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령 500호 특집 2 | 세계 최고봉, 나도 오를 수 있다] 등반 추세

2011. 7. 1. 1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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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대이고 흰 머리가 난 당신? 그래도 문제없다!,고산등반의 대중화로 너도나도 에베레스트 등반 붐.. 셰르파에 의존하는 노멀루트 등반 위주..한 해 수백 명 등정

↑ [월간산]2005년 5월 30일 오전 9시30분경 에베레스트 정상. 1988년 이후 '한 루트 한 팀 등반' 규정이 바뀌고, 1990년대 이후 상업등반대가 많아지면서 에베레스트 등정자 기록이 해마다 갱신되고 있다.

세계 산악인들의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8,848m·네팔 명 사가르마타·티베트 명 초모랑마) 등정 붐이 일고 있다.

남극과 북극에 이어 제3의 극지로 일컬어지는 에베레스트는 인류가 첫 도전을 시도한 이후 초등이 이루어지기까지 오랜 세월이 걸렸다. 1921년 영국 원정대의 첫 도전 이후 1949년에 이르기까지 두 차례의 불법등반을 포함해 총 9차례에 걸쳐 티베트 쪽으로 세계 최고봉 정상을 노렸으나, 그 사이 등정은 이루어지지 않고 대원 4명과 셰르파 10명의 희생만 있었다.

'슈퍼알피니스트의 전유물'에서 등산인들의 도전 대상

1950년 중국 정부가 티베트를 강제 점령한 이후 티베트 쪽 등반을 금지시킨 반면 네팔 왕국이 외국인들에게 문호를 개방하자 산악인들의 도전은 자연스레 남쪽으로 옮겨졌다. 그 해 미국 팀의 웨스턴쿰 정찰등반이 이루어지고, 이듬해 1951년 영국팀은 에베레스트와 로체, 눕체로 둘러싸인 쿰부빙하 하단의 아이스폴 위에 올라서면서 눈에 들어온 로체 서벽을 통한 등정 가능성을 발견한다. 그러나 이듬해 봄과 가을 시즌 등반을 스위스 팀이 먼저 신청해 놓음에 따라 영국 대는 스위스 팀의 등반을 지켜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1952년 봄 스위스 팀은 텐징 노르게이 셰르파와 함께 남동릉 첫 도전에 나서 해발 8,572m 지점까지 올라 최초의 등정이 이루어지는가 싶었으나 대원들의 체력 한계로 돌아서야 했다. 그 해 가을 재도전은 루트 변경에 따른 시간 지체로 강풍과 강추위가 몰아치는 겨울철이 임박해 옴에 따라 남동릉에서 등반을 접어야 했다.

이렇게 우여곡절을 겪은 인류 최초의 세계 최고봉 등정의 영예는 남극과 북극 탐험 실패로 인해 상한 자존심을 살리기 위해 1921년부터 세계 최고봉 정상에 도전해 온 영국 원정대에게 돌아갔다. 1953년 봄 등반에 나선 영국 팀의 제2차 공격조인 에드먼드 힐러리 경과 텐징 노르게이 셰르파가 5월 29일 제9캠프(8,350m) 출발 5시간 만인 오전 11시30분 드디어 지구의 용마루 에베레스트 정상에 선 것이다.

에베레스트 정상을 처음 밟기까지 이렇듯 오랜 세월과 희생이 따랐지만 초등 이후 등정자 수는 해를 거듭할수록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1950년대 6명에 불과하던 등정자는 1960년대 18명, 1970년대 80명, 1980년대 180명, 서서히 늘어나다가 1990년대에는 330개팀(대원 2,972명, 고용인 1,811명)에서 359명(대원 316명, 셰르파 43명)의 등정자가 배출된다.

21세기 들어서면서 남쪽(네팔)과 북쪽(티베트)의 베이스캠프는 하나의 도시를 연상케 할 만큼 많은 등반대가 몰려들고, 등정자는 하루에 300명에 육박할 정도로 늘어난다. 급기야 2007년에는 한국팀 6개팀을 포함해 96개팀이 등반해 636명(대원 315명, 셰르파 321명)이라는, 불과 10년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많은 등산인들이 세계 최고봉 정상에 올라섰다.

