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찾아서] 한·일 시민은 화해·반성 '비지땀' 정부는 '무책임' / 이이화

2011. 3. 30.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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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이이화-민중사 헤쳐온 야인 120

2010년 1월31일 도쿄에서 열린 '과거청산과 평화의 미래를 위한 1·31 집회'는 '강제병합 100년 공동행동 일본실행위원회' 결성을 결의함으로써 한일 과거사 청산 과정에서 역사적인 한 획을 긋는 뜻깊은 자리였다. 하지만 국치100년사업추진위원회(백추위)에서는 도쿄까지 다녀올 경비가 모자라서 애를 먹었다. 운영자금에서 비행기표를 지원할 수 있는 한도에 맞춰 일부 운영위원만 참가를 하되, 현지 체재비는 개개인이 부담을 했다. 일행은 숙박비를 아끼려 도쿄 변두리의 후진 게스트하우스에서 집단투숙을 하고, 나와 이석태(변호사)·윤미향(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대표) 등은 그나마 '늙은이 대접'을 받아 신주쿠의 허름한 모텔급에서 묵었다. 60여개 가까운 단체가 모여 국치 100년 행사를 할 때도 일본 방문 경비가 없어서 쩔쩔맸는데, 후원재단 같은 곳에서 한 푼의 지원도 없었으니 딱한 일이었다. 두 나라 시민단체들을 단일한 공동행동기구로 조직해 한일시민대회를 준비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일본과 발을 맞추어 백추위에서도 2010년 3월26일 '강제병합 100년 공동행동 한국실행위원회'를 결성했다. 두 나라 실행위원회는 그해 8월22일부터 29일까지를 '강제병합 100년 한일시민대회' 기간으로 선포하고 다양한 사업을 전개했다.

우선 8월22일 도쿄 도시마공회당에서 한일 시민 공동선언 일본대회 개막식이 열렸다. 공회당에는 어느 때보다 많은 1000명 이상의 일본 시민들이 참여해 진지하게 행사를 지켜보았다. 바깥 거리는 소란스러웠다. 일본의 극우인사들이 '전위행동대' 따위 표지를 단 차량 10여대를 몰고 와 일본 국가와 '조센진 바카야로' 같은 구호를 확성기를 통해 외치며 빙빙 돌고 있었지만 일본 참여자들은 한 점 동요 없이 행사장을 지켰다. 더욱이 민주민중가요인 '타는 목마름으로'(김지하 시)를 일본 가수가 부를 적에는 눈물을 글썽이는 모습도 보였다.

그날 밤 행사가 끝난 뒤 도시마공회당 언저리에 있는 허름한 식당에서 뒤풀이를 했다. 좁은 자리에 늙은이 젊은이 가릴 것 없이 100여명이 빼곡하게 앉아 대화를 나누기도 하고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춤을 추기도 했다. 나는 너무 기분이 좋아서 주책없이 박자에 맞지 않는 노래를 일부러 부르기도 하고 춤사위도 엉터리인 어깨춤을 추었다. 그 자리의 모습만 보면 풀리지 않을 꼬투리가 없을 것 같았다.

나는 광복절에 즈음하여 사할린 강제동원 노동자 문제 해결에 집중노력을 기울인 배덕호의 주선으로 오충일·조재국 목사와 함께 사할린을 방문해 답사도 하고 유족들의 사정도 살펴보았다. 뜻깊은 일이었다.

이어 8월27~28일에는 서울 성균관대에서 국제학술대회를 공동주최하고, 국치일인 29일에는 한일 시민 공동선언 한국대회 겸 한일시민대회 폐막식을 거행했다. 특히 우리는 도쿄와 서울을 오가며 열린 두번의 대회에서 두 나라 시민단체들이 공동으로 작성한 '식민주의 청산과 평화실현을 위한 한일 시민 공동선언'을 발표했다. 형식적인 선언이 아니라 실제로 과거사 현안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해온 두 나라 시민단체들이 중심이 되어 작성했다는 점에서, 그리고 선언 말미에 한일 시민 공동행동계획을 명기해 이후의 실천을 담보하려는 의지를 담았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고 하겠다. 또 일본 혼성합창단 '악마의 포식', 한겨레 평화의 나무 합창단과 사이타마 우타고에 합창단의 합동공연, 그리고 한일 교류의 밤을 함께하며 이해와 친목을 다졌다.

그런데 한국대회 때는 폭우가 쏟아지는 궂은 날씨 탓이기도 했지만 청중이 몇백명에 지나지 않았다. 이 자리에는 일본인들도 130여명 참가했는데 부끄러웠다. 또 한국 쪽에서 창구를 단일화하지 않고 여기저기에서 따로따로 행사를 벌여 분산된 모습을 보였다. 이아무개 원로교수는 국제학술발표회에서, 나라를 망친 책임을 가장 먼저 져야 할 고종과 명성왕후를 두고 '구국의 화신'이란 논리를 펴서 어리둥절하게 만들기도 했다.

아무튼 이런 과정을 거쳐 국치 100년 행사는 마무리되었다. 상임공동대표였던 박남수·박원철·이강실·이석태·이장희·이해학 등이 개인 주머니를 털어 경비를 댄 힘도 소중했거니와, 땀을 뻘뻘 흘리며 모든 행사를 조직하고 진행한 박한용·김민철·양미강·이신철 등과 실무를 도운 조세열·방학중·이용진의 수고를 빼놓을 수 없겠다. 주로 조직을 맡았던 박한용은 일본에 10여차례 다니면서 열성적으로 일을 추진했다. 또 강주혜(정신대)·김점구(독도수호대)·김종수(간토대지진사업회)·배덕호(지구촌동포연대)·윤원일(안중근기념사업회) 등의 노고도 컸다.

거듭 말하거니와 이 행사는 결코 원한이나 복수 같은 갈등을 내세운 것이 아니라 평화와 인권과 우의를 주제로 삼았다는 데에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여전히 일본 정부는 진정한 사과를 꺼리고 한국 정부 역시 미온적인 대응만 되풀이하고 있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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