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훌쩍 떠나는 여행] 부여 백제문화단지

2011. 9. 27. 1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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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시기가 삼국시대다. 그리고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그 문화를 보존하고 있는 나라는 신라뿐이었다. 고구려는 북한에서, 신라는 대한민국에서, 그리고 백제는? 참으로 거시기한 이야기지만, 백제의 문화는 남아있는 게 거의 없는 게 현실이다. 복원 의지도 강하지 않아 오랜 세월 사료로만 이어져 온 게 사실이다. 최근에 문을 연 백제문화단지는 그 옛날 백제의 빼어난 문화를 되살리기 위한 최초의 적극적 공간이다. 이제 시작일 뿐이지만 문화단지의 규모가 장난이 아니다.

부여가 확 좋아진 거시기한 이유

MBC 드라마 '계백'을 보다 문득 교토 금각사를 떠올렸다. 아! 그것은 평생 잊을 수 없는 풍경으로 내 가슴에 각인되고도 남았다. 금각사가 지배자의 건축물이었다면 철학의 길 양쪽으로 나란히 서 있던 그 단순한 디자인의 가옥들은 백성들의 건축물들이었다. 교토를 떠나 나라의 동대사에 들어갔을 때 그 건축물이 백제에서 온 것이라는 말을 듣고 반갑고 놀랐으나 한국에 그 어떤 원형도 남아있지 않다는 것을 확인하고 실망했던 기억도 생생하다. 드라마 '계백'을 보며 교토와 나라를 떠올리고, 그 연상이 부여에 새로 문을 연 '백제문화단지'로 연결된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십 수년만의 그 원형을 볼 수 있겠다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여행은 세 사람이 동참하기로 했다. 청주를 여행 중이던 A모씨가 현지에서 차를 갖고 부여로 오고, 나와 또 한 사람은 남부터미널에서 부여행 고속버스를 타고 부여 터미널로 가기로 했다.

부여는 그 명성에 비해 작은 도시다. 찬란한 고도로 성장한 통일 신라의 경주와 비교해 보면, 역시 세상은 승자 독식으로 돌아가는 게 현실인 듯 하다. 터미널은 한산했고 거리 또한 조용한 편이었다. 토요일이긴 했지만 도대체 사람들은 다 어디에 갔는지 의아할 정도로 인적이 드물었다.

터미널을 빠져 나온 나는 청주에서 온 친구와 만나기로 한 부소산성 입구로 가기 위해 택시 정류장으로 갔다. 그곳에는 빈 택시 서너 대가 서 있었고 기사들은 승객을 위해 만들어놓은 승강장 벤치에 모여 앉아 수다를 떨고 있었다.

"저기..부소산성 갈건데요.." "거긴 저기유"(내 눈에도 보이는 저쪽 야트막한 산을 바라보며) "아…택시 타면 안되나요?" "바로 저긴디, 10분이면 거시기 하는디, 택시는 모더러 타유? 킬킬" 택시 기사가 승객보고 택시를 타지 말라니, 그것을 고맙다고 해야 할 지, 삐쳐야 할지, 아무튼 털털거리며 부소산성 입구를 향해 걷는데, 영화 '황산벌'에서 박중훈이 던졌던 대사 '거시기 해불좌!!!'가 생각나면서 혼자서 킬킬킬하다 보니 갑자기 부여가 겁나게 좋아지고 말았다.

부여 시내에서 출발, 백마강변까지 이어지는 부소산은 백제 성왕 때 천도한 후기 백제의 수도였다. 부여 사람들이 죄 어디로 갔나 했더니 모두 부소산을 산책하고 있었나 보다.

산성 입구부터 산길 곳곳에는 산책하는 이 지역 시민들과 여행자들 모습이 자주 눈에 띄었다. 부소산에는 삼충사, 영일루, 낙화암, 고란사, 궁녀사 등 백제의 유적들이 백마강을 향해 서 있고 산책길 곳곳에는 흐드러진 들꽃과 옛터가 자연 그대로의 모습으로 행인의 눈길을 잡았다. 낙화암으로 향하는 길목에서 발견한 사슴벌레 일당을 보며 이곳이 유적지로서의 가치와 더불어 살아있는 생태계로 인간과 더불어 시간을 만들어 가고 있다는 생각도 했다.

