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사람은 녹고 짠지 단지도 없네

2010. 10. 15.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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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레드 기획] 서울문학산책 ②

김소진 < 장석조네 사람들 > 의 기찻집과

윤대녕의 '국화정사숙녀점성가 ' , 박완서의 < 그 남자네 집 > 을 찾아서…

길음동에서 미아리고개를 넘어 돈암동까지

오전 11시30분, 서울 북쪽을 가로지르는 내부순환도로 고가가 바라보이는 길음역 부근 해장국집. 벌써 소주 세 병을 비운 남자는 가게 안이 쩌렁쩌렁 울리게 목소리를 높인다. 조직의 총무를 맡았던 남자는 법정드라마의 검사처럼 "그렇습니까 안 그렇습니까"로 상대방을 휘어잡는다. 말이 많은 쪽이 억울한 사람이긴 하지만 우물쭈물한 사람이 더 억울해 보인다. 억울한 이는 상대가 "그건 그렇고"나 "모르겠는데"로 말을 시작한다 싶으면 바로 말꼬리를 잡아채 공격한다. 두 남자와 등을 지고 앉은 옆자리 둘은 여유롭다. 막걸리 두 병을 비우고 넓은 홀에 담배 연기를 뿜어내고 있다. 그들은 아직 여기 남아 있는 것일까.

길음동 산동네, 김소진의 기억이자 육체

그들은 어디 가든 표가 난다고 했다. 예비군 훈련장에서도 쉽게 표가 난다고 말한다. "훈련 기간을 면제해주는 정관 수술을 왜 총각은 받으면 안 되냐며 교관에게 턱없이 부득부득 대들고, 삼사십 분씩 소변을 보고 온답시고 한 시간 이상씩 출석 점검을 더디게 만들고, 각개 전투 교장에서 외설적인 가사의 < 성냥 공장 아가씨 > 를 불러대 분위기를 얼렁뚱땅 오락판으로 뒤바꿔놓는 이들이 바로 그들이었다."(김소진, '밥풀때기가 살고 있었네', < 그리운 동방 > )

이제는 '길음뉴타운'으로 변한 그곳에 그 밥풀때기들은 아직 살고 있을까. 1963년생 김소진은 다섯 살 때 강원도 철원에서 이사와서 대학교 때까지 길음동 산동네에서 살았다. "여태껏 나를 지탱해왔던 기억, 그 기억을 지탱해온 육체인 산동네"다. 그 기억과 육체는 내내 그의 소설을 지배했다. 등단작 < 쥐잡기 > 와 마지막 발표작 < 눈사람 속의 검은 항아리 > 에 모두 길음동 산동네가 등장한다. 대표작인 연작소설 < 장석조네 사람들 > 도 산동네의 그 밥풀때기들 이야기다. 장석조네는 "한 지붕 아래 아홉 개의 방이 한 일자로 늘어서 있어 동네 사람들이 기찻집이라고 부르기도 하는" 집이다. 겨울에는 파놓은 고랑 앞으로 아홉 집 아이들이 만든 눈사람이 줄을 서고 사시사철 아침에는 유일한 변소 앞에 사타구니가 배배 꼬인 사람들이 오금을 접고 나앉는다. 끝방에는 양은장수 김씨가 산다. 늙은 목수 오영감이랑 같이 살던 성금 어메랑 바람이 났다고 말이 돈다. 어느 저녁나절에 자루에다 '김나는 것'을 들고 와서 오영감에게 배달했는데 들춰보니 성금 어메다. 새살림 차린 성금 어메를 찾아 보쌈해다준 것이다. "거짓말, 좀도둑질, 쌍소리, 깡다구 부리기, 가출, 어른들의 술주정, 마누라 두들겨패기, 젓가락 장단, 자포자기한 울부짖음들"('밥풀때기가 살고 있었네')이 서린 이곳의 이야기는 반은 손끝이 저릿하게 슬프고 거개가 돌연하게 비극적이다. 둘째 방 전기공(電工·겐짱) 박씨는 마누라가 동생과 바람이 난 줄 오해하고, 들리는 말에 의하면 바닷물에 퐁당 빠져죽었다고 한다. 오른손 엄지 둘째 마디에 닭발가락처럼 붙은 여섯째 손가락에서 괴력이 나오는 육손이 강광수 형은 '백골단'이 되어 대학생 주인공과 만나고 행려병자로 마지막을 맞는다.

