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람의 삶] "커피 한잔 값이면 가난한 이웃의 겨울이 따뜻해져요"

2010. 11. 21. 17:47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사랑의 연탄나누기 운동 펼치는'연탄은행'대표 허기복 목사

"영∼차. 영∼차." "힘으로만 끌면 100m도 못 가지만, 의지로 하면 1000리도 갈 수 있는 거야." 19일 오전 강원도 원주의 달동네라 불리는 원동 남산. 연탄은행 대표 허기복(54) 목사를 필두로 다섯 명의 자원봉사자가 연탄을 가득 실은 손수레를 앞뒤에서 끌고 밀면서 굽이진 언덕 비좁은 길을 올랐다. 3.6㎏짜리 연탄이 90장쯤 실렸으니 손수레의 무게는 어림잡아 350㎏쯤. 봉사자들 이마에 이내 구슬땀이 송글송글 맺혔다. 지게로 판자집 한쪽에 연탄을 가득 쌓은 뒤에야 얼굴에 환한 웃음이 번졌다. 홀로 사는 노인은 연방 "고맙다"고 인사했다.

◇밥상공동체와 연탄은행 대표인 허기복 목사가 19일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연탄이 가득 실린 손수레를 끌고 강원도 원주에서 달동네로 꼽히는 원동 남산길을 오르고 있다.

날씨가 쌀쌀해지면서 지난달 말부터 전국 30곳의 연탄은행이 활동을 앞다퉈 재개했다. 2002년 독거노인 등 저소득층 가정에 무료로 연탄을 나누는 연탄은행 1호점 문을 원주에서 연 허 목사에게 일년중 가장 바쁠 때가 바로 이맘때다. 그는 원주 연탄은행에서 하는 봉사활동 말고도 전국 각지 연탄은행 재개식에도 참석해 '사랑의 연탄 나누기 운동'이 갖는 의미와 중요성을 강조한다.

◆'허기진'이라는 별명을 가진 소년

허 목사는 1998년 4월 원주 쌍다리 밑에서 밥상공동체를 시작하면서 '원주의 밥짱'으로 통했다. 사실 그의 고향은 원주가 아닌 경기도 부천이다. 어린 시절 허 목사 집안은 방을 못 구해 10여차례나 이사를 다닐 정도로 형편이 어려웠다. 도시락도 제대로 못 싸오는 그를 위해 친구들이 십시일반으로 나눠주는 밥을 먹었다. '배고프다'는 말을 입에 달고 다니는 허 목사를 친구들은 '허기진', '허기져'라고 불렀다.

한끼 밥의 소중함을 절실히 느낀 소년은 늘 '우리 집은 왜 이렇게 가난할까'라는 의문을 품고 살았다. 그런 생각은 '어른이 되면 나처럼 어려운 사람을 도우면서 살고 싶다'는 꿈으로 바뀌어 나갔다. 신학대로 진학한 이유다. 대학 시절에도 가난은 늘 그를 따라다녔다. 낡은 구두가 못쓰게 될까봐 밤 늦게 귀가할 때면 구두를 품에 안고 맨발로 산길을 넘었다.

서울에서 목회활동을 시작한 그는 어느 날 문득 버스를 탄 사람들의 지친 표정을 바라보다 자신의 삶을 다시 돌아보게 됐다고 한다.

"사람들이 전부 지치고 힘든 모습이었어요. '이런 지친 영혼들에게 희망가 사랑의 메시지를 던져줄 수 있는 축제의 목회를 벌여보자'는 생각이 들었죠."

교회의 성장에 주로 관심을 쏟는 서울의 분위기에 휩쓸려 양적 성장에만 몰입하던 자기 모습을 발견한 것이다. 학생시절 스스로에게 한 약속을 지켜야겠다고 결심하자마자 그는 담임목사직을 내놓았다. 그리고 원주에 작고 어려운 교회가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1994년 네 식구가 함께 원주로 내려왔다.

◇어려운 이웃에게 식사와 연탄을 제공하는 운동을 펼쳐온 허기복 목사가 19일 강원도 원주시 원동 밥상공동체 겸 연탄은행 사무실 앞에서 환하게 웃으며 이야기하고 있다.

◆무료급식으로 시작한 '빈곤끊기운동'

교인이 50명쯤 되는 작은 교회였지만, 허 목사의 시선은 거기에 머물지 않았다. '지역에 국한된 목사는 되지 말자. 1000명이 모이는 교회도 감당할 수 없는 목회활동을 해보자'는 생각으로 의미있는 일을 할 수 있을까 찾았다. 마침 그 때 외환위기가 한국 사회를 강타했다. 실직과 노숙이 사회 문제로 떠오른 1998년 4월. 그는 6·25 전쟁 때 피난민들이 천막을 치고 재기의 의지를 다졌던 원주천 쌍다리 아래에서 무료급식 봉사를 시작했다. 교회에 국한하지 않고 지역 시민운동으로 확산되길 꿈꿨다. 그래서 교회 돈을 일절 쓰지 않았다. 그는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는 건 교회 성장과 무관해야 된다고 봤다"며 "그런 조건 없는 사랑이 아가페적 사랑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밥그릇 몇 개로 시작한 밥상공동체는 한 식품업체가 300명분의 식사를 매일 제공하겠다고 제안하면서 기틀을 잡았다. 천막병원 무료 진료와 자활지원 등으로 사업영역을 계속 넓혔다. 생활정보지나 지역유선방송을 통해 자원봉사자도 모집했다.

