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가 되지 말게나. 다른 좋은 직업도 많지 않은가?"

문정우 대기자 2010. 12. 27. 0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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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전 문정우 기자는 리영희 선생의 제자였다. 감옥에서 풀려나 막 복직한 리 선생은 문 기자에게 두 번의 굴욕을 안겨주었다. 하지만 그것은 선생이 물려준 소중한 '유품'이었다.

1980년 3월의 어느 날 한양대학교 신문방송학과 강의실이 갑자기 소란스러워졌다. 학생들이 해마다 열곤 했던 모의 기자회견이 아니었다. 진짜였다. 강의실에는 학생보다 기자가 더 많았다. 대형 텔레비전 카메라도 몇 대나 자리를 잡았다. 조명이 휘황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사살되고 나서 감옥에서 풀려나 복직한 리영희 선생님의 첫 강의 날이었다.

추위가 가시지 않아 가뜩이나 을씨년스러운 강의실에서 학생들의 어깨는 긴장으로 더욱 움츠러들었다. ‘도대체 이렇게 유명한 교수님이 우리에게 무슨 말을 해줄 것인가.’ 그날 두근대는 가슴으로 앉아 있던 학생들 가운데 내가 있었다. 학업에는 뜻이 없고, 술 마시고 노는 데 이골이 난 나는 막연한 불안감에 떨었다. ‘혹시 저 유식한 교수님이 이렇게 만장한 기자들 앞에서 나한테 뭔가 까다로운 질문이나 하시는 건 아닐까.’

ⓒ한양대동문회 제공 한양대 신문방송학과 졸업생들은 선생이 돌아가시기 전 쾌유를 비는 릴레이 병문안을 했다.

교수님은 푸른빛이 감도는 양복을 입으셨던 것 같은데 확실치는 않다. 얼굴이 깡마르고 눈빛이 형형해 쉽게 다가설 수 있는 분 같지 않았다. 선생님은 우리를 잠시 동안 바라보시더니 이렇게 묻는 것이었다. “제군들은 모두 기자가 되려고 하는 건가?”(선생님은 언제나 우리를 제군으로 부르셨다.) 우리는 그 어렵다는 언론사 공채 관문을 뚫을 자신이 없었지만 명색이 신문방송학과에 다니는지라 어쩔 수 없이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특종을 수없이 한 기자 출신이라는 선생님이 기자가 되려면 이러저러한 준비를 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려는 줄 알고 자세를 가다듬었다.

“기자가 되지 말게나” 하고 충고

하지만 선생님의 입에서 나온 말은 뜻밖이었다. “기자가 되지 말게나. 다른 좋은 직업도 많지 않은가?” 선생님은 자신을 취재하는 기자들을 죽 둘러보더니 이렇게 말씀하시는 거였다. “한국에서 기자 노릇 잘하기는 참 힘들다네. 여기도 한국 기자는 한 명도 안 왔지 않은가?” 나는 그제야 그 많은 기자가 모두 외신 기자임을 알았다. 서울에 봄이 왔다는데도 한국의 기자들은 리영희 선생의 첫 강의를 취재하러 오지 못한 것이다. 그때 나는 처음으로 〈동아일보〉 〈조선일보〉 〈중앙일보〉 〈한국일보〉 MBC KBS TBC니 하는 언론사들이 내가 생각했던 것처럼 그리 대단하지 않을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불길한 예감은 어찌 그리 잘 들어맞는지. 강의 말미에 선생님이 갑자기 나를 지목해 일어나보라고 하시는 게 아닌가? 그러더니 선생님은 난데없이 ‘냉전’에 대해서 아는 대로 말해보라고 하셨다. 나는 머릿속이 하얗게 지워진 듯해 그저 열전의 반대말인 걸로 안다고 입속에서 웅얼거리고는 진땀만 흘리며 서 있었다. 그때 나를 바라보던 선생님의 눈빛을 잊을 수 없다. 선생님이 냉전 속에서 자신의 양심을 지키기 위해 지금 이 순간에도 감옥에서 말할 수 없는 고초를 겪는 사람들 얘기를 하면서 잠깐 눈물을 비치셨을 때, 나는 불현듯 깨어 있다는 것과 그렇지 않다는 것의 차이를 분명히 깨달았다.

