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 한결같이 퍼주는 '김씨 아저씨'

배성민 기자 2011. 9. 6. 0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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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당당한 부자]<5>김수안 서울 중구의회 의장

[머니투데이 배성민기자][[2011 당당한 부자] < 5 > 김수안 서울 중구의회 의장]

# 42년 전 20대 초반의 한 청년이 베트남으로 가는 배에 몸을 실었다. 백마부대의 일원이었다. 가난했던 그는 돈을 벌고 싶었다. 떠날 때 무일푼이었던 그는 1년뒤 월급을 고스란히 모은 20여만원의 돈을 들고 귀국했다.

# 13년전 50대 초반의 지긋한 신사가 한 가지를 다짐했다. 지방의회 의원으로 공직을 시작하면서 그는 자신이 받는 의정비를 한 푼도 축내지 않고 남을 돕겠다고 말이다. 13년째 그 약속은 지켜지고 있다. 의정비로만도 3억원 가까이 된다.

20대의 까까머리 군인과 50대의 초로의 신사는 모두 같은 사람이다. 올해 63세가 된 그는 서울 중구의회 의장을 맡고 있는 김수안 구의원이다. 한결같다는 말은 그를 두고 하는 말이다.

그의 지역구는 서울 중구 회현동, 필동, 장충동, 신당2동으로 남산 자락에 위치해 있다. 지역구는 그가 의원으로 재직하고 있는 동안 몇차례 개편됐지만 그가 살고 있는 곳과 주요 기반은 필동으로 변함이 없다.

정확히는 그 뿐만 아니라 그의 아버지, 할아버지도 중구 구민이었다. 달라진 것이 물론 있다. 남대문시장과 동대문시장 주변에는 현대식 쇼핑몰이 많이 들어찼고 지하철도 많이 뚫렸다. 중구의 몇몇 극장은 멀티플렉스 극장이 됐다. 하지만 회현동 남대문 시장 상인들부터 필동 인쇄골목 사장님들, 장충동의 식당 아주머니들로부터 김 의장은 꼭같은 평가를 받는다.

물론 사업체를 운영하던 80년대에는 김 사장으로, 지방의회 의원을 시작한 90년대에는 김 의원으로, 구의회 의장을 맡은 최근에는 김 의장으로 호칭은 바뀌었다. 하지만 그는 30년째 한결같이 하는 일이 있다. 그의 회사와 집이 있는 중구의 어려운 분들을 돕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파티, 선물용품 판매, 광고업 등을 하는 그의 사업장은 항상 즐거움을 파는 것을 목표로 한다. 하지만 즐거움과 행복이 넘쳐나야 하는 곳의 주변은 병으로, 가난으로 시달리는 이들이 유달리 많았다. 70 ~ 80년대 그는 주변의 김 사장, 박 사장, 이 사장 등 사장님들과 사업상 거래했지만 김씨 아저씨와 이씨 할아버지, 박씨 아주머니 등 주변의 어려운 사연도 그냥 흘려듣지 못 했다. 일찍 어머니를 떠난 보낸 사연도 있긴 했지만 어려운 이들을 그냥 지나치지 못 하는 김 의장의 성격도 작용한 탓이다.

병원비가 없다는 이들에게는 큰돈은 아니지만 돈을 건넸고 자녀 등록금이 없다는 이들에게는 몇만원, 몇십만원을 건네기도 마다하지 않았다. 어렵게 사는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많았지만 독거노인이라는 말조차 흔하지 않던 그 시절 이야기다.

경로당 치우기와 물건 나르기, 어려운 이웃들을 위한 김치 담그기, 남산 일대 환경미화와 청소 등 몸을 쓰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다행스러운 일도 있다. 20대 중반에 만나 40여년 가까이 인생의 반려자가 돼 준 김 의장의 부인도 남을 위해 돈을 쓰는 것은 아까와하지 않는다. 처음에는 부부가 하는 일(광고, 행사 대행, 파티.선물용품 판매, 요식업 등)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수지타산 계산도 없다고는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득을 바래서는 30여년 가까이 이어져온 봉사와 나눔을 설명할 수는 없다.

김 의장은 지금까지 얼마를 남을 위해 썼느냐고 묻자 미소만 지었다. 사업체를 거쳐간 손님이 몇 명이었는지를 묻는 것과 비슷하다는 투였다. 기자에게 지금까지 기사를 몇건 썼고 한 기사의 글자수는 몇글자인지를 묻는 것과 뭐가 다르냐라고 되묻는 것 같았다. 그리고 김 의장은 십수년도 지난 일을 떠올렸다.