이렇게 21세기 들어 매년 수백 명의 등정자가 나와 2010년까지 5,000명(엘리자베스 홀리의 데이터베이스 통계)에 이르는 에베레스트 등정자가 나올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고산등반의 대중화가 가장 큰 역할을 했다는 게 고산등반가들의 시각이다. 슈퍼알피니스트들이 '목숨을 건 도전 대상'으로 삼던 세계 최고봉이 보통 사람들의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는 차원의 도전 대상'으로 변해 간 것이다.

이러한 흐름은 우리나라 클라이밍의 변화에서도 엿볼 수 있다. 전문 산악인들에게 등반 메카로 인식되어온 북한산 인수봉도 한갓진 시절이 있었다. 한국 최초의 에베레스트 등정이 이루어지던 1977년까지만 해도 그랬다. 당시 인수봉을 오르는 소위 전문 클라이머들은 서로 호형호제하며 지낼 만큼 소수였고, 인수봉은 자신들만의 놀이터인 양 배타적이었다.

↑ [월간산]에베레스트 아이스폴 지대. 크레바스와 빙탑 연속 붕괴 위험이 높은 구간이지만 신비스럽다 할 만큼 아름다운 곳이기도 하다.

1988년 대한산악연맹 에베레스트-로체 원정대가 에베레스트 등정에 성공해 대원 6명이 오를 때에는 상황이 달라졌다. 스포츠클라이머들도 자연암벽으로 몰려들면서 인수봉 역시 등반객이 많아졌다. 1990년대 중반 IMF 외환위기로 실직한 중년층의 가세로 클라이머들은 대폭 늘어났고, 2000년대 들어 한 달에 한 번 이상 산을 찾는 사람이 1,500만 명에 육박하고 그중 암릉파를 비롯한 아마추어 산악인들이 수십만 명으로 늘어나면서 이제 전문산악인과 일반등산인들 간의 경계가 애매해진 것이다.

한때 슈퍼알피니스트들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세계 최고봉은 이제 보통 사람도 오를 수 있다는 사실이 아마추어급 등산인들의 등정으로 입증되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1985년 에베레스트 등정에 성공한 미국의 사업가 딕 배스다.

유전 개발회사와 스키리조트를 운영하느라 등산에 대해 큰 관심 없이 살아온 딕 배스는 우연한 기회에 세계 7대륙 최고봉 등정을 목표로 삼고 1983년 한 해 동안 6개 대륙 고봉을 오른 다음 1985년 당시 55세의 나이에 에베레스트마저 등정함으로써 아마추어도 세계 최고봉을 오를 수 있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그가 펴낸 7대륙 최고봉 등정기인 < 불가능한 꿈은 없다(원제 : 세븐 서미트) > 는 미국뿐 아니라 여러 나라 등산인들에게 고산등반에 대한 꿈을 심어주기도 했다. 일본 산악인 중에서는 75세 고령의 등정자가 배출되기도 했고, 50~60대 일본 산악인들로 구성된 실버터틀(Silver Turtle) 원정대는 가셔브룸2봉(8,035m), 초오유(8,201m) 등 8,000m급 고봉을 등반하다가 세계 최고봉에도 도전하곤 한다. 이들은 젊은 대원들이나 현지 고용인들의 도움을 받으며 고봉 등정에 성공해 왔다.

한국인 가운데서도 재미교포 몇 명이 상업등반대를 이용해 등반에 성공한 바 있다. 2006년 5월 19일 김명준(68)씨가 당시 한국 최고령인 63세 나이로 에베레스트(8,848m) 등정에 성공, 재미교포로서 최초로 7대륙 최고봉 레이스의 종지부를 찍었다. 이어 이성인(63·중동고 OB)씨가 2007년 5월 17일 김해 플라잉점프 팀 대원으로 에베레스트 등정에 성공하고, 9월 24일 오세아니아 최고봉인 칼스텐츠(4,884m) 정상에 올라섬으로써 재미교포로서 두 번째 완등에 성공했다.

