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에서 민중의 역사를 쓰다

2011. 7. 29. 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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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출판] 진솔한 문체로 자신의 치부 드러내며 파란만장한 삶 객관적으로 서술한 역사학자 이이화의 < 역사를 쓰다 >

그는 가난했다. 부모는 있었으나 가출해 전국의 고아원을 전전했다. 곡절 끝에 광주고등학교에 입학해 '여관뽀이'를 하며 어렵게 졸업을 했다. 서라벌예술대학에 입학했으나 1년을 채우지 못했다. 다시 거리로 돌아온 그는 밥을 벌기 위해 닥치는 대로 일했다. 가짜로 서울대 배지를 달고 한 문제집 장사부터 아이스케키, 빈대약, 가루치약 장사, 보험사 외무원, 심지어 매혈까지, 세상은 한 번도 쉽지 않았다. 그는 장삼이사였다. 그가 민초였고 민중이었다. 그를 키운 건 학교와 도서관이 아니라 거리였다. 그의 이름은 역사학자 이이화다.

한국사로 이끈 우연한 계기

우리 시대 가장 대중적인 역사학자로 손꼽히는 이이화 선생이 자서전 < 역사를 쓰다 > (한겨레출판 펴냄)를 묶어냈다. < 한겨레 > 에 연재했던 글들에 힘겨웠던 유년 시절과 청장년기의 고민을 더했다. 역사가의 자서전이라는 의미에서 이이화 선생의 삶은, 지난해에 먼저 자서전 < 역사가의 시간 > 을 펴낸 강만길 선생의 삶과 비교된다. 모두 진보사학계의 석학이지만, 강만길 선생이 기성학계의 기반 위에서 분단사학을 주장한 반면, 이이화 선생은 정규 코스를 밟지 않은 학계의 아웃사이더로 고군분투했다. 한 번도 삶의 곤궁함에 처해보지 않은 사람들이 대부분인 학계에서 이이화 선생의 존재는 더욱 유별하다.

강단의 학자들이 도외시한 대중적 역사학을 이뤄낸 그가, 역사학자의 길을 걷게 된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33살 때인 1968년 동아일보사의 연감 편집 임시직으로 일하게 된 그는, 그곳에서 한국사 관련 책들을 읽고 평생 역사학자의 길을 걷겠다고 다짐한다. 이윽고 그는 1973년 < 창작과 비평 > 에 '허균과 개혁사상'이라는 글을 실으며 전업 역사저술가의 길에 들어섰다. 이이화 역사학의 시작이었다. 부친이 가르쳐준 한문 실력과 문학청년으로서의 필력, 여기에 본인의 '민중적 체험'이라는 밑천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 자신이 아웃사이더이기 때문이었을까. 그가 조명하는 인물들은 줄곧 주류가 아닌 비주류, 지배계급이 아닌 저항하는 기층민중이었다. 그는 폭군이라 불린 광해군, 역적이라고 알려진 정여립·강홍립·정인홍 등을 재평가하고, 전봉준·이필제 등의 동학 지도자를 새롭게 발굴해 < 뿌리 깊은 나무 > 를 비롯한 여러 매체에 기고했다. 독자의 눈높에 맞춘 그의 글은 적잖은 반향을 낳았다. 척사위정파와 북벌론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담은 논문은 학계에서도 그를 소장 역사학자로 인정하게 했다. 이미 알려진 사건이나 인물을 새롭게 조명하는 식의 연구가 1990년대 이후에 유행한 것을 볼 때, 그의 연구는 선구적이라 할 만했다.

자신의 과오와 치부마저 드러내

대중과 함께 호흡하고자 역사 기행과 역사 강좌를 열어 전국을 돌아다니던 그는 1986년 삶의 중요한 전환을 맞는다. 임헌영, 서중석, 박원순 등과 함께 역사문제연구소(역문연)를 만든 것이다. '한국 근현대의 여러 문제를 공동작업을 통해 연구하고, 이를 일반 대중에게 널리 알리는 역사 대중화'의 산실은 그렇게 탄생했다. 역문연은 이듬해 역사·시사 계간지 < 역사비평 > 을 창간하며 대중과 접점을 넓혔다. < 역사비평 > 은 이후 착실하고 견결하게 한국 역사학의 수준 향상에 기여했다. 역문연에 참여했던 소장학자들은 오늘날 한국 학계의 주류가 되었고, < 역사비평 > 이 표방한 학제 간 연구와 현실에 발 디딘 역사학은 이제 학계의 상식이 되었다.

한편, 학술운동의 일환으로 여러 연구단체를 망라해 발족한 학술단체협의회에 상임공동대표로 참여하기도 했던 그는 1994년 본격적으로 동학농민전쟁 연구에 뛰어들어 새로운 연구성과들을 제출한다. 한 예로 그가 동학의 인간존중 사상과 봉기 과정에서 나타난 조직 동원 등의 사실을 들어 만든 '동학농민전쟁'이라는 명칭은 '갑오농민전쟁'이라는 개념 정립 이후 가장 적확한 용어로 평가받고 있다.

한반도 빙하기부터 1945년 해방까지의 한국통사를 22권의 책으로 집필한 < 한국사 이야기 > 는 그의 연구성과를 집대성한 역작이었다. 왕조사·정치사·사건사 위주의 역사 서술이 아닌, 백성·노비·백정·여성 등 민중의 삶과 생활사를 역사의 중심에 올려놓은 '새로운 한국사'였다.

'모든 자서전은 소설'이라는 말은 자신을 미화하기 쉬운 자서전의 한계를 고스란히 드러내주는 말이지만, 이이화 선생의 자서전은 그 한계를 가볍게 뛰어넘는다. 자서전 곳곳에서 선생은 자신의 과오와 치부마저도 스스럼없이 드러낸다. 스스로 거짓말을 잘했다고 말할 때, 민주화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못하고 소심히 방관했다고 고백할 때, 술 먹고 자신이 한 실수들을 적나라하게 나열할 때, 마치 그는 역사학자의 염결성으로 자신마저 객관화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 시대 유일한 민중사학자

그의 역사학이 연구실만이 아닌 광주항쟁과 6월항쟁 등 저항의 현장에서 비롯된다는 점에서, 이이화는 진정 길 위의 역사가였다. 그람시를 이론과 실천의 통일을 고집한 유일한 서구 마르크스주의자라고 말할 때, 이는 그람시 이론의 탁월함에 대한 오마주이기도 하지만 그람시가 유달리 어려운 환경 속에서 직업적 혁명가로 성장했다는 점도 작용했을 터다. 이런 의미에서 이이화를 우리 시대 유일한 민중사학자로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오승훈 기자 vin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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