴 때일수록 더더욱 화합하고 소통하자는 시대의 의미를 담았다.

-앞으로 계획이 궁금하다.

▶예술가들은 욕심이 참 많은 사람이다. 나 역시 그런데 앞으로 미국 구겐하임미술관 등 유명 미술관에서 전시를 하는 게 목표다. 앞으로 5~10년 동안 활발하게 작품을 내놓을 계획이다. 뭔가가 보일 듯하다.

■ 유명 서예가 정현복 선생이 부친…이태백의 글 보며 인생 진로 결정'天生我材必有用' 하늘이 나를 낳아주셨으니 쓰일 곳이 있으리라 서예가 정도준 씨는 유명 서예가의 막내 아들이다. 선친은 유당 정현복 선생(1909~1973)으로 경남 진주에서 이름을 날린 한학자 겸 서예가다. 논개가 왜장을 끌어안고 숨을 거둔 진주 촉석루의 현판과 법보종찰 합천 해인사의 편액 '海印叢林(해인총림)'도 아버지의 작품이다.

어려서부터 어깨너머로 아버지의 글씨를 접한 그는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두각을 나타냈다. 그해 고향인 진주에서 열린 '개천예술제'에서 최고상을 받았으며 진주중학교에 진학해서는 글씨 잘 쓰는 아이로 주목을 받았다. 다른 친구들이 '싸구려 붓'으로 글씨를 쓸 때 그는 보란 듯이 아버지의 고급 붓으로 솜씨를 뽐냈다.

아버지는 글씨에 욕심을 내는 아들을 말릴 수도, 적극 권할 수도 없는 심정이었다고 한다. 고등학교에 들어간 그에게 대를 이으라는 뜻의 '소헌(紹軒)'이라는 호를 지어줬지만 대학은 상대를 가길 원했다. 그래서 그가 진학한 곳이 건국대 경제학과였다.

대학 입학 후 갈피를 잡지 못하던 그에게 어느날 도서관에서 이태백의 글이 눈에 들어왔다.

'천생아재필유용(天生我材必有用ㆍ하늘이 나를 낳아주셨으므로 반드시 쓰일 곳이 있으리라)'.

그는 이 글귀에 한 번뿐인 인생을 서예에 바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는 당시 서단의 최고봉인 일중 김충현 선생 수하로 들어갔다.

일중의 교수법은 간단했다. '스스로 알아서 해라.' "이래라저래라 간섭하지는 않았지만 훌륭한 스승 밑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많은 걸 배웠어요. 그를 닮고자 하는 마음이 컸으니까요." 1982년 대한민국미술대전에서 그는 가장 오래된 서체인 전서체로 '조춘(早春)'을 써 대상을 거머쥐었다. 아버지가 타계한 지 10년이 흐른 뒤였다. 그 뒤부터 아버지는 그의 꿈에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다. 예술은 타고 나는 것이냐고 묻자 의외의 답이 돌아왔다. "나 자신이 천재가 아니라는 것을 빨리 알아챘지요.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내가 이 세상에서 줄일 수 있는 것은 잠밖에 없었어요." 그는 눈덩이만 한 천재성도 그것을 굴리려면 노력이 뒷받침돼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그의 피나는 노력은 작업실 한쪽에 수북이 쌓인 파스 박스에서 엿볼 수 있었다.

"파스를 박스로 사놓고 생활합니다. 침이 등에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굳어 있어요. 주머니에 늘 파스를 넣고 다니지요." 그의 작업실에는 오래된 묵(墨) 향기와 알싸한 파스 냄새가 묘하게 섞여 있었다.

[이향휘 기자 / 사진 = 김호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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