이성인씨 역시 7대륙 최고봉 등정에 성공하기는 했지만 전문 산악인이라 말하기는 어렵다. 중동고 시절 1년간 산악부 생활을 하기는 했지만 이후 사회생활과 이민생활에 쫓기느라 산에 대한 생각을 가질 여유는 없었다. 머릿속에 산이 다시 떠오른 것은 51세 때 자신의 사업장에서 골반이 부서지는 추락사고를 당한 직후 건강을 생각하면서부터였다.

2007년 봄에는 김해 플라잉점프 팀에 개인경비를 내고 참가한 송귀화씨가 당시 59세의 나이로 세계 최고봉 정상에 서는가 하면, 60대 노익장들 8명으로 구성된 실버원정대의 김성봉 대장이 5월 18일 당시 66세로 등정에 성공해 남녀 최고령 등정을 기록하기도 했다.

이렇게 평범한 비즈니스맨이나 장년층과 노년층 등산인들까지도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 등정의 꿈을 이룰 수 있는 것은 등반대가 많아지면서 노멀루트에 대한 불확실성이 많이 감소됐다는 점을 가장 큰 요인으로 들 수 있다. 1980년대 말까지 '한 시즌 한 팀 한 루트'에 한해 등반이 허용되던 네팔 쪽 남동릉 노멀루트에 대한 팀 제한 제도가 흐지부지 사라짐으로써 많은 팀이 같은 시즌에 몰려 자연스레 같은 루트로 등반하게 되고, 그에 따라 등반이 수월해진 것이다.

전 구간 로프 설치로 안정성과 등정률 높아져

여기에 1970~1980년대까지만 해도 캠프에 짐을 옮겨주고 간단한 일을 도와주는 정도의 역할을 하던 셰르파가 루트 개척뿐 아니라 캠프 구축과 짐 수송에 이어 정상까지 안내해 주는 등, 모든 일을 해결해 줌에 따라 대원들은 고소적응 등 자신의 몸만 잘 컨트롤하면서 캠프를 하나씩 올리다보면 등정의 기쁨을 누릴 수 있게 된 것이다.

↑ [월간산]2007년 5월 남동릉 캠프에 올라선 한국 실버원정대원들. 60대 노익장의 투혼으로 대원 한 명이 등정에 성공했다.

특히 상업등반대가 가세하면서 대다수 상업등반대가 등로로 삼는 노멀루트의 등정률은 더욱 높아지고 있다. 네팔 쪽 남동릉 루트의 경우, SPCC(사가르마타 환경보호위원회)가 원정대에게 일정액을 받는 대신 등반이 가장 난해하고 위험한 아이스폴 구간(5400~6,100m)에 루트를 개척해 주고, 또한 아이스폴 지대 이후 정상에 이르기까지 상업등반대를 비롯한 많은 원정대에서 인원수에 따라 투여하는 셰르파와 제공하는 장비로 뚫어주기 때문에 등반자 자신이 길을 내느라 애를 먹는 일은 거의 없어진 게 현재 상황이다.

상업등반대의 경우 캠프를 이동할 때도 앞장서 러셀할 일도 거의 없고, 식량과 장비와 같은 무거운 짐을 질 이유도 없어졌다. 오로지 자신에게 필요한 보온의류와 개인적 촬영장비 정도만 메고 오르면 된다. 더욱이 개인 장비를 맡길 셰르파를 고용할 경우에는 빈 몸으로 다녀도 되는 게 요즘의 에베레스트 등반이다. 가장 감격적이기도 하지만 가장 위험한 등정길 역시 손님대원과 셰르파가 1대1로 움직이기 때문에 사고의 위험은 그만큼 줄어들었다.

2008년 이후 등반대 수가 급격히 감소하기는 했지만 티베트 쪽 북릉~북동릉 루트 등반 또한 붐을 조성하는 데 한 몫을 했다. 네팔 쪽 남동릉 루트에 비해 입산료가 저렴한 데다 티베트등산학교 강사와 학생들로 구성된 팀이 정상에 이르기까지 전 구간에 로프를 깔아 줌으로써 악천후와 같은 큰 이변이 없는 한 '준비된 등산인'이라면 등정이 가능해진 것이다.

