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진의 차맥] (9) 일본다도의 신화학과 탈신화학 (2) 다선일미 묵적은 한중일의 미스터리

2011. 4. 4. 2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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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 "차와 관련된 어떤 저술에도 언급없어… 단순한 법어 그쳐"東亞 3개國 선차문화 주도권 암투치열… 향후 위상변화 주목

[세계일보]

일본 다도의 법식은 질서라기보다는 규격이다. 말하자면 격자 속에 갇힌 다도이다. 일본 다도의 진결(眞訣)인 화경청적(和敬淸寂)을 가지고 말하면 저들의 화(和)는 실은 섬나라에 갇힌 '폐쇄된 화(和)'이다. 일본 다도의 '화'의 이면에는 신토(神道)가 있다. 신토는 일본의 폐쇄된 민족주의 혼을 담고 있는 사상체계로 마코토(誠)와 원형(丸)을 함축하는 화(和)를 중시한다. 그러나 일본의 '화'는 한 번도 세계사적인 검증을 받은 것이 아니다. 일본 내부의 '화'일 뿐이다. 역사적으로 한 번도 제대로 다른 나라의 침략을 받아보지 못한 일본은 적어도 다른 나라와의 관계에서 전쟁을 극복한 진정한 평화의 의미를 모른다. 그러한 거짓 '화'가 크게 혼쭐이 난 것이 바로 태평양전쟁에서 미국에 패배한 것이다. 대륙과 한반도에서 문화적으로, 인종적으로 수혜만 받아온 일본은 상대에게 자신을 온전히 터놓을 줄 모른다. 오늘의 일본이 세계 제3의 경제대국이면서도 그것에 걸맞은 문화적 포용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일본 다도 종장(宗長) 우라센케(裏千家) 가원(家元) 센소시쓰(千宗室) 초청 강연 다회 장면.

일본 다도가 '화' 다음으로 섬기는 것이 '경(敬)'이다. '경'은 상대방에 대한 존경과 겸손을 뜻하지만 남에게 무엇을 꾸며서 보이는 것을 경계한다. 손님과 주인이 서로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루어야지 기분을 맞추려고 해서는 안 된다고 말로는 한다. '지금의 다회는 평생 한 번뿐인 기회다'라는 일기일회(一期一會)의 마음으로 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본인의 예의바름은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 대신에 자신도 손해를 보지 않겠다는 의미가 깔려 있다.

일본의 고전다서(古典茶書)인 '남방록(南方錄)'이나 '산상종이기(山上宗二記)' 등에는 찻자리에서의 평등이나 꾸밈 없음을 주장하지만 일본의 행다와 찻자리 모습을 바라보면 그것과는 정반대이다. 아마도 '화경(和敬)'을 잘 못하기 때문에 반면교사로 그러한 다도를 만들어낸 것일 게다.

문화적으로 볼 때 일본만큼 위계와 꾸밈이 많은 문화도 드물다. 일본 문화는 도리어 꾸밈과 형식의 문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도 일본인에게 가장 자연스럽게 드러나고 몸에 밴 것은 '청(淸)'이다. '적(寂)'은 각자가 추구한다고 하지만 그것의 달성을 문화적으로 논하는 것은 금물이다. 지극히 개인적인 수양과 수행의 차원이기 때문이다.

일본 다도의 본격적인 시작은 난포조묘(南浦紹明·1235∼1308)로부터 비롯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본은 800년 전 난포조묘 선사가 남송 시대 고승 허당선사(虛堂 智偶·1185∼1269)로부터 '경산다연'(茶卓, 茶典)을 가져간 것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다. 난포조묘는 숭복사(崇福寺)의 개산조였다. 일본 고불서(古佛書)인 '속시청초(續視聽草)'와 '본조고승전(本朝高僧傳)'에는 "난포조묘가 송나라에서 귀국하면서 차 탁자와 차 도구를 숭복사에 가져왔다"고 했다. 이때 경산에서 중국의 차전(茶典) 7부도 일본에 전했는데 '차전' 중에 '다도청규' 3권도 들어 있었다.

중국 차학의 대부격인 좡완팡(莊晩芳) 선생은 "경산다연은 일본으로 건너가 화(和)·경(敬)·정(精)·청(淸)·도(道)·덕(德)을 널리 알렸다"고 말했다. 허당의 다풍은 난포조묘를 거쳐 잇큐소준(一休宗純·1394∼1481)으로 이어졌다. 허당이 난포조묘에게 글씨를 한 폭 준 것은 중요한 사건이었다. 그 뒤로 차어(茶語)가 있는 족자를 걸고 차회를 하는 풍경이 일본에서 자리를 잡았다.

◇일본의 다실에는 으레 다선일미(茶禪一味), 화경청적(和敬淸寂),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 등 여러 묵적들이 걸려 있다.

난포조묘는 25세에 중국 송나라에 가서 양기파인 허당선사의 시자로 있다가 법을 받고 33세에 귀국하였다. 난포조묘의 제자 다이토국사(大燈國師) 슈호묘초(宗峰妙超·1282∼1337)는 대덕사(大德寺)를 개창하고, 묘초의 제자 간잔에겐(關山慧玄·1277∼1360)은 묘심사(妙心寺)를 개창했다. 이들 3대를 오도칸(應燈關)이라고 하며 임제종 대응파(大應派)라 불린다.

