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진의 차맥]〈16〉 한국차의 신화학 다시쓰기 ④ 매월당 초암차 남인 사림으로 이어져

2011. 7. 11. 2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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④ 매월당 초암차 남인 사림으로 이어져

[세계일보]

매월당의 초암차 정신이 한국 차사(茶史)에서 중요하게 떠오르는 이유는 계유정난(癸酉靖難)과 단종 복위운동 등으로 피비린내나는 정치권력에 회의를 느낀 그가 전국을 주유천하하면서 운명적으로 차를 가까이하게 됨으로써 고려 차의 전통을 조선에 잇게 하고, 다시 남인(南人) 사림들에게 계승되도록 가교 역할을 한 때문이다. 그는 한국 차사의 긴 공백을 메워주는 차성(茶聖)이다.

화랑 충담사가 차를 바쳤다고 짐작되는 남산 삼화령(三花嶺)의 미륵불연화대좌. 차인들은 남산에 들르면 이곳에서 헌다행사를 갖는다. 사진은 경남문화연구원 회원들.

특히 그의 차풍(茶風)이 초야에 묻힌 남인들에게는 매우 호소력 있게 전해지고, 그로부터 직접 차를 배운 준장로 이외에도 일본과 비교적 교섭이 많았던 영남 남인들의 차풍도 일본에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짐작된다. 조선조 후기의 차 중흥조로 불리는 다산·초의·추사의 차풍도 실은 폭넓게는 남인 차 전통의 계승이라고 볼 수 있다. 다산은 호남의 대표적인 남인 가문인 해남윤씨(윤선도)가 외가였고, 강진에 유배 당시 외가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말하자면 매월당 없는 3인의 중흥조는 힘을 잃고 만다.

앞으로 숨은 자료의 발굴과 연구에 따라서는 매월당은 불가(佛家)로는 중국 사천지방에 정중종(淨衆宗)을 세운 무상선사(無相禪師·684∼762)의 선차지법(禪茶之法)과도 연결될 가능성마저 있는 셈이다.

그는 선가(仙家)를 중심으로 하면서도 불교에 심취하여 출가까지 함으로써 사찰에 은밀히 전해진 차의 전통을 몸소 체험하고, 그것을 나름대로 개량하여 선비차로 환골탈태시킨 것으로 판단된다. 고려의 말차에서 조선의 잎차로 넘어오는 여말선초의 과도기에 한국 차의 전통은 크게 재정립될 것을 요구받게 되는데 이에 가장 성공적으로 적응한 인물로 매월당만 한 인물이 없다.

원로 차연구가 김명배 선생은 '매월당 김시습의 다도연구'라는 논문을 일찍이 썼다. 이 논문에서 김 선생은 "매월당은 중국의 다성인 육우처럼 다도 수련의 9단계에 이른 인물'이라고 조명했다. 그는 매월당 차시를 조목조목 분석하면서 매월당이 실천한 차생활을 12가지로 정리했다.

차 심기, 차 기르기, 차 따기, 차 만들기, 포장, 가루내기, 찻물, 차도구, 마신 차의 종류, 차 달이기, 차 마시기, 찻자리 꽃 등이다. 그가 전인적(全人的) 차인임을 누구나 알 수 있다.

일본의 아사카와 교수는 이미 1930년대에 '부산요와 대주요'라는 책에서 '초암차의 원형은 당에게 가르침을 받은 것'이라고 주장해 양국 차인들을 놀라게 하는 한편, 한·일 양국의 차교류사 연구에 획기적인 족적을 남겼다. 일본의 차 연구가 가네코(金子重量)도 "조선시대 초정(草亭)이 일본의 초암(草庵)이 되었다"고 주장하였다.

16세기 후반 무로마치(室町)시대 일본의 와비차가 전성기를 구가할 때 시중에 들어선 차실은 '시중은(市中隱)' '시중(市中)의 산거(山居)'로 불렸는데 이는 초암의 도시적 변용이다.

