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에 뿌린 물만 수천병.."고통 이겨내고 자신감 얻었다"
[한겨레] 경보 간판 김현섭, 값진 6위
"달리기로는 안 된다. 경보로 바꿀래, 아니면 운동을 그만둘래." 강원도 속초 설악중학교 3년 때 체육선생님으로부터 '협박성' 선택을 강요받았다. 운동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기에, "그럼 경보를 하겠습니다"라고 대답한 것이 경보 외길을 파게 된 계기가 됐다. 육상이 마냥 뛰어노는 것인 줄 알고 덤볐건만 소질은 별로였다. "사실 중1부터 800m와 1500m 중거리 달리기로 시작했지요. 그런데 해도해도 안 되더라고요. 여자 선수들한테도 질 정도였으니까요." 그 여자 선수 중 한명이었던 동갑내기 신소현(26)씨는 이제 아내가 됐다. 척박한 육상에서도 더 비인기였던 경보선수로 뛰던 2004년 10월, 전국체육대회에 출전한 그의 인생은 또다른 전기를 맞는다. 당시 경보 입문 4년의 고3 선수는 20㎞에서 3위에 입상한 뒤 재능을 인정받아 삼성전자 육상단에 입단한다. "대학에 진학할 기회가 생겼지만 제대로 훈련을 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었는데 삼성전자 입단의 길이 열린 셈이지요."
삼성전자 육상단에서 이민호 코치(현 경보 대표팀 코치)와 폴란드 출신의 보흐단 부와코프스키 코치를 만난 김현섭은 체계적이고 집중적인 훈련을 받으면서 한국의 간판선수로 거듭났다. 그러나 시련은 훈련 파트너처럼 따라다녔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 23위, 2009년 베를린세계선수권 34위의 저조한 성적은 자신감마저 잃게 했다. 체력도 약한데다 큰 대회만 나가면 심리적으로 위축되기 일쑤였다.
"전엔 한 번도 배가 아팠던 적이 없었고 올해 들어 살짝살짝 고통이 왔다가 나아서 그냥 지나갔어요. 그런데 2주일 전 강원도 고성에서 훈련할 땐 새벽에 몇 시간이나 고통스러운 위경련에 시달렸습니다. 대회 이틀 전에도 너무 아파 선수촌 응급실 도움을 받아야 했지요."
위경련을 일으킬 정도로 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렸던 김현섭은 이번 대구세계선수권 경보레이스가 가장 힘들었던 대회 중 하나였다고 했다. "레이스 중반부터 날씨가 더워지면서 힘들었고, 9㎞ 이후부터 우승을 한 보르친(러시아)이 페이스를 올리면서 본격적인 경쟁이 시작된 뒤 피말리는 접전이 계속됐지요." 더위와 속도, 두 가지를 이겨내려 애쓰는 사이 온몸은 땀으로 뒤범벅이 됐고, 결승선을 밟고는 이내 쓰러지고 말았다.
경보선수들은 2㎞마다 한번은 이온음료, 다른 한번은 500㎖짜리 물을 마셔야 한다고 했다. 마시고 남는 물은 머리부터 몸에 끼얹어 체온을 식히기도 한다. 그렇게 마시고 몸에 뿌린 물이 수백병, 아니 수천병에 이른다. 이번 대회를 위해 고성에서 보낸 50일간의 마무리 훈련에서만 800여㎞를 걷고 또 걸었다. "주말에 35㎞, 월요일에 28㎞ 지속주 실전 레이스를 했구요. 중간에 강도(속도)를 올렸다가 내렸다가 하는 인터벌 훈련도 해서, 1주일에 최소한 100㎞ 이상 훈련량을 소화했습니다." 처절한 훈련과 정신적 스트레스의 고통을 딛고 한국 선수로는 가장 좋은 6위를 거두고는 위통도 없어졌다고 한다.
"내년 런던올림픽에 대한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이젠 세계 정상급 선수들과 함께 훈련하고 싶은 욕심이 듭니다. 내년 올림픽의 좋은 성적을 위해서 말이죠."
대구/권오상 기자 kos@hani.co.kr
■ 김현섭 프로필
*1985년 강원도 속초 출생
*강원도 속초 대포초-설악중-속초상고 졸업
*2004년 삼성전자 육상단 입단
*2004년 7월 세계주니어경보선수권(이탈리아 그로세토) 10000m 3위(40분59초24)
*2005년 4월 전국실업육상경기선수권 10000m 우승(첫 한국신기록 39분41초94)
*2005년 8월 여름유니버시아드(터키 이즈미르) 20㎞ 2위(1시간24분42초)
*2006년 8월 도하아시아경기대회 20㎞ 2위(1시간23분12초)
*20㎞ 4차례 한국신기록
-1시간20분54초(2007.5)
-1시간19분41초(2008.10)
-1시간19분36(2010.10)
-1시간19분31(2011.3)
*2008년 8월 베이징올림픽 20㎞ 23위(1시간22분57초)
*2009년 8월 베를린세계육상선수권 34위(1시간27분08초)
*2011년 8월 대구세계육상선수권 6위(1시간21분17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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