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농촌마을 복원의 꿈, 함께 꾸면 현실이 된다

2012. 1. 20. 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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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전남 영광 묘량면 여민동락 공동체 르포

페이스북이었던가. 회자되는 책 한 권의 제목이 눈에 밟혔다. 여민동락. 풀어 쓰자면 "민초와 함께 즐거움을 같이한다(與民同樂)"는 말이다. 인터넷을 찾아보니 < 맹자 > 양혜왕 하편이 출전이다. 책의 저자는 강위원이다. 전 한국대학생총학생회연합 의장이다. 한동안 소식이 끊겼던 그가 시골마을에서 뭔가를 도모했고, 그 결과물을 책으로 정리한 것이다. 책의 부제가 그가 어떤 일을 벌였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마을공동체 만들기 좌충우돌의 기록'.

영광군 묘량면 713-7번지에 자리잡은 여민동락 사무실. | 정용인 기자

책 내용이 궁금했다. 그런데 책을 구할 수 없었다. 대형서점에도 없었다. 할 수 없다. 정면돌파. '더불어 행복한 농촌 공동체를 만드는' 여민동락 공동체는 전라남도 영광군 묘량면에 자리잡고 있다. 사무실로 연락했다. 책 한 권을 보내줄 수 없겠느냐고. 이튿날 등기로 책이 왔다. 책에는 노란 편지지에 적힌 편지가 동봉되어 있었다. 정성스럽게 꾹꾹 눌러쓴 글씨다. "젊은 세 부부의 귀촌으로 시작된 변방의 작은 농촌마을에서 이뤄지고 있는 아름다운 공동체 이야기에 관심 가져주셔서 감사합니다.…(중략)…책을 읽고 여민동락 공동체에 마음이 움직이셨다면 '여민동락'을 함께 일궈갈 천사가 되어주세요.(후원카드 작성)"

주목했던 이유는 또 있다. 한국에서 대안공동체에 대한 '실험'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공동육아에서 대안학교로, 생협에서 지역시민단체 결성으로 이어진 성미산마을과 같은 실험이다. 벌써 10년 넘은 경력을 쌓은 지역화폐운동과 같은 대안 모색도 있다. 그런데 이것들은 도시에서 진행된 것이다. 농촌에서 마을공동체 만들기라. 대학에서 경험했음직한 '농활'과는 또 다르다. 계속 이어져야 하는 '삶'이다.

세 부부의 의기투합이 이룬 꿈

"아이고, 지역화폐나 생협은 꿈도 못꾸고 있습니다. 여기는 그야말로 농촌형입니다. 철저하게 작은 면 단위를 중심으로 할 수밖에 없어요. 운동적 차원의 대안이라기보다는 생존형 차원의 모델입니다. 지역주민들이 보다 나은 삶을 살고, 기존 공동체가 유지되고 지탱하는 최소한의 역할을 하는 것이 목표지요." 강위원 대표(41)의 말이다.

1월 11일, 기자는 여민동락 공동체를 방문했다. 묘량면 713-7번지에 자리잡은 사무실은 아담한 규모다. 정면에서 보면 가운데 노인주간돌봄센터를 중심으로 '이문은 없어도 사람과 사람을 잇는 마을 가게'라는 표어가 걸려 있는 '동락점빵'이 오른쪽에, '차와 함께하는 작은 책방' '동락'이 왼쪽에 자리잡고 있다. 사무실 앞에는 마을 어르신들이 '노란 차'라고 부른다는 여민동락 비스토 차량이 주차되어 있다. 차는 설립 준비 때 한 회원이 기증한 것이다. 마을주민들이 읍내에 나갈 때도, 불편을 겪는 어르신들을 모셔드릴 때도 '노란 차'는 톡톡히 역할을 한다.

