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정치명가⑨]신사임당의 후예 해공 신익희 선생

박주연 2011. 10. 9. 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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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박주연 기자 = < 케네디, 루즈벨트, 애덤스, 부시, 태프트…. 미국의 대표적인 정치 명가(名家)다. 우리나라에는 대를 이어 정치를 하고 국민의 존경을 받을 만한 업적을 쌓은 가문은 없을까. 뉴시스는 한국의 정치명가 기획기사 아홉번째로 독립운동가이자 민주당을 창당한 정치인, 해공(海公) 신익희 선생편을 게재한다. >

3대 대통령 선거를 열흘 앞둔 1956년 5월10일 새벽. 전주에 가던 호남선 기차에서 62세의 노 정치인이 급서했다. 대통령의 연임 제한을 없애는 '사사오입'(四捨五入) 개헌을 하고, 다시 대선에 출마한 이승만 대통령의 강력한 라이벌 민주당 신익희(1894~1956년) 후보였다.

6·25전쟁이 끝난 1954년. 이승만 대통령의 자유당은 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압승을 거둔 후 대통령의 연임제한을 없애는 이른바 '사사오입' 개헌을 단행했다.

중국에서 20여년간의 독립운동을 마치고 광복 후 국내에서 정치활동을 하던 신익희 선생은 사사오입 개헌에 충격을 받고 '호헌동지회'를 결성했다. 이어 1955년 9월18일 호헌동지회원과 재야 정치인들을 규합해 '민주당'을 창당, 대표가 됐다.

1956년 3월18일 그는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지명됐다. 국민들은 '못 살겠다 갈아 보자'라는 선거구호를 들고 나온 신익희 선생을 지지했다. 5월2일 한강변에서 실시한 그의 유세에는 30만명이 넘는 인파가 운집했다.

하지만 신익희 선생은 호남지역 유세를 위해 밤열차로 전주에 가던 중 갑자기 서거했다. 국민들은 그에게 애도의 185만표를 던졌고, 5월23일 국민장으로 장례가 치러졌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탄금대서 순절한 신립과 신사임당의 후예

신익희 선생은 평산 신씨 문희공파 31대손이다. 1894년 7월 경기도 광주시 초월면 서하리에서 조선조 정2품 장례원경과 사헌부대사헌, 이조참판 등을 지낸 신단(申壇)의 다섯 아들 중 막내로 태어났다.

평산 신씨의 시조는 고려 태조 10년인 927년 대구 팔공산 기슭의 '동수전투'에서 왕건을 살리고자 견훤의 군사와 격전 끝에 목숨을 바친 장절공 신숭겸이다.

신 선생의 11대조인 충장공 신립은 임진왜란 때 충주 탄금대에서 왜병과 싸우다 순절한 무장이다. 신립은 23살 때 무과에 급제, 함경도북병사, 우방어사, 함경도남병사, 평안도병마절도사 등을 지냈다. 사후에 영의정으로 추증됐다.

문희공파의 파조인 문희공 신개는 신립의 후손으로, 세종 때 우의정·좌의정·공조판서·이조판서·형조판서 세자이사(世子貳師)·집현전대제학을 지낸 조선조 초기의 문신이다.

율곡 이이의 어머니이자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여류 예술가 신사임당 역시 신익희 선생의 가문이다. 신사임당은 신익희의 13대 방조인 신명화씨의 딸이다.

신익희 선생의 증조부인 신현은 1794년 급제한 뒤 세자였던 순조의 스승인 '보덕'(輔德), 성균관 대사성과 사간원 대사간, 호조참판, 이조참판 등을 지냈다. 고조부 신대우 역시 호조참판을 지낸 석학이었다.

◇日유학중 19세 때 손가락 잘라 독립운동 맹세

신익희 선생은 왜적과 싸우다 탄금대에서 순절한 그의 11대조 신립처럼 치열하게 일제에 항거하는 삶을 살아야 했다.

어린시절 맏형인 규희에게 사서삼경 등 한학을 배운 그는 을사늑약 체결 3년 후인 1908년 서구문명을 수용해 나라를 부강하게 하겠다는 의지로 상경했다.

이어 한성관립외국어학교 영어과에 입학했고,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대학 정경학부에 입학해 수학했다.

일본 유학 시절 그는 유학생들을 결집시키기 위해 '학우회'을 조직하고 기관지인 '학지광'(學之光)을 발간했다. 19살 무렵이던 1913년에는 윤홍섭, 장덕수 등과 손가락을 잘라 피를 나눠 마시며 독립운동에 목숨을 바칠 것을 맹세했다.

신익희 선생은 1916년 유학을 마치고 귀국해 중동학교와 보성법율상업학교(고려대학교의 전신)에서 교편을 잡았다.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이 '민족자결주의'를 선언한 1918년에는 최남선, 임규, 송진우, 윤홍섭 등과 함께 독립운동을 밀의했다.