이 법맥은 일본 임제종의 중흥조인 하쿠인에카쿠(白隱慧鶴·1685∼1768)를 거쳐 오늘날까지 임제종의 정통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최근 원오극근(圓悟克勤·1063∼1135) 친필인 '류(流)의 묵적(墨蹟)'에 대한 다른 견해가 제기됐다. 지금까지 원오극근의 묵적은 한중일의 미스터리로 남아 있었다.

중국 닝보(寧波)시 인민정부(닝보 칠탑사)가 대회를 유치하면서 한국의 '차의 세계'(한국국제선차문화연구회)가 공동주최한 '선차문화의 동전(東傳)'을 주제로 한 '제5차 세계선차문화교류대회'(2010년 4월 23∼26일) 학술연토회에서 베이징대 쉬안팡(宣方) 교수는 '송원 불차의 다연'이라는 논문을 들고 나와 "원오극근 선사가 구큐조류(虎丘紹隆·1077∼1136)에게 써 준 인가장(도쿄박물관 소장), 즉 '류(流)의 법어'는 다선일미의 정맥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한 법어에 불과하다"고 폭탄선언을 했다.

이 자리에 참석한 일본 무라다 슈코(村田珠光·1442∼1502) 연구의 권위자 구라사와 유키히로(倉澤洋行) 교수는 경악했고,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한·중·일 차학계는 긴장했다. 구라사와 교수는 대회가 끝난 뒤 '류의 묵적'은 종래 일본의 주장이 맞지만 또 다른 '원오 묵적'(圓悟墨蹟, 슈코·珠光 소지)은 원오가 쓴 것이 아니라 남송 시대 선승 대혜종고가 대신 써준 것이라는 내용의 글 '슈코의 원오묵적'을 '차의 세계'(2010년 10월호)에 기고함으로써 원오묵적을 둘러싼 논쟁은 가열되고 있다.

더구나 '화경청적'도 백운수단(白雲守端·1025∼1072)의 어록을 일본이 즐겨 쓰면서 일본 다도의 진결(眞訣)이 되었다는 중국 측의 주장이 나왔다. 백운수단은 임제의현(臨濟義玄), 황룡혜남(黃龍慧南)에 이은 양기방회(楊岐方會)의 제자이다. 백운수단의 제자가 원오극근이고, 원오극근의 제자가 구큐조류이다.

일본 다도가 신주처럼 모시고 있는 '화경청적'과 '다선일미'의 신화가 뿌리째 흔들리는 순간이었다. 이 같은 발언은 일파만파가 되어 동아시아 차계에 풍랑을 일으켰다. 지금까지 일본인들은 선차의 맥이 원오극근을 통해 일본에 전해졌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 차계의 원로인 다다 유지(多田侑史) 선생은 1992년 3월 원오극근 선사가 다선일미를 제창한 협산 영천사를 찾아 감격한 나머지 "일본 다도의 조정은 석문 협산에서 나왔다"고 말했을 정도이다.

'신선소각사지(新選昭覺寺志)'에 따르면 무라다 슈코가 중국에서 원오극근 선사를 참배하니 선사는 '정법안장(正法眼藏)'을 전하고 '다선일미'라는 묵보를 증송하였다고 한다. 무라다 슈코는 귀국하면서 태풍을 만나 대나무 통에 넣어둔 '다선일미'를 잠시 잃어버렸으나 나중에 일본 혼슈(本州) 강변에서 잇큐소준이 발견해 대덕사에 보관되어 있다가 무라다 슈코에게 다시 전해졌다.

◇박정진 문화평론가

일본 승려들은 이 묵보를 통해 깨우쳐 후에 저술하니 그것이 '선다지도(禪茶之道)'이다. 묵보는 그 후 다케노 조오(武野紹鷗·1502∼1555), 센리큐(千利休)에게 전해진다. 이 묵보는 센리큐 사후,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수중에 들어가고,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로 넘어가 오늘에 이르고 있다는 것.

2001년 5월 중국 경공업출판사에서 나온 '중국차엽대사전'에는 다선일미라는 말이 다음과 같이 정의되어 있다.

"다선일미(茶禪一味·Same sense in tea & buddhism): 불교용어. 선미(禪味)와 차미(茶味)는 동일한 종류의 흥취임을 가리킨다. 본래 송대 원오극근(1063∼1135)이 선수행을 하던 일본인 제자에게 써준 네 글자로 이루어진 진결로, 일본 나라(奈良)현의 다이도쿠지에 보관되었으며, 나중에 불교계와 민간에 널리 유행하는 말이 되었다."

현재 도쿄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다선일미 묵적의 설명에 따르면 "원오극근은 66세 되던 때인 1128년 2월 12일 남송 고종의 명을 받아 운거산으로 가고 있었다. 금릉(金陵)을 지나다가 잠시 쉴 때에 특별히 배웅을 나온 법제자 구큐조류에게 준 법어이다." 이를 일본에서는 '조류에게 준 인가장'이라고 소개되어 있다. 중국에서는 인가장이 아니라 단순한 법어라는 것이다.

