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값등록금 릴레이시위-43일]'반값..학부모모임' 최창우

2011. 6. 10. 2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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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값등록금을 위한 릴레이 1인 시위가 벌써 43일째에 접어들었다. 한 달 전만 해도 반값등록금을 요구하는 소리는 조잘조잘, 아무래도 저 높은 분들이 끼고 있을 헤드폰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는 쿵쾅쿵쾅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언제쯤이나 반값등록금이 실현되나 했다. 그런데 조잘거림의 힘을 얕보면 안 되었나보다. 조금씩 몸집을 불려 지금은 아우성이 되었으니 말이다. 정치권에서는 등록금 관련 정책이 하루가 멀게 쏟아져 나오고 있고 10일은 국민의 염원을 담아 6.10 대규모 대국민촛불집회가 열린다고 한다.

그래도 아직 넘어야 할 산이 많기에 걱정을 놓을 순 없다. 비가 왔다 개었다 하는 날씨처럼 언제 변할지 모르는 저 높은 분들의 말에 따라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갈 수도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지난 9일에는 경찰이 등록금 시위를 엄격하게 대응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런 식으로 아우성을 합죽이로 만들어버리려는 공권력을 보니 걱정은 오히려 더해진다.

43일째 시위자인 최창우 씨를 만난 곳은 여느 때와 다르게 이순신 동상 앞이 아니라 청계 광장이었다. 그곳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은 끝이 뾰족한 조형물이 떡 하니 서있다. 등록금이 오르는 모양새인 것 같기도, 우리네의 삶은 아는지 모르는지 자신이 옳다고 믿는 길로 올라가는 데만 급급한 누군가의 모습과 닮은 것 같기도 했다.

릴레이 1인 시위는 6.10 대국민촛불집회를 선포하고 공권력에 굴하지 않고 집회를 잘 치러내겠다는 의지를 전한 기자회견과 함께 진행되었다. 피켓을 든 최창우 씨는 기자회견을 위해 모인 인사들과 함께 취재진 앞에 자리했다. 기자회견이 끝나자마자 숨 돌릴 새 없이 그에게 인터뷰를 청했다.

최 씨는 세 아이의 아빠이자 반값등록금을 위한 학부모 모임의 회원이다. 이 모임에 참여하게 된 계기를 물었더니 그는 "저는 배움에 한이 맺힌 사람입니다. 자연히 등록금 문제에 오래전부터 관심을 가지고 있었어요. 음, 사실 저는 청학동 출신입니다."라고 운을 뗐다.

"어릴 땐 머리도 땋고, 훈장님에게 가르침도 받았어요. 그 시절 함께 배우던 제 또래들 중에는 지금 훈장 노릇을 하는 친구도 있어요. 아시다시피 청학동은 지리산 고지에 있어 농사가 잘 안 돼요. 그나마도 태풍이 오면 농작물이 모두 쓸려가 버리고······. 살기가 힘들었죠. 더덕을 캐고 고로쇠 물을 받으며 근근이 살았어요. 그러던 어느 날부턴가 동네 친구들이 산수를 곧 잘하고 제가 모르는 내용을 술술 꿰고 있더라고요. 서당에만 가는 저와 달리 그 친구들은 학교를 다녔거든요. 어려운 살림에 사치인 줄 알면서도 부모님을 졸라서 15살에 초등학교를 다닐 수 있었어요."

그 후에 최 씨는 조금이라도 부모님의 부담을 덜어드리고 싶어 17살 때부터 객지에서 자취를 하며 일을 하기 시작했고 밤에는 잠을 줄여가며 공부에 매진했다고 한다.

"부산에서는 '뽀이'를 했었어요. '뽀이'는 지금 말로 하면 식당 배달부 쯤 될 거예요. 온갖 공장을 전전하기도 했어요. 공장 일은 위험천만했죠. 제 겨드랑이에 있는 열두 바늘을 꿰맨 자국은 그 때 생긴 거예요. 그렇게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야학을 다녔어요. 물론 야학은 불법이었어요. 결국 없어지고 말았죠. 그래서 나중엔 그냥 혼자 주경야독을 했었어요."

결정적으로 배움에 한을 맺히게 한 사건은 최 씨가 중학교에 들어가기 직전에 일어났다. "원래 저는 공익을 가기로 되어있던 사람입니다. 한데 갑자기 현역으로 가라는 겁니다. 결국 중학교 입학을 앞두고 군대에 갔어요. 아마도 현역으로 가야 할 그 누군가를 대신한 거였겠죠. 슬며시 군대를 피해간 그 누군가 말예요."

최 씨는 1981년도 그의 나이 25살에 간신히 대학에 들어갔다고 한다. '간신히'에 유난히 힘을 주어 말하는 그의 말투에서 대학에 가기까지의 험난함을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어렵사리 대학에 들어간 그가 세상에 조금씩 눈을 뜨며 충격적인 사실을 접했다. 1973년도 당시 GNP가 3500불이던 독일의 등록금은 0원이었다. 현재 20000불 시대를 바라보는 우리나라, 인적 자원이 유일한 자원이라고 대내외적으로 알려진 우리나라이다. 교육의 중요성은 어느 나라 못지않음에도 어느 나라보다 교육을 받기가 힘든 환경이 그는 이해 할 수 없었다.

최창우 씨에게는 중학생과 2명의 초등학생 자녀가 있다. 세 아이가 모두 대학에 간다면, 첫째 아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5년 후부터 셋째 아이가 졸업하기까지 최소 7년 이상 대학 등록금 마련이 최창우 씨의 몫이 될 것이다.

그런 그에게 두 달 전에 보았던 기사 내용은 경악할 만 했다. 기사에 따르면 2010년 전국 사립대학 등록금 평균액을 기준으로 지난 10년간 등록금 인상률을 감안한 5%의 인상률을 적용했을 때 7년 뒤 두 아이 대학 등록금이 1억 이상이라는 계산이 나온다고 한다.(4월 7일자. 오마이뉴스) 최 씨는 "물론 벌어 놓은 것은 없다."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마지막으로 꼭 할 말을 있다는 최 씨는 "반값등록금은 지난 이명박 대통령의 대선 공약이기도 했지만 2006년에 있었던 지방선거 당시 박근혜 의원이 내건 공약이기도 하다."며 "신뢰의 정치인이라고 자부하는 박 의원이 자신이 내건 공약 내용은 지키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이어 "등록금 문제는 생존권이 달린 문제이다. 이리 빼고 저리 빼지 말고 반값 등록금 공약을 이제라도 이행하여 대선 유력 주자로서가 응당 갖춰야 할 면모를 보이라."고 촉구했다.

오늘처럼 하늘이 부리는 변덕은 귀찮긴 하지만 우산을 펴고 접는 수고를 감수하면 아무 문제될 것이 없다. 하지만 정치인들이 부리는 변덕은 사람이 죽고 사는 문제이니 청학동 시절 최창우 씨네 한 해 농사를 망쳐놨다던 태풍에 비할 수 있지 않을까. 변덕이 죽 끓는 하늘 쳐다보며, 그만 올라가고 저 동그란 출구로 얼른 나와 최창우 씨의 피켓도 보고, 기자회견을 보기 위해 발걸음을 멈춘 사람들의 아우성도 꼭 들어보기를.

오현경/인터넷 경향신문 대학생 기자 (웹場 baram.kh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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