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품택배' 쪽방 주민 "희망 보입니다"
"오늘 배달해야 할 택배는 700개쯤 되는 것 같네요. 그나마 오늘은 적은 편이죠. 이번 주말부터는 명절 선물 택배가 폭주하지 않을까 싶어요."
매서운 칼바람이 몰아치던 11일 오후. 서울 종로구 내수동의 한 공터에서 동료들과 함께 배달해야 할 상자들을 배송지별로 분류하던 작업반장 이현호씨(48·가명)가 '이 정도 물량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말했다.
이들은 창신동 쪽방촌 주민들의 일자리 마련을 위해 종로구청과 동대문쪽방상담센터가 만든 '길품택배' 직원이다. 길품은 '남의 길을 대신 가고 삯을 받는 일'이라는 뜻이다.
11일 오후 서울 종로구 내수동의 한 빌딩 앞 공터에서 길품택배 직원들이 배달 물품을 배송지별로 분류하고 있다. | 종로구청 제공
현재 쪽방촌 주민 6명과 구청 공공근로자 2명이 함께 일하고 있다. 쪽방 주민들은 장시간 근무하기 어렵다는 편견을 깨고, 1년 이상 장기근무하는 이가 상당수다.
길품택배는 CJ·현대·한진 등 5개 택배사가 거점지역에서 물품을 넘겨주면 이를 손수레에 담아 내수동 일대 상가나 주상복합 건물 구석구석까지 직접 배달해주는 역할을 한다. 현재 월 500만원 정도의 수익을 창출하고 있다.
이들이 한 달 일해 받는 돈은 100만원. 택배사로부터 받는 배달수수료 건당 500원과 구청지원금 1인당 50만원을 합쳐 쪽방상담센터가 월급을 주는 식이다.
지난해 5월부터 길품택배에서 일해온 작업반장 이씨는 요즘 빚 갚는 즐거움으로 살고 있다. 노숙생활 시절, 당장 먹고살 길이 급해 그는 낯선 이에게 돈을 받고 자신의 '명의'를 팔았다. 그 후 그에게 돌아온 것은 잔뜩 밀린 4대의 대포폰 요금이었다. "그래도 여기서 일해 번 돈으로 대포폰 3대 요금은 다 갚았어요. 이제 서너 달만 더 있으면 남은 한 대 요금도 완납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한때 제대로 된 사회생활을 하겠다는 꿈조차 꾸지 않았기에 빚을 갚을 노력도 하지 않았지만, 길품택배에서 일을 하기 시작한 이후 그에게 '계획'이란 게 생겼다. 그는 빚을 다 갚으면 저축을 시작할 계획이다. 얼마 전엔 쪽방에서 고시원으로 방도 옮겼다. 그는 "고시원도 쪽방과 다를 바 없긴 하지만 그래도 외풍이 좀 덜하니 살 만하다"고 했다.
조민구씨(53·가명)는 무릎이 아픈데도 택배일을 자처했다. 1년2개월 동안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쪽방 안에 갇혀 살았더니 '더 이상 이렇게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이 일을 시작하고 마음의 안정을 찾았다"며 "쪽방촌에는 삶의 의지를 잃고 방에 틀어박혀 술로 세월을 보내는 분들이 많은데 그분들도 나처럼 극복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김영종 종로구청장은 "날씨가 점점 추워지는데도 불구하고 성실히 일해주셔서 감사하다"며 "경제적으로 어려운 주민들을 위한 일자리 창출에 더욱 힘쓰겠다"고 말했다.
< 정유진 기자 sogun77@kyunghyang.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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