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정이야기]문위우표 엔타이어 "나오면 10억"

2011. 6. 9. 1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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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1월 6일, 'TV쇼 진품명품'에 놀랄 만한 사건이 벌어졌다. 50대 남자가 영국 런던의 벼룩시장에서 우연히 발견했다며 문위우표 실체봉투 비슷한 것을 가지고 나와 감정을 요청한 것이다. 5문짜리와 10문짜리 문위우표가 1장씩 2장 붙어 있고, 그 우표 위에 '1884년 10월 1일'이란 일부인(日附印)과 경성우체국을 나타내는 '京'자 소인이 찍혀 있는 봉투였다.

↑ 미사용 문위우표(위쪽)와 5문 및 10문짜리 모조우표. 5문짜리 모조품은 색상이 다르고, 10문짜리 모조품은 우표 중앙의 한글을 알아볼 수 없도록 조잡하게 돼 있다.

문위우표는 1884년에 나온 우리나라 최초의 우표다. 역사성은 있지만 우체국 소인이 찍히지 않은 미사용 문위우표는 시중에 매우 흔하다. 최초의 우정행정기관인 우정총국이 갑신정변의 여파로 문을 열자마자 폐지되는 바람에 잔뜩 찍어놓은 우표들을 거의 써먹지 못했기 때문이다. 구한국 정부는 당시 새 우표 수백만장을 독일 상인에게 팔았고, 이 우표는 훗날 한국으로 다시 들어왔다. 그 물량이 워낙 많았기 때문에 지금도 인터넷에서 2만~6만원만 주면 어렵지 않게 손에 넣을 수 있는 게 미사용 문위우표다.

하지만 같은 문위우표라도 편지 부치는 데 사용된 사용필(畢) 우표라면 얘기는 전혀 달라진다. 우정총국이 업무를 본 초기 20여일간 쓰인 것이니 이는 극소량이다. 현존하는 사용필 우표는 국내에 7장, 해외의 것을 합쳐도 겨우 21~23장밖에 안 된다는 게 우표전문가들의 얘기다. 일부 전문가는 이 우표들 중에도 위작(僞作)이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한다.

그만큼 사용필 문위우표는 희소가치가 높다. 그 중 하나가 1975년 11월 도쿄 옥션에서 일본돈 77만 엔(당시 우리돈 125만원)에 거래됐다. 우리나라에선 거래가격이 공식 확인된 적이 없으나, 김갑식 한국우취연합 서울지부장은 900만원이라는 평가액을 내놓은 적이 있다. 사용필 우표만 해도 이런데 그게 옛날 봉투에 그대로 붙어 있다면 엄청난 고가일 게 틀림없다.

당시 진품명품의 감정위원은 우리나라 근대우편사의 최고전문가인 고 진기홍씨. 진씨는 이 우표를 한참 살핀 다음 여기에 찍힌 일부인이 구한국 시대의 것이 맞다며 '진품'으로 감정하고, 평가액을 1억원으로 산정했다.

얼마 뒤 이 우표는 국내 전문수집가의 손에 넘어갔다. 당사자가 밝히진 않았지만 주고받은 가격이 2000만원이라는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감정가격에는 못미쳤지만 국내 우표 중에선 최고 수준의 거래가 형성된 것이다.

하지만 이 우표가 진품으로 인정받은 기간은 그리 오래 되지 않았다. 다수의 전문가들은 문제의 우표가 위작이라고 주장했다. 소인에 찍힌 글자가 100년 전의 것이라고 보기 어려운 데다, 우표가 편지봉투에 붙어 있지 않고 A4용지 절반 크기의 흰 종이 위에 있는 점, 송·수신인 주소가 없는 점 등 미심쩍은 대목이 많다는 것이다. 우표에 찍힌 날짜 도장은 흔해빠진 미사용 문위우표에 누군가가 임의로 찍은 것 아니겠느냐는 얘기도 나왔다.

진실이 무엇인지는 9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 밝혀진 바 없다. 분명한 것은 지금 그 문위우표를 놓고 진품이라고 얘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점이다.

문위우표 진위 소동은 이때가 처음은 아니다. 1966년 12월 5일 동아일보는 '우리나라 최초 문위우표 발견'이라는 제목 아래 문위우표 엔타이어가 나왔다는 기사를 실었다. 서울 동대문에 사는 최모씨(당시 20)가 10문짜리 문위우표 2장이 붙어 있는 봉투를 제시했다. 여기에는 희미한 검정 소인에 JPO COREE 5 DEC 84라는 글자와 인천이라는 글씨가 박혀 있었다. 수신인은 일본 도쿄부의 노무라(野村), 송신인은 '우정국 고문 오비 스케아키 (小尾補明)'라고 돼 있었다. 동아일보는 이를 놓고 '82년 만에 발견'이라고 의미를 부여하면서도 부제로 '진부(眞否)에 논쟁'이라고 달아 만약의 경우에 대비한 신중한 보도태도를 보였다.

이때도 판정관은 진씨였다. 진씨는 소인을 찍은 도장의 양식이 당시 것과 다르고, 당시 우정국 고문의 이름이 '補明'이 아니라 '輔明'이라는 점을 들어 위작이라고 판단했다. 진씨의 이 한 마디로 소동은 종결됐다.

이밖에도 여러차례 유사품이 나왔으나 모두 위작으로 판명나면서 문위우표 엔타이어는 미궁에 빠져 있다. 진품이 발견되면 10억원은 족히 나갈 것이란 게 전문가들의 견해. 그 귀하신 몸을 언제 구경할 수 있을지, 아니면 영원히 못보는 것인지 우취계는 답답하기만 하다.

< 신동호 선임기자 hudy@kyunghyang.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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