장비의 발전도 큰 몫을 한다. 방수투습성 원단의 발전은 눈 같은 습기로 인해 고생할 상황을 막아주었고, 우모 제품의 발전은 영하 30도 밑으로 내려가는 강추위 속에서도 활동이 가능하게 해주었다. 여기에 피켈, 아이젠 같은 장비 또한 가벼우면서도 단단한 재질의 제품이 출시되었고, 무전기와 같은 통신기기 역시 30, 40년 전에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소형·경량화되었다.

체력을 회복하는 장소인 캠프의 환경도 좋아졌다. 베이스캠프나 전진캠프의 경우에는 대형 텐트에 가스히터를 틀어놓아 따뜻하고 쾌적한 공간에서 휴식을 취할 수 있다. 특히 베이스캠프의 경우 순간온수기를 통해 만들어낸 따뜻한 물로 샤워가 가능 하 베이커리와 카페에서 갓 구워낸 빵을 먹거나 따뜻한 차를 마실 수 있을 정도다.

여기에 베이스캠프에 각종 첨단 통신장비를 갖춰놓음으로써 이메일, 위성전화의 사용도 가능해졌다. 이루 인해 히말라야 오지에 고립돼 있다는 심리적인 어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으며 또한 일기예보 전문업체가 위성을 통해 확인한 일기예보를 인터넷을 통해 수시로 전해 줌으로써 정상공격에 적합한 날짜도 사전에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일기예보를 받아보지 않은 상태에서 오로지 '감'으로 날씨를 예측할 당시에 비해 등정 확률이 높아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꿈을 실현하는 주인공은 바로 당신

이제 과학문명의 혜택과 현지 정부의 정책 변화, 그리고 관광산업 분야의 확장으로 적절한 비용을 지불한다면 누구나 에베레스트 정상에 오를 기회가 주어지게 되었다. 1990년대부터 발빠른 서구에서는 등산 경험이 적은, 그러나 세계 최고봉을 오르려는 꿈을 가진 사람들을 '고객으로 모시고 등반'하는 '모집 원정대' 또는 '상업 원정대'가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1977년 한국의 고 고상돈 대원이 태극기를 들고 에베레스트 정상에 서기까지 1971년 네팔 정부에 입산신청을 하는 것부터 시작해 피나는 장기간의 훈련과 준비과정을 거친 반면, 약 6만 달러의 참가비만 내면 훈련은 물론 정상까지 안전하게 안내를 받으면서 세계 최고봉을 오를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러한 등반에 대해 한때 전문산악인들은 무모한 행위라 비난하기도 했지만 이제 이러한 상업 원정대는 밀레니엄에 들어서면서 에베레스트 전 등반대의 3분의 2 이상을 차지하는 통계치를 보이고 있다.

↑ [월간산]1. 2010년 봄 한국 최초로 부자 등정 기록을 세운 허영호씨와 허재석군(왼쪽). 2. 실버대원들이 캠프2에서 따뜻한 물로 피로를 달래고 있다.

이제 에베레스트뿐만 아니라 히말라야 고산등반이 전문산악인의 무대로서만이 아니라 모험심이 강한 모든 이들의 활동무대로서 공유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유럽알프스 등반역사에서 초등정의 시대 후 지금까지도 몽블랑을 비롯해 많은 봉우리들에서 가이드 등반이 성행하는 것과 같은 맥락으로 이해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등반은 행위자 자신이 모든 것을 책임져야 한다는 점은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았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더욱이 에베레스트 등정이 지나친 과시욕이나 명예욕에서 비롯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비록 고정로프가 전 구간에 깔리고 셰르파가 많은 도움을 준다고는 해도 '등반은 자연을 대상으로 하는 계산된 모험'이라는 등반의 순수성이 지켜질 때에 한해 그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1924년 6월 8일, 해발 7,900m 지점에서 구름 속으로 사라지기 직전 조지 말로리와 앤드류 어빈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목격한 노엘 오델(Noel E. Odell)이 "말로리와 어빈이 지금도 계속 걸어가고 있다. 정상에 이르기 위해 계속 걷고 있다"고 말한 것처럼 -많은 뜻이 담겨 있지만 표면상으로는- 누구나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 정상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걷고 있는 희망을 실현할 수 있게 되었으며, 그 주인공은 바로 당신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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