강원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당시 소장 김지견 박사)는 1988년에 '매월당 국제학술회의'를 열고, 그 성과를 묶은 '매월당 학술논총'을 냈다. 이 밖에도 김미숙(원광대 동양학대학원, 석사)의 '매월당 김시습의 다도관 연구', 이주연(성균관대 생활과학대학원, 석사)의 '매월당 김시습의 다도연구' 등 후학들이 속속 연구논문을 내고 있다.

매월당은 조선 단학(丹學)사에서도 중요한 인물 중의 한 사람이다. 최치원 이후 최고로 유불선 삼교에 능했던 그는 외단(外丹)에서 내단(內丹)으로 중심 이동하는 과정에 일찍 독자적인 내단학에 이르렀다. 그는 위백양을 숭상했다. 내단은 중국 후한 시대 '위백양(魏伯陽)의 참동계(參同契)'에 의해 비롯되는데 이후 금대(金代)의 전진교(全眞敎) 교조 왕중양(王重陽)에 의해 체계화되고, 북송(北宋) 중엽 장자양(張紫陽)을 중심한 전진교, 남종(南宗)의 금단도(金丹道)에서 본격화된다.

매월당이 경주 시가지를 내려다보았을 남산의 절벽 매월대(梅月臺). 사진='차의 세계' 제공

매월당에 이르러 최치원의 삼묘지교(三妙之敎), 풍류도가 다시 부활한 셈이다. 일찍이 유학을 섭렵한 그는 선도(仙道)에 뜻을 두어 내단과 차를 겸비하였으니, 그는 산천을 주유하면서 살기에 적합한 도구를 다 가진 셈이었다. 한때 불가에 귀의하여 설잠(雪岑)이라 불리기도 한 그는 47세에 환속하였다.

본래 차는 불교나 유교에서 시작한 것이 아니고 도교에서 시작하였다. 도교에서 양생의 수단으로 차를 이용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도가(道家)는 대승적이기보다는 소승적이다. 그러한 점에서 도가의 특징은 철저히 이기적이면서도 과학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도가가 흔히 이상세계, 선신의 세계를 추구하는 것 같지만 실은 현실의 양생에 관심이 우선이다. 현실에 이룩한 것이 다른 세계로 연장되는 것이다. 도가나 선가(仙家)의 우화등선이라는 것은 사후에 천당이나 극락에 간다는 것과는 다르다.

불교나 유교의 원시경전에는 차라는 말이 나오지 않는다. 아마도 당시에는 차가 일반 공용의 음료가 아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불교나 유교의 경전에도 후기경전이나 후대의 각주에 차라는 말이 나오지만 초기 경전의 본문에는 없다. 우리가 불교의 '깨달음의 과정'을 표현하는 대표적인 상징 아이콘으로 인식하는 '심우도'(尋牛圖)도 실은 선(禪)의 수행방법이 중국에 전파되는 과정에서 도교(혹은 선교)의 마음수행 방법을 받아들여 굴절변형한 것이다.

선승들의 차 마시기 방법도 실은 도교의 도사(道士)들의 그것을 차용하여 발전시킨 것이다. 인도 불교가 중국에 들어와서 대승불교가 되고, 대승불교 가운데서 달마를 초조로 하는 선불교가 등장하고부터 불교에 본격적으로 차가 도입된다. 중국 사천성 도교의 중심지로 알려진 청성산(靑城山)은 그래서 차의 발원지 가운데 하나이다.