"쪽방에 사시던 어머니가 계셨습니다. 어머니가 편찮으셔서 병원에 입원하셔야 했는데 입원비와 치료비에 몇십만원이 부족했나 보더군요. 주변을 변통했지만 어려웠던지 제게도 어렵사리 말을 꺼내셨습니다. 많은 돈은 못 드리고 50여만원 정도 드렸습니다. 병원에서 치료를 받은 그 어머니는 중구를 떠나셨습니다."(어머니는 물론 그의 친어머니는 아니다. 그가 어머니, 아버지처럼 섬긴다는 많은 분들 중 한명일 것이다.)

그는 두어시간 인터뷰를 하는 중에도 여러 차례 핸드폰으로 전화로 누군가와 여러 차례 통화했다. 지역구민일 수도 있었지만 대개 그와 수십년간 인연을 맺어온 이들처럼 들렸다. 허풍이나 빌공자 공약(空'約)처럼 들리는 '예 제가 꼭 해결해 드리겠습니다'보다 '곧 뵐께요'라고 마무리하는 일이 많았다.

전화를 마친 그에게 '중구를 떠난 그 분은 어떻게 되셨나요'라고 물었다. 김 의장은 "이사를 가신 분이 제게 연락을 해 왔습니다. 꼭 한번 보고 싶다고. 왜 그러시냐고 묻자 그분은 '내가 세상에 빚이 많지만 꼭 갚고 싶은 빚이 있네. 그게 자네한테서 받은 돈이야. 다 갚고 싶지만 부족해. 내가 가진 돈 다 줄 테니 이해해 줘'라며 20여만원을 주시더군요."라고 답했다. "말할 수 없이 고마웠습니다. 몇몇 사람들은 '받기만 하는 이들도 있어'라고 하지만 내가 돕는 게 헛된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는 98년에 처음으로 구 의원이 됐다. 개인적으로 누군가를 금전적으로 돕는 것도 보람있지만 공공 기관에서 사람들을 두루 살펴줬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이 들어서였고 그 일을 맡아보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어서였다. 주변 사람들의 강권도 물론 작용했다.

어렵지 않게 구의원이 된 그해 그는 선거에 나서며 몇 가지 공약을 내세웠다. 깨끗한 의정 활동을 위해 의정비를 저소득 주민에게 쓰겠다는 것과 구민 혈세로 해외 여행을 가지 않겠다는 점을 약속했다. 그 약속을 지금도 지켜나가고 있다.

2008년 구의원이 10년째가 됐을 때 기탁한 돈을 얼추 꼽아보니 2억여원이 넘었다. 그뒤로 또 3년여가 지났고 그의 통장에는 여전히 의정활동비가 들어오지만 여기에 손 대본 적이 없다.

의정비로 모인 돈은 사회복지공동모금회 등을 통해서 어려운 이웃들에게 기탁된다. 한때는 주민들에게 쌀이나 물건을 갖다 주거나 직접 나서서 도와주었지만 공직선거법 강화로 기부 행위가 제한됨에 따라 지금은 사회단체 등을 통해 후원하는 것이다.

지난 6월 고액 기부자 모임 '나눔리더스클럽' 창립 회원으로 선정되기도 한 그는 후원물품은 가끔 스스로 정하기도 한다. 쌀과 계란 같은 것이 대표적이다. 40여년 전 그는 쌀밥과 계란 반찬을 항상 먹고 싶어 돈을 벌겠다는 결심을 했다. 총성이 끊이지 않는 베트남행 배에 몸을 실은 것도 돈을 벌고 싶어서였다. 그때 생각이 나 쌀과 계란 전달식은 가끔씩 연다.

중구를 주로 살피지만 국내, 또는 세계에까지 관심을 넓히기도 한다. 어린이재단을 통해 십시일반 매달 내놓는 돈도 있고 '세이브 더 칠드런'을 통해 세계의 빈곤 어린이를 돕고 있기도 하다.

김 의장은 "직접 어려운 주민들을 도와주지 못해 아쉽다"면서 "의원 임기를 마치면 남은 의정비와 사재를 털어 복지재단을 만들어 어려운 주민들을 돕는 데 앞장서겠다"고 말했다.

인터뷰를 마치며 '월급(의정비)을 안 가져가시면 사모님이 정말 싫어하시지 않냐'고 속물적인 질문을 던지자 그는 "의원이 되면서 부인이 싫어했던 것은 누군가를 직접 도울 수 있었던 것에서 법 때문에 몇몇 군데를 통해야 하는 것으로 바뀐 것"이라며 4선 지방의회 의원과 나눔리더로 꼽히게 된 공을 부인에게로 다시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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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니투데이 배성민기자 bae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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