1980년 1월 광주교도소에서 풀려나는 리영희 선생(왼쪽)을 마중하는 한승헌 변호사(오른쪽).

그해 5월 학교에 탱크가 들어오는 바람에 휴학을 하고 군에 갔다와서 복학을 하니 선생님도 다시 한번 감옥에 갔다 나오셔서 복직해 계셨다. 선생님은 평론을 가르치셨는데 원고지 6~7장 분량의 글을 써내게 하고 그 다음 주에 잘된 것을 골라 읽어주곤 하셨다. 교내에서는 제법 ‘문명(文名)’을 날리고 있던 나는 천하의 리영희 교수님을 깜짝 놀래주리라 결심했다. 매주 선생님이 읽어줄 수밖에 없는 원고를 써내리라 다짐하면서 날밤을 새웠다. 하지만 야속하게도 선생님은 한 학기 내내 내 원고를 읽어주지 않으셨다. 다만 몸부림치는 내가 안쓰러우셨는지 어느 날 내 어깨를 두드리면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거였다. “자네가 아는 걸 쓰게.”

기자 노릇 잘하기가 얼마나 어려운가

선생님을 생각하면 언제나 내가 겪은 이 두 번의 ‘굴욕’이 떠오르지만 이 굴욕은 선생님이 물려주신 소중한 유품과도 같다. 나는 무지몽매한 자는 천하의 악당보다도 하등 나을 게 없다는 걸 선생님을 통해 배웠다. 그리고 글이란 선생님의 표현을 빌리면 ‘뼈를 깎는 노력을 통해 철저한 자기화를 해가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선생님은 굴욕을 겪은 나뿐만이 아니라 강의를 들은 모든 친구들에게 많은 영감을 주신 듯 보인다. 기자가 되지 말라는 강연을 들은 학생 가운데 기록적으로 많은 숫자가 기자가 됐다(정말로 선생님 말씀을 지긋지긋하게 안 듣는 학생들이다). 이제 50줄에 접어든 우리들은 가끔 모이면 그때 선생님 말씀을 들을 걸 그랬다고 후회하기도 한다.

우리가 선생님 강의를 들은 지 30년이 지났는데도 한국에서 기자를 잘하기란 여전히 어렵다. 지금도 얼마나 많은 기자나 PD가 양심을 지키려다가 해직당하거나 험한 꼴을 당하고 있는가. 선생님이 잘하기 힘드니 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게 이제 얼마든지 이해가 된다.

지금도 이 지경인데 당시에는 도대체 얼마나 힘들고 외로우셨을까 생각해본다. 선생님은 노동조합 같은 조직에 기대지 않고 언론의 자유란 사주의 것도, 편집국장의 것도, 기자의 것도 아니고 투쟁하는 자의 것이라는 사실을 몸으로 보여주셨다. 두 번 투옥되고 두 번 해직되는 과정에서도 선생님은 손에서 책을 놓지 않으셨다. 아이의 분유 값에서도 돈을 덜어낼 정도로 책을 사보는 데 집착하셨다. 그는 머리 좋게 태어나 좋은 대학 나와 거들먹대다가 공부를 하지 않아 바보가 되고 나서도 바보가 된 줄도 모르고 사는 모모한 언론사의 높은 자리 사람들을 실명까지 거론해가며 혐오하곤 하셨다. 선생님 같은 기자는 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나오기 힘들 것이다. 기자된 자에게 선생님의 삶은 그 자체가 ‘굴욕’이다.

문정우 대기자 wo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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