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데뷔 25주년 맞은 소프라노 조수미




"재능 나누고 행복 주는 일 더 많이 하고 싶어"
(서울=연합뉴스) 임은진 기자 = "올해는 제가 데뷔한 지 25년이 되는 해로 너무나 뜻깊은 해입니다. 앞으로의 계획이요? 글쎄요. 아직도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아서…. 음악회와 음반 녹음 등 음악인으로서 제 포부를 펼치고 싶고. 그러자면 무엇보다도 건강해야겠죠.(웃음)"
소프라노 조수미(49)는 매일 밤 자기 전에 꼬박꼬박 일기를 쓴다. 1983년 이탈리아로 유학을 떠날 때부터 시작한 일기 쓰기를 지금까지 하루도 거르지 않았다고 한다.
그를 지난 7일 오후 서울 삼성동에서 만나 1986년 베르디의 오페라 '리골레토' 중 질다 역으로 데뷔해 무대에 오른 지 25주년을 맞은 현재까지, 그리고 앞으로의 포부를 들어봤다.
◇1983년 이탈리아로 유학…"늘 자신만만할 것" = 서울대 음대를 다니다 1983년 이탈리아의 산타 체칠리아 음악원으로 유학을 떠난 조수미는 일기장 첫 장에 앞으로 지켜야 할 것 다섯 가지를 적었다고 한다.
1 어떤 고난이 닥쳐도 꿋꿋이 이겨내며 약해지거나 울지 않을 것. 2 절대 약하거나 외로운 모습을 보이지 않으며 늘 도도하고 자신만만할 것. 3 어학과 노래에 온통 치중할 것. 4 항상 깨끗하고 자신에게 만족한 몸가짐과 환경을 지닐 것. 5 말과 사람들을 조심하고 말과 행동을 분명히 할 것.
그리고 이 다짐은 현재 진행형이다.
"같이 무대에 서는 성악가들이 '어떻게 그렇게 높은 음에서 피아니시모를 낼 수 있느냐, 어떻게 그렇게 호흡이 길 수 있느냐, 몸이 작은데 어떻게 그런 목소리가 나오느냐'라고 물어봐요. 그런데 그런 건 설명할 수가 없는 거잖아요. 대신 무대에 설 때는 '내가 제일 잘한다'는 자신감이 있어야 한다고 말하죠. 음이 불안해도, 조금은 힘이 들어도 성악가는 자신감으로 무장돼 있어야 합니다."
◇1986년 '리골레토'의 질다 역으로 데뷔…"오페라보다 독창회가 좋아" = 조수미는 1986년 이탈리아의 트리에스테 극장에서 '리골레토'의 질다 역으로 화려하게 데뷔했다. 3년 뒤 미국의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극장에 데뷔할 때도 그는 질다 역을 맡았다.
"질다 역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이 했어요. 질다라는 캐릭터가 저랑 잘 맞아서 좋아했고 또 그만큼 연기도 많이 했죠. 질다는 몸도 작은 데다 사랑을 믿고 사랑을 위해 싸우고 죽을 수도 있는 열정과 감성을 지녔잖아요. 그리고 베르디의 다른 작품과 달리 질다는 저처럼 얇고 가벼운 목소리로도 충분히 소화해낼 수 있는 배역이거든요."
데뷔 이후 이탈리아와 미국, 영국, 프랑스, 오스트리아에 위치한 세계 5대 극장을 누비며 활동한 그에게 가장 애착을 둔 오페라 배역을 물었더니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성악가지만 오페라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다.
"이런 말 하면 충격적(sensational)으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사실 전 오페라를 좋아하는 사람은 아니에요. 다른 사람이 출연하는 오페라도 잘 안 가고 그래요. 그보다는 독창회나 콘서트와 같이 관중과 일대일로 만나면서 무대에 서는 것을 좋아하죠."
오페라에서 그룹의 일원이 돼서 노래하기보다는 좋아하는 지휘자와 초대 가수와 함께 무대를 행복하게 꾸미는 것을 선호한다는 것이다. 특히 독창회는 다른 성악가들의 질투를 받지 않아도 되며 오페라와 달리 자신의 의견을 충분히 반영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고 덧붙였다.