외환위기가 깊어지면서 식품업체에 더 이상 부담을 줘선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해 9월까지만 지원을 받은 그는 자립을 위해 '사랑의 쌀 모으기 운동'을 벌였다. 그렇게 후원의 손길이 이어지면서 사무실비도 내고 별도 급식소 건물도 차릴 수 있었다.

끼니를 해결하러 밥상공동체를 찾아오는 사람에겐 '식사자존심값'을 받았다.

"무료급식이라고 하면 본인이나 남들이 '공짜'라고 먼저 생각하게 되잖아요. 그래서 식사값을 내고 당당하게 드시라는 취지에서 식사자존심값을 받겠다고 했어요." 대신 폐지 한 장, 빈 병 하나처럼 쉽게 들고 올 수 있는 걸 받았다. 모아 팔면 돈이 되고, 밥상공동체로 오는 길거리가 깨끗해졌다. 허 목사는 그래서 폐지나 빈병을 '보물'이라고 부른다. 노숙자 한 명은 아예 트럭 한 대를 지원받아 폐품을 수거해 내다 파는 '고물상'을 차렸다. 어떤 이는 '구두대학'이라는 구두방을 차렸다. 그렇게 한 명 한 명이 자활의 길을 찾아나섰다.

지금도 밥상공동체에서 점심 끼니를 해결하는 사람들이 하루 평균 160명에 달한다. 13년 전과 달리 독거노인이 대부분이지만, 식사자존심값 만큼은 여전히 받는다. 노인들은 손뼉을 치며 "우리들의 인생은 예순 살부터/마음도 몸도 왕성합니다/칠십에 우리들을 모시러오면/지금은 안간다고 전해주세요"라는 '밥상공동체 희망가'를 부르고 나서 수저를 든다.

◇밥상공동체·연탄은행 대표 허기복 목사가 19일 급식소에 모인 할머니, 할아버지들과 함께 손뼉을 치며 '밥상공동체 희망가'를 부르고 있다.

◆"커피 한 잔이면 한 분이 하루를 따뜻하게"

외환위기가 남긴 상처는 특히 빈곤층에게 크게 남았다. 저소득층 지원사업을 하던 2002년 그는 냉방에서 지내다 감기에 걸려 고생하는 할머니를 만났다. 저소득층 가정 중에 연탄을 떼는 집이 많다는 데 놀랐다. 이들이 겨울을 나려면 하루 3장씩 필요한 연탄값이 만만치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어느 독지가가 연탄 1000장을 후원했다. 밥상공동체 사무실 한쪽에 연탄을 쌓을 공간을 만들어 놓고, 사람들이 필요할 때마다 은행에서 돈을 찾아가는 것처럼 어려운 사람들이 연탄을 구할 수 있도록 하자는 뜻에서 '연탄은행'이라고 이름붙였다.

"전국에 연탄을 떼는 집이 27만가구쯤 된다고 해요. 그 중에 정부보조금을 받는 곳이 6만가구, 차상위 계층이 10만가구 정도 있는데 우리 연탄은행은 8만가구에 연탄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원주 연탄은행이 지원하는 곳만 1000가구 정도. 다음달 강원 양양에 31호점을 개소하는 연탄은행은 2002년부터 지난해까지 1700만장 정도의 연탄을 저소득층 가정에 실어 날랐다.

올해는 15만가구에 연탄 200만장을 지원하는 목표를 세웠다. 올 들어 유난히 변덕스러워진 날씨 탓에 지난해(112만장)보다 2배 가량 높여 잡았다. "연탄 한 장에 요새 500원 해요. 배달시키면 650원이 들죠. 그러니까 커피 한 잔 아껴서 후원을 하면 할머니 한 분이 하루를 따뜻하게 지낼 수 있는 거죠."

허 목사는 고령화 시대에는 '경제적 빈곤'만큼이나 '정서적 빈곤', '문화적 빈곤' 등 문제에도 관심을 가질 때라고 강조한다. 한 달에 한 번 내로라하는 예술인을 초청해서 노인들을 대상으로 공연하고 노인들이 직접 운영하면서 필요한 신발이나 속옷 등을 저렴하게 구입하고 끼니도 해결하는 노인 중심의 쇼핑센터를 건립하고 싶다는 꿈을 꾸고 있다. "최종적으로는 밥상공동체 구성원이 가난하다고 해서 위축되지 않고, 자신을 긍정하면서 살아갈 수 있도록 힘을 보태고 싶어요. 쉽지만은 않겠지만 어렵고 힘든 건 하늘이 내게 내린 훈장이라고 생각합니다."

원주=유태영 기자 anarchyn@segye.com

[Segye.com 인기뉴스]

◆ '한 맺힌 여인의 두 손' 5년 넘게 살인범 가리켜

◆ 미쓰에이 민, 김영광에게 기습뽀뽀… 핑크빛?

◆ 이 대통령, 日총리 부인 '한국인 조상' 발언에…

◆ 국민 58.2%가 '통일비용 개인부담' 찬성했다?

◆ 장혁, 지하철 굴욕?…"아무도 못 알아봐"

◆ 속옷라인 드러나는 옷…섹시한 시상 도우미 '눈길'

◆ 바람난 아내 상대남에게 680만원에 팔아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무릎관절염 무료수술 캠페인] [렉스다이아몬드의 '슈퍼샤인'을 잡아라] < 세계닷컴은 한국온라인신문협회(www.kona.or.kr)의 디지털뉴스이용규칙에 따른 저작권을 행사합니다. >

Copyright © 세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