일본의 어떤 선종과 차 관련 저술에도 '다선일미'라는 글은 나오지 않았고, 단지 묵보로서만 대덕사에 보관되어 있다고 할 뿐, 이 사실조차도 세상에 알려진 것도 최근의 일이다. 그래서 일본의 차 정신을 다선일미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 중국 측 주장이다. 그만큼 다선일미는 오늘날 동아시아 차 정신으로, 차 브랜드로 어떤 글귀보다도 요약과 힘이 강하다는 것을 반영하고 있다. 일본에서는 센리큐에 의해 소장되었다는 것만으로도 일본 차 정신의 요체가 바로 '다선일미'라고 하는 데에 손색이 없다는 것이다.

'다선일미'와 '화경청적'이라는 묵적의 출처와 진위가 어떻든 간에 일본은 이것을 가지고 근대 다도의 신화를 완성하는데, 이것이 근본에서 흔들리고 있는 셈이다. 현재 동아시아 삼국 간에는 선차문화의 주도권을 잡기 위한 보이지 않는 암투가 벌어지고 있는 형편이다.

제5차 세계선차문화교류대회에서는 또 중국 측의 여러 발표자가 대회 명칭인 '선차(禪茶)'를 '다선(茶禪)'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해프닝 성격의 주장도 나왔다. 그러나 그 뒤 중국과 일본, 한국의 논문들이 '선차'로 가야 한다는 주장을 일제히 쏟아내고, 중국 닝보 당국의 사과로 사태는 일단락되었다.

중국 다예연구의 권위자인 위웨(余悅) 장시성 난창(南昌)대 교수는 '선차대회'가 동아시아 차학의 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하는 장문의 기고를 통해 한국의 입장을 앞장서 지지해주었다. 일본의 다도신화는 앞으로 한국과 중국의 차 문화 부흥에 따라 종래의 위상이 달라지는 것은 물론이고, 입장의 재조정이 요구될 전망이다.

문화평론가 pjjdisco@naver.com

■ 茶 포토에세이=다기에 담긴 소우주

2700년 된 높이 19.5m의 거대한 차왕수 나무가 한국에서 가져간 다기에 담긴 사진이 '차의 세계' 4월호에 공개되면서 화제를 몰고 왔다. 그때가 2011년 3월 10일 5시50분으로, 아이라오산(哀牢山) 아래 해발 2280m에 있는 첸자자이(千家寨·윈난성 쓰마오 소재) 차왕수 앞에서 벌어진 일이다.

이틀을 달려 6시간을 주행한 끝에 거령신으로 떠받들어지는 차왕수에 헌다를 마친 뒤 차 한 잔이 간절해진 필자는 한국에서 함께 고차수 탐험에 나선 보천사 주지 법진 스님에게 차왕수 앞에서 차 한 잔 하자고 제안했다. 마침 보온병에 뜨거운 물이 남아 있어 한국에서 가져간 은다기 뚜껑을 열고 뜨거운 물을 부었다.

다기의 뚜껑을 닫으려는 순간 다기에 비친 찻잎이 아름다워 사진을 찍으려는데, 우연히 다기에 담긴 찻물 위로 차왕수의 모습이 비쳐 들어왔다. 그 놀라움과 경이로움에 카메라 셔터를 멈출 수 없었다. 높이 19.5m나 되는 차왕수가 다기에 담긴다는 것은 예사로운 일이 아니었다.

그 순간 필자는 2005년경 오대산 우통수를 찾았다가 잔설이 내려앉은 나뭇가지가 우통수 물에 담긴 장면을 카메라에 담았던 일이 생각났다. 셔터를 누르는 동안 다기 속의 찻물에 차나무의 그림자가 나타났다가 6시가 다가오자 순식간에 사라졌다. 불과 3분 간격에 벌어진 그날의 순간을 잊을 수 없었다. 그때 그 순간을 지켜본 뒤 카메라에 담긴 사진을 살핀 법진 스님은 "우담바라가 꽃피는 것과 같은 길조"라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차왕수 나무를 살피다가 내려온 보천사 지민 스님은 "차왕수를 한국의 차와 다기에 담아 가니 한국과 중국이 차향처럼 오래 이어지길 비는 거령신(巨靈神)의 감은"이라고 말했다. 이 순간을 지켜본 중국 '해협다도'지의 진용광 기자는 "있을 수 없는 현실이 눈앞에 펼쳐지는 광경은 최석환 선생의 원력이 중국과 차연으로 맺어진 결과"라고 평했다. 이렇듯 순간에 펼쳐진 광경을 필자는 '다기에 담긴 소우주'라고 정의했다.

아무튼 우리 주변에는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난다. 다기에 거대한 19.5m의 차왕수를 담아낼 수 있었던 순간은 차를 이끌어준 신농씨가 우리에게 준 고귀한 선물이 아닐 수 없겠다.

글·사진 제공=사진작가 운암(雲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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