이윽고 낙화암.

백제의 매력을 보여줘야 할 후손들

낙화암 앞에서 백마강을 내려다보니 꼭 짚고 넘어가야 할 일이 생각난다. 그것은 세상 살이 절대로 밀려나면 안 된다는 투지다. 삶의 어떤 단면은 투쟁일 수 밖에 없는데, 멸망한 백제가 승리한 신라로부터 당한 능멸의 부피는 이루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 특히 의자왕과 삼천궁녀에 대한 근거 없는 왜곡은 도를 넘었다는 생각마저 들게 한다. 의자왕은 결코 색욕에 미쳐 궁녀 삼천을 거느린 미친 왕이 아니었다. 삼국시대 최대의 스캔들이었던 '서동요'의 주인공은 백제 무왕과 신라의 선화공주이며 그들이 낳은 자식이 훗날 의자왕이 되었다'삼국유사'.

의자왕이 즉위 직후 정치적 파워가 약했던 것은 그의 어머니가 신라 공주였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나온 것도 이런 태생적 한계에 기인한 것이다. 그러나 의자왕은 보위에 오르자마자 자신의 왕위를 반대했던 정적들을 물리치는데 성공했고 외교력과 군사력에서 발군의 치적을 쌓아 신라의 성 40여 곳을 빼앗기도 했다. 백제가 망한 결정적 원인은 나당연합군이었다. 외교의 실패가 멸망을 가져왔으니 패국의 마지막 군주로서 욕 먹어 당연한 일이지만 백제 사료 그 어디에도 기록(이 발견되지) 않은 삼천궁녀, 낙화 따위의 주장은 상식적으로 말이 안되지 않을까.

게다가 고란사 수직 절벽이 있는 지금의 낙화암에서 절벽 아래로 3000명이 뛰어내렸다는 주장을 현장에 가서 빗대어 생각해 보면 그것이 얼마나 대단한 '구라'인지 가늠하고도 남는다. 백제가 감내해야 할 이런 치욕은 모두 백제가 '졌기' 때문이다. 낙화암 앞에서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백제 유일의 석탑으로 남아있는 정림사지 5층석탑이 보고싶어졌다.

낙화암에서 10분쯤 걸어내려가면 고란사가 나온다. 낙화암에서 뛰어내린 백제인들이 떨어진 곳은 백마강이 아닌 고란사 근처 바위 계곡이었다. 그 이름도 어여쁜 고란사(皐蘭寺)는 낙화(落花)가 된 백제인들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이곳에 지어졌다. 지금도 식수로 애용되는 고란수가 나오고 바위틈에서 자라는 다년초 식물 고란초가 있는 천년 생태 현장이다. 고란사 선착장에서 황포돛배를 타고 백마강을 내려가 구드래나루터에서 내린다.

정림사지오층석탑은 부여 시내 한 복판에 있으며 정림사지박물관과 나란히 있다.

정림사오층석탑은 목조탑을 흉내낸 석탑 가운데 가장 독립적인 디자인과 높은 완성도를 뽐내는 아름다운 건축물이다. 이 석탑이 보전된 이유는 단 하나. 나당연합군의 사령관이었던 소정방이 이 석탑에 자신의 정복 사실을 기록함으로 살아남은 것이었다.

이제 부여 시내를 떠나 백제문화단지로 갈 시간. 백제문화단지는 백마강을 건너 5분쯤 달리면 나오는데, 입구 정양문을 보자 단박에 1990년대 일본 여행 때 나라의 동대사에서 보았던 치미가 눈에 띄었다. '치미'란 용마루 양 끝을 장식한 날개 모양을 말하는데, 그것을 보자 '아, 이것이었군!' 하는 탄식이 저절로 터져나왔다. 실로 20여 년 만에 확인한 백제문화와 일본문화의 유사성이었다.