"오페라는 단지 제가 밟아야 하는 계단과 같은 것이었다고 할 수 있어요. 성악가로서 인지도도 쌓아야 하고. 물론 오페라 출연은 앞으로도 계속 할 겁니다. 그러나 그건 제가 하고 싶었던 역할을 맡거나 제가 좋아하는 지휘자와 성악가들과 함께해 한 달 동안 집 밖에서 생활해도 행복할 수 있을 때만 하려고요."
올해 오페라 '세빌리아의 이발사'와 '연대의 딸'에 출연하는 이유는 하고 싶었던 배역을 맡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두 작품 모두 코믹한 작품이어서 출연하기로 결정했어요. 제가 재미있는(fun) 성격이거든요. 공연 전에는 호텔에서 하나의 의식처럼 빨래를 하면서 생각을 정리하기도 해요.(웃음) 특히 '세빌리아의 이발사'의 로지나 역은 이번에 처음 해보는 역할이기도 하고요. 이제는 끝에 가서 죽는 멜로드라마 속 비련의 여주인공 역은 안 하려고요."
◇1986년 카라얀과의 만남…"믿을 수 없군! 신이 내린 목소리" = 1986년 이탈리아 로마에서 열린 한 오디션에서 조수미의 노래를 듣던 카라얀은 "믿을 수 없군! 10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신이 내린 목소리"라며 극찬한다.
"카라얀이 눈 감고 베를린 필을 지휘하는 사진을 제 책상 앞에 붙여놓고 매일 봐서 그런가, 세계적 거장인 카라얀을 만났을 때 하나도 떨리지 않았어요. 처음 만났는데도 카라얀의 머리도 만져보고 그랬거든요.(웃음)"
그는 그날 일기장에 편지 왕래만 하다 오랜만에 만난 할아버지와 대화하는 것처럼 편안하게 썼다고 말했다.
"전 카라얀이 돌아가시기 8시간 전까지도 같이 있었어요.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서 도밍고와 함께 '가면무도회'에 출연하기 위해 카라얀과 밤늦게까지 리허설을 했는데, 그날 가슴이 답답하고 숨을 못 쉬겠다고 하시더라고요. 돌이켜보면 카라얀과는 불교에서 말하는 인연이 있었던 것 같아요."
카라얀이 해준 조언 중 어떤 것이 기억에 남는지 물었다.
"음악 할 때는 음악에만 집중하되 그것이 끝나면 음악에 대한 모든 생각을 끊을 줄 알아야 한다고 하셨어요. 카라얀 당신도 이걸 실천하게 되면서 사는 게 쉬워졌다고 하더라고요. 하지만 우리 같은 경우 어디 그게 되나요. 식사를 하고 이동을 할 때에도 계속 머리 속에서 멜로디가 흐리고 눈에 악보가 보이는데. 음악에 대한 집착과 끈을 놓으려고 노력하는데 전 아직 그게 안 되네요."
◇2000년 뮤지컬 음반 '온리 러브'…"대중과 한층 더 가까워진 징검다리" = "100만 장이 팔린 뮤지컬 음반 '온리 러브'는 조수미란 아티스트에게 대중이 좀 더 가까이 올 수 있게 한 징검다리 같은 앨범입니다. 아마 그때부터 오페라보다 독창회나 콘서트의 비중이 서서히 높아졌던 것 같아요."
이후 그는 드라마 '명성황후' OST 중 '나 가거든'과 월드컵 주제곡 '챔피언스' 등을 부르며 한국 팬들에게 한 걸음 더 친숙하게 다가갔다.
그러나 올해부터는 뮤지컬이나 크로스오버 곡이 아닌 정통 클래식 곡으로 한국 팬들을 찾을 생각이라고 전했다. 5월에는 영국의 고음악 연주단체인 아카데미 오브 에인션트 뮤직(Academy of Ancient Music)과의 독창회가 예정돼 있다.