같은 해 11월 중국 등 해외로 나가 이시영, 홍범도, 문창범, 김좌진, 조소앙 등 해외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들을 만나 3·1운동에 맞춰 선언문을 배포할 것을 요청했다.

1919년 1월21일 덕수궁 함녕전에서 고종이 승하했다. 갑작스런 별세에 국내에서는 황제가 독살됐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일었다.

국내로 돌아온 신익희 선생은 제자인 강기덕·한창환 등과 연락해 3월5일 남대문역과 서울역앞 만세시위를 추진했다. 이 시위는 고종의 인산(因山·황제의 장례)을 위해 상경했다 돌아가는 사람들에게 강한 인상을 줘, 3·1운동이 전국에 확산되는 계기가 됐다.

◇중국으로 망명, 임시정부 수립…광복 후 반탁운동 벌여

3·1운동 직후 중국으로 망명한 신익희 선생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조직에 적극 동참했다. 초대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선임돼 이시영, 조소앙 등과 함께 임시헌장 제정 기초위원으로서 '대한민국 임시헌장'과 '선포문' 초안을 만들었다.

임시정부 수립 후 그는 초대 내무차장 겸 내무총장 대리로 선임돼 국무총리 대리를 맡은 안창호 선생을 도았다. 이어 임시정부의 각종 활동과 법령을 전달하기 위해 국내의 도·군·면 단위로 조직한 비밀 행정조직 '연통제'를 창안했다.

한국혁명당 대표였던 1933년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 의열단, 한국광복동지회 대표들과 합의해 민족협동전선인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을 탄생시켰다.

또 1935년에는 신한독립당 등 5당을 통합시킨 '민족혁명당' 창당을 추진하기도 했다.

1945년 8월15일 광복을 맞은 후 신익희 선생은 임시정부 2진으로 11월1일 전북 군산공항을 통해 입국했다. 김구 선생을 도와 반탁운동을 선도했다. 인재양성을 위해 '국민대학교'를 설립하고, '자유신문'을 발행하는 등 조국의 자주와 독립을 위해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신익희 선생은 1948년 5월 제헌국회의원 선거에서 경기 광주에 출마, 무투표로 당선돼 제헌 국회부의장이 됐다. 같은 해 8월4일 이승만 국회의장이 대통령이 된 후 국회의장으로 선출됐다.

이후 그는 제헌국회 1, 2기, 2대 국회1, 2기 등 4차례에 걸쳐 국회의장을 역임하며, 의회 민주주의 확립을 위해 노력했다.

◇형 재희와 조카들 항일독립운동…신하균·신낙균 정치명맥 이어

신익희의 형 신재희 역시 독립운동가로 동아일보 기자를 지내다 중국으로 망명,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며 항일운동에 앞장섰다.

신재희는 독립운동가 이회영·이시영 7형제의 여동생과 결혼했다. 그의 아들인 해균·양균·용균과 딸 계순이 모두 독립운동에 삶을 바쳤다.

신익희 선생의 장남 신하균(1918∼1975년) 역시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이다.

신하균은 3·1운동이 일어나기 바로 전 해인 1918년 태어난 신하균은 부친을 따라 중국으로 건너가 중국 상하이 광화대학을 졸업했다. 이후 충칭(重慶)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한국광복군에 입대, 독립운동을 했다.

신하균은 부친 신익희가 사망한 후 광주 보궐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해 제3대 국회에 입성했다.

이후 5~ 6대 잇달아 당선돼 민주당의 후신인 신민당·민중당 등에서 활동했다. 그는 자신의 부친이 1950년대 민주당 중앙당사의 간판을 썼듯이 1960년대 민중당 중앙당사 간판에 필적을 남겼다.

현재 민주당 소속인 신낙균 의원 역시 평산 신씨다. 신 의원은 여성이지만 신하균 의원과 같은 돌림자를 쓴다.

1941년 경기 남양주에서 출생한 신낙균 의원은 이화여대 기독교학과를 졸업한 후 미국 예일대에서 종교학 석사를 취득하고 조지워싱턴대에서 교육학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1995년 새정치국민회의 부총재로 정계에 입문한 그는 15대, 18대 총선에서 당선돼 민주당에서 활동하며 정치의 맥을 잇고 있다. 민주당 최고위원, 수석부대표, 문화관광부 장관 등을 역임했다.

평산 신씨 후손 중에는 '처음처럼'과 '사람이 희망이다'의 신영복체로 유명한 신영복 성공회대 석좌교수, '부석사', '엄마를 부탁해'의 신경숙 작가, '껍데기는 가라'의 신동엽 시인, 가수 신중현과 아들 신대철 등이 유명하다.

pjy@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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