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화마에 폭염까지'..포이동 판자촌의 힘겨운 여름나기

박성환 2011. 7. 24. 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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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박성환 기자 = "희망도 불타버렸는데 폭염까지 겹치니 도저히 살 수가 없어요."

기나긴 장마가 끝나고 찜통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는 가운데 최고기온이 31도까지 올라간 지난 21일 오후. 서울 강남구 포이동(현 개포4동) 판자촌 '재건마을'. 주민들은 변변한 냉방시설조차 없이 무더위와 힘겨운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지난달 12일 발생한 화재로 인해 재건마을은 순식간에 전쟁터로 돌변했다.

판자촌 안쪽으로 들어서자 화마가 할퀴고 간 자리에는 주민들이 목숨만큼 소중히 여긴다는 집들도 한줌의 재로 남아 산처럼 쌓여있었다. 아직도 매캐한 냄새가 코를 찌르고 새까맣게 그을리고 뒤틀린 냉장고가 그날의 상흔을 증명이라도 하듯 나뒹굴고 있었다.

재건마을 맞은편 4층짜리 고급빌라 외벽에 설치된 에어컨 실외기 10여대가 주민들을 향해 쉴 새 없이 뜨거운 열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재건마을을 향한 뜨거운 열기는 그날의 비극의 깊이를 한층 더해주는 것 같았다.

10년 넘게 이곳에 살았다는 김모(67)씨는 "기억하기도 싫은 화재 때문에 고통 속에서 하루 하루를 보내고 있다"며 "날씨가 너무 더워 호흡하기 힘들고 정말 죽고 싶은데…"라며 고개를 떨군 채 말을 잊지 못했다.

얼기설기 나무와 천으로 엮어 만든 간이 천막과 녹슨 콘테이너가 이들의 '아슬아슬한 거처'였다.

50~60대 여성들과 아이들만 있는 이곳의 문을 열고 들어서자 바깥과 별다를 바 없이 뜨거운 열기가 올라와 숨이 턱턱 막힐 정도였다. 찜통더위를 피하기 위해 검은색 차양막까지 설치했지만 연일 계속되는 폭염에는 무용지물이나 다름없었다.

천장에 매달아 놓은 선풍기 2대는 뜨거운 바람을 뿜어낼 뿐 더위를 피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얼음 생수병이 순식간에 녹아 축축하게 물방울이 맺히고, 가만히 있어도 땀이 줄줄 흐를 정도로 그야말로 '찜통'이었다.

졸지에 보금자리를 잃어버리고 함께 생활한지 어느덧 한 달 남 짓. 주민들은 하나같이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김모(54·여)씨는 "잠을 잘 때 더워서 문을 열고 놓아 모기가 많이 들어와 잠을 제대로 잘 수 없다"며 "날씨도 덥고 한정된 공간에서 많은 사람들이 생활하다 보니 하루 하루가 지옥같다"고 말했다.

송모(57·여)씨는 "사는 것 자체가 힘들었는데 집까지 잃고 나니 더 살기 힘들다"며 "더위까지 겹쳐서 잠도 못자고 환장할 노릇이다"라고 말했다.

공동생활을 하다보니 한밤중에도 30도를 넘기 일쑤여서 주민들 대부분 수면장애, 어지러움과 두통 등 건강이상증세를 호소했다.

권모(81) 할아버지는 "함께 잠을 자다보니 몸에서 뿜어내는 열기 때문에 더워서 잠을 못자고 뒤척이는 경우가 많다"며 "잠을 제대로 못자서 다음날 하루 종일 두통에 시달려 약을 자주 먹게 된다"고 말했다.

박모(56·여)씨는 "여럿이 함께 있을 때는 밝게 웃고 떠들지만 혼자 있을 때는 우울한 생각이 든다"며 "편히 쉬지도 씻지도 못하다 보니 멀쩡한 사람도 아프게 된다"고 토로했다.

재건마을 주민들은 자신들의 향한 감시의 눈초리 때문에 좌불안석이다.

주민들은 잿더미 위에 임시거처라도 짓고 싶지만 강남구청에서 고용한 용역업체 직원들이 마을 주변에 상주해 주민들이 집을 새로 짓지 못하도록 감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민들은 용역업체 직원들과 날마다 치열한 눈치작전을 벌인다. 한순간에 저들에 의해 자신들의 마지막 거처마저 철거돼 쫓겨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에 하루 하루를 긴장감 속에서 보내고 있다.

대책위 조철순(53·여) 위원장은 "구청에서 사람들을 보내 염탐을 해 출입문도 잠가놓고 입구에 자체 보초 인력도 늘렸다"며 "허가받은 사람들 외에는 이곳에 출입할 수 없도록 했다"고 말했다.

이어 "이 무더위에 강제철거를 하겠다고 나서는 강남구청은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지 의문이 든다"며 "구민이 고통 받고 있을 때 도움을 주는 것이 나라고 공무원들의 역할이다"고 덧붙였다.

1980년대 넝마주이를 하던 이들이 정부의 종용으로 합판과 비닐로 집을 지어 살면서 형성된 재건마을. 당시 빈민들이 '도시미관'을 해친다고 판단한 정부는 거처를 제공해주고 일자리 알선 등을 통해 자활을 주선했다. 그래서 빈민들에게 붙여진 이름이 '자활근로대'였다. 이같은 연유로 포이동 판자촌의 현재 공식명칭은 '재건마을'이다.

형편이 어려운 일용직 노동자들과 실직자들이 들어서면서 40여년동안 서울의 대표적인 판자촌인 재건마을. 이곳을 떠날 수 없는 주민들은 오늘도 뜨겁게 달궈진 콘테이너 안에서 무더위와 사투를 벌이며 언제 쫓겨날지 모르는 불안감속에 힘겨운 하루를 보내고 있다.

sky0322@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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