앞의 '편지'가 언급한 '세 부부'는 강위원·양효라 부부. 이영훈·이민희 부부. 권혁범·김강선 부부다. 여민동락의 인터넷페이지(http://ymdr.kr)에 들어가면 세 부부의 사는 이야기 코너가 별도로 마련되어 있다. 도시생활에만 익숙했던 세 부부가 '농촌복지공동체'를 만들어보자는 데 의기투합한 것은 2007년. 벌써 5년이 흘렀다. 시작할 때의 결심은 이렇다. 복판보다는 가장자리에서, 중심보다는 변방에서 보다 우직하게 사회적 실천을 하며 살자. 강 대표는 말한다. "터전을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남들이 가지 않은 곳으로 가자'는 생각에 이르렀습니다. 국가의 지원과 보조 없이 재정적 독립을 이뤄야 활동의 독립, 정치적 독립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때 문득 생각난 게 '고향'이었어요." 묘량면은 강씨의 고향이다. 중학교 시절 전반까지 그는 이곳에서 학창시절을 보냈다.

강 대표의 전남대 총학생회 시절 학생회 간부였던 권혁범 노인복지센터장(38)은 부부교사를 꿈꾸다가 합류했다. 한총련 조국통일위원장을 역임했던 이영훈씨(34)는 사목을 꿈꾸다가 강 위원장의 제안을 받아들인 경우다. 시행착오? 많았다. 부부싸움도 끊이지 않았다. 막연하게 전원생활을 꿈꾼다면 오산이다. 책의 표현에 따르면 "약국도 없고 24시 편의점도 없고, 야식 배달도 되지 않는, 짜장면 20그릇, 통닭 4마리여야 겨우 읍에서 배달되는" 것이 면단위 농촌의 현실이었다. 게다가 아이를 키우면서 아내 중 한 명은 기간제 교사로, 또 한 명은 입시학원에서 영어를 가르치면서 생계를 이어가야 했다. 빈집살이를 하는 것이나 폐교 위기의 학교가 사정이 열악한 것은 매한가지였다.

'10원 자판기'가 가르쳐 준 것은

사전에 많은 준비를 했지만 계획대로 되는 건 별로 없었다. 학생운동이 그들에게 남겨준 경험은 '막히면 토론한다'는 것이었다. 강대표의 회상. "사업이 아니라 삶이어야 한다, 그러고 보니 거칠 것이 없었어요. 회사가 아니니 문책은 없잖아요. 답은 현장에 있으니 두려워 말자. 나서는 문제는 밤새 고민해서 토론했어요." 계획도 현장에 맞게 변경됐다. 원래는 어르신들을 모셔오는 주간보호센터는 하지 않으려고 했다. '찾아가는 복지'가 맞다는 생각에서다. 지역아동센터를 세우려고 했는데, 다른 종교단체에서 그 일을 하니 계획이 변경돼 주간보호센터를 만들었다. 사무실은 책방 겸 찻집의 역할을 하는 주민 사랑방으로 만들었다. 아이들이 오다보니 어린이책을 구해 꽂았다. 찻값과 이용료는 공짜다. 벽의 화이트보드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지역주민 모두가 주인이기에 찻값과 이용료는 무료입니다. 다만, 지나실 일이 있으시거든 호박 1개, 오이 2개, 고구마 3~4개 조용히 놓아두시면 그것으로 '행복'입니다."

신뢰는 처음부터 만들어지지 않았다. 학생운동 출신이라는 것에 대해 흰눈을 뜨고 바라보는 지역민도 있었다.

5년 전, 여민동락 공동체에 대한 구상에 의기투합한 세 식구. 왼쪽부터 권혁범·김강선 부부, 이영훈·이민희 부부, 강위원·양효라 부부. | 여민동락 제공

방역사업에서부터 아침마다 어르신들을 찾아 큰절 드리기, 생신잔치와 돌아가신 어르신 제사 지내는 프로그램 등 여민동락 공동체의 활동을 보면서 마을사람들은 마음의 문을 차츰 열었다. 냉대와 홀대가 환대로 바뀌는 건 순간이었다. 호박 한 개, 고구마순 한 봉지, 마늘, 고추, 감자, 옥수수…. 마을주민들이 자신이 키운 농산물을 들고 찾아왔다. 쌀 한 가마를 가져다주는 어른도 있었다. "'저 친구들은 나라에서 나랏돈을 받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이 십시일반 털어서 이렇게 가난하게 일을 시작한다더라.' 그 가난이 손을 내밀 수 있고 주민 신뢰를 얻을 수 있는 연대의 밑바탕이 되었습니다."