"얼마 전부터 콘서트를 마치고 무대를 내려올 때마다 어떤 무게감을 느끼기 시작했어요. 제가 그동안 치열하게 공부했던 발성법과 음악성을 관객들에게 알리고 싶어지더라고요. 그래서 이번 공연에서는 고고하고 정제된 음악인 바로크 시대의 곡을 부를 계획입니다. 2006년 '저니 투 바로크(Journey to Baroque)'를 발표하고 한 번도 바로크 곡을 제대로 불러본 적이 없었어요. 관객들이 어떻게 받아들이실지 궁금하네요."
◇2006년 아버지의 죽음…"1년 중 300일 가족과 떨어져 지내는 건 거의 범죄" = 2006년 4월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독창회는 조수미에게 가장 힘든 무대였다. 바로 아버지의 장례식이 있던 날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는 딸의 한국행을 반대했다. 팬들의 사랑을 먹고 사는 사람이 관객과의 약속을 저버리면 안 된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는 그래서 만일 다시 태어난다면 노래를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노래를 위해 세계 곳곳을 여행하다 보니 가족과 떨어져 지내는 시간이 많아 외롭기 때문이라고.
"제가 지금까지 쌓아온 영광스러운 경력 이면에는 가족과의 끈끈한 정이 없다는 아픔이 있죠. 노래를 위해 가족과의 정을 희생한 것이죠. 1년 365일 중에 300일을 가족과 떨어져 지내는 것은 거의 범죄(crime)예요. 아버지 장례식도, 어머니 생신도, 동생 결혼식도 가본 적이 없으니. 제 생일 때도 가족이 한자리에 모여 축하받지 못했어요. 그냥 공연 마치고 호텔로 돌아와 혼자 룸서비스를 시켜서 먹곤 했죠."
◇2009년 발목 부상…"나누는 삶을 살고 싶어요" = 조수미는 2009년께 브라질에서 운동하다 발목을 다쳤다. 병원에 가야 했으나 공연을 이틀 앞둔 시점이라 갈 시간이 여의치 않았다.
"아팠지만 참고 무대에 섰습니다. 공연 뒤에는 바로 10시간 넘게 비행기를 타고 유럽으로 떠나야 해서 시간이 없었어요. 바로 치료를 받았으면 괜찮았을 텐데. 쉬지를 못해서 그런지 아픈 게 1년 가까이 지속되더라고요. 하이힐을 신고 노래를 불러야 하는데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할 정도여서 앉아서 노래 부르기도 했어요."
육체적으로는 고통스러운 시간이었지만 이를 통해 깨달은 점이 있다고 한다. 바로 나누는 삶이다.
"그동안 제가 너무 편하게 살아왔다는 점을 알게 됐어요. 이 세상에는 이것보다 훨씬 더한 아픔을 평생 안고 사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그래서 저는 자기 자신을 버리고 고통받는 사람들 속으로 들어간 테레사 수녀를 가장 존경합니다."
그는 몇 년 전부터 경제적으로 어려운 국가의 아이들을 후원해오고 있다고 했다. 또 자선 음악회의 출연료를 적십자에 기부하기도 했다.
"사실 더 많이 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해서…. 제 재능을 다른 사람에게 나누고 행복을 주는 일을 더 많이 하고 싶어요."
그가 앞으로 채워나갈 일기장도 무척 다채롭고 풍요할 것이란 짐작을 가능케 한다.
"아직도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아요. 음악회와 음반 녹음 등 음악인으로서 제 포부를 펼치고 싶어요.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음반을 남기고 싶고 숨겨진 곡을 발굴해 생명을 부여하는 일도 하고 싶어요. 카치니의 '아베 마리아' 같은 경우 한 여자 성악가가 부르기 전에는 아무도 몰랐다고 해요. 하지만 지금은 많은 사랑을 받는 곡이 됐죠. 이런 일을 하려면 무엇보다도 건강해야겠죠. 건강이 제일 중요하니까.(웃음) 또 재능있는 후배들을 이끌어주는 한편, 개인 시간을 좀 더 갖고 싶어요. 앞으로 이런 이야기들로 제 일기장을 채워나가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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