정양문을 지나면 사비궁의 넓은 마당이 펼쳐지고 정면으로 천정문의 매끈한 모습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백제문화단지에 재현된 사비궁은 궁궐의 중심이 되는 천정전과 문사전, 무덕전 등이 회랑으로 둘러싸인 형태를 하고 있다. 천정전은 사비성의 상징적 공간으로 신년하례식, 사신 접견 등 왕실의 중요 행사 때만 사용하던 공간이다. 이곳에 가면 백제 사비 시기의 중궁을 재현한 중궁전, 왕의 집무실 등을 볼 수 있다.

사비궁을 나오면 오른쪽으로 커다란 목탑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능사'다. 능사는 백제 최고의 성군으로 꼽히는 '성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창건된 사찰이다. 능산리에서 발굴되었던 것을 원형과 똑 같은 크기로 이곳에 재현했다고 한다. 능사의 건축, 색체, 조각품 등은 백제 예술의 전형을 보여주는 가치를 지니고 있다. 능사 근처 뜰에 나가면 고분공원이 있는데, 백제 시대의 대표적 묘제를 보여주는 곳으로 사비시대의 대표적인 고분 형태를 볼 수 있다. 이곳의 고분들은 재현을 한 것들이 아닌 복원 고분으로 백제문화단지 화계조성부지에서 출토된 석실분 4기와 부여군 은산면에서 출토된 석실분 3기 등 모두 7기가 조성되어 있다.

백제문화단지에서 빼놓을 수 없는 관람 포인트는 역시 생활문화마을. 백제 시대 귀족부터 군관가옥, 그리고 중류계급과 서민계급의 집들을 재현해 놓았다. 군관 계백의 집, 건축가 아비지의 집, 의박사 왕유릉타의 집, 불상조각가 도리의 집 등이 있다. 생활문화마을 위에 자리잡은 위례성은 한성 백제(BC 18~AD 475)의 도읍을 재현해 놓은 공간으로 위례궁, 고상가옥, 개국공신 마려의 집 등을 당시 백제의 건축과 생활상을 볼 수 있도록 조성되어 있다.

백제문화단지는 백제의 흔적을 재현한 그 첫번째 그림으로 앞으로 이곳은 물론 주변을 채울 백제의 문명은 끝이 없을 것으로 기대된다.

여행 정보

교통편

천안-논산고속도로 서논산 IC - TG - 4번국도 부여 방면 - 능산리고분 - 가탑교차로 - 부여시내 서천-공주고속도로 - 부여 IC -TG - 부여종합운동장 - 은산천교 - 부여시내 여행 문의영주군청 문화관광 041-830-2244 | 백제문화단지 041-830-3400  맛집백제향041-837-0110 충남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653-1 부여 시대의 대부분 맛집은 부소산성에서 구드래나루터로 이어지는 길가에 밀집해 있다. 대부분 '한 맛' 하는 집들로 보통 30분은 기다려야 숟가락을 들 수 있다. 가는 곳마다 사람들로 만원이니 어쩔 수 없이 부여 시내로 들어가 보았다. 차 안에서 검색해 보니 궁남지 근처의 연잎밥 전문점 '백제향'이 눈에 들어온다. 우리나라에서 연잎밥을 처음 발명했다는 이곳 역시 30분을 기다린 끝에 겨우 엉덩이를 붙일 수 있었다.(대기하는 사람을 위해 의자라도 좀 놔주시지…) 검은콩 등 몇 영양 식재들과 함께 연잎에 쌓인 채 짓는 연잎밥은 그 은은한 향기와 감칠맛이 특징이고 10 여 가지의 깨끗한 반찬 또한 인상적이다.

[글·사진 이영근 (여행작가)]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296호(11.10.04일자) 기사입니다] [화보] 최여진 과거사진 `올킬` 이럴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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