주민사랑방 '동락' 옆에는 자판기 커피가 있다. 자판기 커피기계를 기증받아 설치한 것이다. 이용료는? 커피 한 잔 값이 10원이다. 100원을 넣으면 10잔을 마실 수 있다. 이래서야 유지가 가능할까. "역시 토론이 많았습니다. 처음에는 주전자를 가지고 와서 받아가는 분도 있었어요. 그리고 길을 지나가는 화물차 기사 중엔 아예 깔대기까지 가지고 와서 페트병에 받아가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첫 달에 6만7000원 손해가 났어요."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다. 자판기 옆에 따로 마련한 '사랑의 동전함'에 돈이 쌓였다. 주전자를 들고 온 주민은 나중에 1만원짜리 지폐를 내놨다. "참 공부 많이 했습니다. 10원짜리 자판기는 안 될 것이라는게 선험적 예단이었어요."

그리고 고민은 발전한다. 최근 2~3년간 여민동락 공동체가 추구하는 마을 발전의 모델이 '마을 기업'이다. 마을기업 또는 커뮤니티 비즈니스는 현재 행정안전부, 지식경제부, 농림수산부 등에서 경쟁적으로 도입하고 있는 개념이지만 여민동락이 처음 계획을 세웠을 때만 하더라도 생소한 개념이었다.

문제의식은 역시 '건강한 어르신들을 더욱 활기차게 하는 복지'란 무엇일까라는 고민에서 나왔다. "복지가 거꾸로 공동체의 본래적 기능이나 관계를 해칠 수도 있어요. 지금 생각해도 황당한 것은 처음 복지를 한다고 시골에 갔더니 마을에 사람이 없는 거예요. 노인복지센터에는 노인들을 데려가고 장애인 복지센터에서는 장애인을 데려갑니다. 그리고 조금 건강하신 분들은 농사를 지으러 나가고요. 국가의 돈이 조금만 잘못 개입하면 마을 안에서의 관계나 공동체에서 원래 있던 원형을 파괴하는 역전현상까지 나타날 수 있어요."

마을 기업, 농촌발전 모델되다

3년 전, 이들이 국가 보조 없이 시작한 것이 '여민동락 할매손 모싯잎 송편공장'이다. 마을기업은 공장과 다르다. 원래의 주업인 자기 농사를 지으면서, 또 마을의 대소사에 참여하면서 자신의 재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공장을 책임지고 있는 이영훈 사무국장은 "실제 몇 분 어른만 떡을 만들고 대부분 떡의 재료가 되는 영농사업에 집중하는 형식"이라고 설명한다. 여민동락이 생산하는 할매손 모싯잎 송편은 100% 지역주민이 생산한 쌀과 팥과 콩과 같은 송편 속 재료, 무농약으로 재배한 모싯잎 등으로 만든다. 판매는 주로 인터넷이나 전화 주문을 통해 이뤄진다.