유불선에 관통했던 매월당이 새로운 차법을 마련하기에는 유리한 바탕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차는 그 자체가 이미 유불선 회통의 영물이다. 매월당의 차시를 보면 그는 항상 다신(茶神)과 접신할 자세가 되어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다신과 접신하는 차법, 그것이 바로 초암차이다. 초암차는 그러한 점에서 차례이면서 '차레'(채우고 비움의 뜻)의 전통을 잇는 차법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다례'가 되든, '차레'가 되든, '풍류차'가 되든 한국의 다법은 일본의 다도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정신이 있다. 일본 미의 특징이 '인위' '인공미' '폐쇄적 미학'인 점을 감안하면 초암차의 정신은 매우 이질적이다. 초암차는 한국의 차법이다. 초암차의 정신은 실은 한국인의 생활과 미의식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에 불과하다. 한국인은 세계의 어떤 나라보다 자연친화적인 것을 좋아하고, 자연을 자연스럽게 문화 속으로 연결시키는 '열린 미학'을 갖고 있다. 초암차의 정신은 바로 그것이다. 우리가 일본다도를 벗어나는 길은 바로 초암차가 우리의 전통 다법이고, 차 정신이라는 것을 밝혀내는 것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문화에는 주인이 없고, 쓰는 자가 주인이다. 바로 지구촌, 지구인이 된 사실 때문에 새로운 강자로 등장한 것이 바로 '브랜드'(brand)라는 것이다. 과거에 인류문화의 논쟁은 '오리지널'(original)에 머물렀다. "누가 기원이고, 누가 원조이고, 누가 창조했느냐" 하는 것이 관심이었다. 오리지널은 실은 정확하게 알 수 없다. 신화만이 그것을 합리화할 뿐이다.

오리지널은 중요하지 않다. 한 문화요소가 누구의 '씨'냐고 하는 것은 구태의연한 질문이다. 이제 "누가 그것을 새롭게 만들어 '등록'했느냐"의 문제로 돌변하였다. 문화는 기술과 상품과 상표처럼 특허등록의 방식을 동원하지 않더라도 은연중에 국가이미지로, 기업이미지로, 문화브랜드로 변형되면서 '어느 나라' '어느 기업' '누구의 것'이라는 공감대를 형성한다.

그러한 점에서 매월당의 초암차가 본래 우리 것이라고 해도 우리가 많이 쓰고, 선전하고, 연구하고, 우리 것으로 만들 때 우리 것이 되는 것이고, 우리의 정체성으로 부활할 날이 올 것이다.

불교의 윤회론을 빌리면 신라의 최치원이 조선의 매월당이 되고, 매월당이 율곡이 된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매월당은 최치원을 유달리 좋아했고, 율곡은 자신이 매월당의 후신이라는 것을 피력한 적도 있다.

매월당의 시 가운데 우리가 접할 수 있는 60여편의 차시(茶詩)만 보아도 읽으면 읽을수록 그의 또 다른 호인 청한자(淸寒子)를 느낄 수 있다. 맑은 청(淸)이 차요, 찰 한(寒)이 또한 차를 상징한다.

매월당은 초가를 봉호(蓬戶·쑥대로 엮은 집)라고 표현하고 있다. 매월당은 차시(茶詩)에서 음다 공간을 표현할 때 대체로 '내 오두막'(吾廬) '작은 오두막'(小廬) '내 제실' '나의 집, 한 칸 방' '내 맑은 재실'이란 표현을 쓰고 있다. 매월당은 수락산에 기거할 때 '부서진 집' '궁한 집'이라는 표현도 쓰고 있다. 이것이 바로 '초암'(草庵)의 특성이다.

차 연구가 최정간씨에 따르면 경주 함월산 기림사(祗林寺)는 우리나라의 최고의 차유적지이다. 이 절은 창건전설부터가 차와 관련이 있고, 사적기에는 오종수(五種水)를 비롯하여 차 유적들이 곳곳에 보인다. 매월당은 경주에 있을 때에 자주 머무르던 곳이다. 지금도 매월당의 영정과 영정 채봉문, 현판 등이 보존되어 있다.

기림사의 주변에서 샘솟는 물은 다섯 종류인데 찻물로는 최고이다. 첫 번째 물은 북암의 감로수로 유천(乳泉)처럼 흰빛이 도는 음수이다. 두 번째 물인 경내에 있는 화정수(和靜水), 세 번째 물이 오백나한전 앞 삼층석탑 밑의 장군수, 네 번째는 입구 담벼락에 있는 안명수(眼明水)이다. 다섯 번째가 지금은 없어진 동암(東菴)의 오탁수(烏啄水)이다.

물이 좋은 이곳에서 차를 즐겼을 매월당을 생각하면 차사의 단절을 하루빨리 메우고, 한중일 삼국에서 독자적인 차학과 차례의 정립의 필요성이 절실하게 다가온다.

문화평론가

pjjdisc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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