묘량면 '마을기업'인 여민동락 할매손 모싯잎 송편을 만들고 있는 어르신들. | 여민동락 제공

송편공장이 국가 보조 없이 시작한 첫 마을기업이라면, '동락점빵'은 행안부 공식 공모사업으로, '영농사업단'은 농림수산부 농촌공동체사업으로 진행한 마을기업이다. 문제의식은 같다. 마을공동체의 복원. 여민동락 사무실을 거점으로 탑차를 이용한 이동식 5일장을 만든다는 것이 '동락점빵'의 구상이다. 인구의 고령화로 사라진 마을 구멍가게를 대신해 군대의 이동식 PX차량처럼 마을을 돌면서 기본적인 생필품과 제철음식을 공급한다는 문제의식이다. 강씨는 말한다. "농촌이니까 당연히 '텃밭에 나는 것만 먹으면 될 것'이라고 처음에 생각했는데 젊은 시절엔 바다에 나가 백합을 따먹었다는 한 어르신의 회상을 듣고 문득 깨달았어요. 마을 쭉 돌면서 어르신들의 욕구를 파악해 해결해주는 것이 목표입니다. 즉 생필품 등을 판매한다는 것만이 목적이 아니라 마을을 찾아다니며 주민들의 관계를 회복하는 데 기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본 것이죠." 영농사업단의 문제의식도 마찬가지다. 이농으로 떠난 휴경지를 다시 일구는 사업이다.

여민동락 공동체가 또한 역점을 두고 있는 사업은 '행복한 작은 학교'라는 이름으로 묘량중앙초등학교를 되살리는 일. 2010년 6학년 학생들이 졸업하고 나니 아이들 수가 12명으로 떨어졌다. 전교생 수가 21명 이하면 통폐합 대상이라는 교육당국의 통보를 받고 나서 본격적인 고민이 시작됐다. "학생 유치도 필요하지만 목표를 좋은 학교를 만드는 것으로 잡았습니다. 통학 차량부터 마련했습니다. 돈은 네이버 해피빈을 통해 500만원을 모았습니다. 처음에는 안 될 것이라고 비관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바뀌었어요.

작은 학교의 장점을 홍보하고 학부모 네트워크를 만들었어요. 외부 프로그램도 만들고, 학교 운영의 질로 승부하는 거죠. 지금도 위태위태하지만 현재 25명으로 아이들이 늘어났어요." 여민동락 공동체는 귀농 의사가 있는 사람에게는 직접 빈 집을 소개해준다. "농촌에서 일자리가 보장된다면 정주하는 역발상도 필요해요. 여기서 실제로 비용이 얼마나 들며, 살게 된다면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 구체적으로 같이 고민하는 것이 필요하죠. 사실 대안학교나 이른바 산촌유학이라는 것이 유행하고 있는데, 여기서는 공교육의 틀 안에서 대안교육을 능가하는 교육시스템을 갖추고 있다는 것도 장점으로 알리고 있어요."

여민동락 공동체에 대한 가장 큰 궁금증은 공동체의 지속가능성을 어떻게 보장하느냐다. 강 대표는 "후원과 노동·생산을 통해서 운영하도록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세 가족의 의기투합에서 시작한 공동체의 식구는 이제 14명으로 늘어났다. 이들의 월급은 평균 100여만원. 부부 합쳐 200만원이면 도시생활에서는 빠듯하다. 하지만 시골생활에서는 현재까지 큰 문제가 없다. 처음 세 가족이 들어왔을 때 없앤 민간보험도 '큰일을 대비해서' 되살리는 걸 생각하고 있다. 현재 월 1만원 정도씩 CMS를 통해서나 물품을 통해 후원하는 회원은 500여명. 1000여명까지 늘리면 완전히 자립이 가능한 걸로 여민동락 측은 보고 있다. 1만원을 후원한다면 월 5000원을 돌려주는 것을 목표로 한다. 단, 돈이 아니라 시골 먹거리다. 김장김치, 묵은지도 회원이 원한다면 값싸게 주문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강 대표는 덧붙였다. "마을주민들 사이에서도 이제 '뭔가 되네' 하는 분위기가 있습니다. 사실 농촌 패배주의랄까, 그런 것이 만연해 있었거든요. 그런데 조금씩 여기도 살 만한 곳이다 하는 그런 열망으로 바뀌는 느낌이랄까요. 앞으로도 학교는 2~3년은 역량을 투입해야 하고, 근근이 지탱하는 분위기이지만 성과가 이제야 멀리서부터 조금씩 와닿는 느낌입니다."

5기 한총련 의장, 복지관 관장되다

강위원 여민동락 공동체 대표 | 여민동락 제공

날씨가 추워서인지, 길거리를 거니는 어르신은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대신 눈에 띄는 것은 아이들. 초등학교 3~4학년쯤 되는 남녀 아이들이 뛰어와 '동락점빵'에 가서 군것질거리를 산다. 컴퓨터를 켜고 생필품 목록을 정리하던 직원에게 말을 붙여보려고 해도 "마을기업이라고 해놓은 건데, 부끄럽네요. 아직은…"이라며 뺀다. 강위원 대표를 만나서도 마찬가지였다. 마을 이야기를 물어야 하는데 자꾸 그의 경험, 학생운동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가기 일쑤였다.

1989년 고등학생 신분이었던 강 대표는 광주지역고등학생대표자협의회(광고협)라는 단체를 만들어 당시 막 결성된 전교조 지원활동을 한다. 광고협의 의장을 맡았던 강 대표는 고등학생 신분으로 구속되었고 학교에서 제적되었다. 상경한 강 대표는 광장시장 골목 음식점에서 일하면서 고학을 할 계획이었다. 시급이 다른 아르바이트보다 좋고, 또 끼니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 음식점을 선택한 이유. "노동을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라는 걸 그때 깨달았어요. 체력이 뒷받침돼야 가능하다는 것을…." 다시 광주로 돌아온 그는 4년 장학금을 받고 전남대 국문과에 진학한다. 전교조 활동 경험 때문에 학생운동은 조용히 뒤에서 돕겠다고 결심했다. 그를 흔들어놓은 것은 1994년 벌어진 우루과이라운드 쌀수입 개방 반대 싸움이었다. 광장에 나가 눈물을 흘리며 "우리 부모님들을 생각하며 상경해 싸우고 있는 친구들을 위해 기말고사를 1주만 늦추자"고 마이크를 잡은 것이 시작이었다. 국문과 학생회장을 거쳐 전남대 총학생회장, 5기 한총련 의장을 맡았다.

강씨는 스스로를 '너무나 상처만 남은 학생운동의 세대'라고 규정했다. 1996년 연대 사태를 기점으로 대학사회에서 학생운동은 퇴조했다. 그 '끝자락'을 보내면서 겪은 트라우마는 컸다. 1997년 '5기 한총련 의장'을 맡았던 강씨는 감옥에 갔다. 2001년 출옥 후 한총련 수배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녔다. '이적단체로 규정된 원년 의장'이라는 역사적 부채의식 때문이었다.

정치의 계절이다. 강씨는 지난해부터 광주 광산구 노인복지관 관장을 맡고 있다. 여민동락에 이어 도농복합공동체, 아파트 밀집지역에 도시형 공동체를 만드는 실험을 1년째 하고 있다. 혹시 출마 계획이 있는 건 아닐까. 총선 예비후보자들이 잇따라 출판기념회를 여는 계절이다. 오비이락이라고 이럴 때 그가 자신의 활동을 결산하는 책을 냈다는 것도 오해(?)를 낳을 수 있는 일이다. 혹시 정치권에서 호출이 오지 않느냐는 질문에 그는 손사레를 쳤다. "선거에 출마한다는 것은 존재를 이전하는 것이고, 자기 역사를 온전히 투신하는 것이거든요. 지역사회에서 구체적인 변화를 이끌어내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요새 느끼는 건 '다 정치하면 풀뿌리 농사는 누가 짓느냐'는 겁니다. 정직하게 자신을 분석하는 능력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항상 안타까웠던 게 시민사회운동이나 노동운동을 했던 분노와 결기, 열망만으로는 세상이 바뀌지 않더라는 겁니다. 자기 터전에서 준비된 리더십이 필요하다고 봐요."

< 정용인 기자 inqbus@kyunghyang.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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