김소진은 길음동 산동네에서 몇 집 건너 두 번 이사했는데, 대학교 시절의 주소는 '1269-222번지'라고 돼 있다. 그의 집은 어디인가. 재개발 중인 길음동은 1997년 < 21세기 문학 > 봄호에 발표한 마지막 소설 < 눈사람 속의 검은 항아리 > 에 등장한다. 살았던 집을 찾아가는 과정을 그린 이 소설은 그 집의 위치를 가늠하는 좋은 텍스트다. 결혼하고 경기도 일산으로 이사해 살던 민홍은 경의선 기차를 타고 나와 신촌에서 미아리행 버스를 탄다. 기습 한파에 언 보일러 수리비를 달라고 미아리 셋집 사람이 보채서다. 어머니는 재개발 지역에 낀 집을 언제 팔면 좋을지 정보도 알아봐줬으면 한다. 민홍은 길음초등학교 담벼락을 끼고 마을버스 종점인 콘크리트 물탱크 밑 '차부'까지 올라갔다가 임마누엘교회 하나와 구멍가게 한 채를 빼놓고 이미 철거가 다 끝난 폐허를 본다. 그래도 골목길이 호젓한 산길처럼 서로 얽히고설켜 있는 게 보였다. 내려오다 예전 88이발관 자리에서 고기 구워 낮술 먹는 알 만한 얼굴을 만난다. "옛날 침례교회 밑"의 기찻집을 찾아가보지만 '개조심'이라고 쓰여 있어 들어가지 못한다. 외관도 지붕이 바뀌고 마당 쪽에 집을 새로 지은 게 달라졌다.

누군가를 쫓아내야 들어오는 제로섬

시절은 가파르게 흐른다. 김소진의 지기인 문학평론가 정홍수가 그의 발자취를 더듬어 찾아갔을 때는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있었다('기억의 성소', < 소진의 기억 > ). 정 평론가는 길음시장 어름에서 살았고 김소진의 산동네 집에서 '김소진판 우리말사전'을 본 기억이 있다. 1997년 봄 김소진이 죽은 뒤 여름에 방문했을 때 '미아리 셋집'(김소진의 마지막 집)은 문이 닫혀 있었다고 한다. 8년이 지난 2005년에는 '길음 ○지구 재개발아파트'라는 플래카드와 함께 높이 올라가는 아파트만을 목격한다. 어쨌든 아파트 숲 사이로 산동네의 낮고 작은 집들이 일부 남아 있었다. 김소진 아버지가 중풍으로 쓰러진 다음날 찾았던 신풍의원도 그 자리에 있음을 확인한다.

2010년에는 싹 쓸었다. 산동네 집을 솎아내고 다진 뒤에 아파트를 얹었다. 얽히고설켰던 길도 하천도 도랑도 없다. 로터리가 생기기도 전인 1988년에 입주를 시작했다는 돌산 옆의 신안파크아파트의 한 주민은 민홍(김소진)이 뒷골목을 헤맸던 인수교회는 새생명교회로 바뀌고 건물을 올렸노라 했다. 신풍의원은 삼양로 쪽 빵집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고 했다. 고층건물의 새생명교회는 눈에 안 띌 수 없었으나 신풍의원은 찾지 못했다. 88이발관도 없다.

길음동 동사무소에서도 1269-222번지를 확인할 수 없었다. 개발 이전 지번과 지금 지번을 맞춰보면 될 터나 그마저도 어렵다고 했다. 비교해봐도 모를 거라고 했다. 길들이 죄다 바뀌어서다. 다만 김태수 민원계장이 1269번지 일대라면 대림아파트 4단지 쪽일 거라고 했다.

서울학연구소·서울시사편찬위원회·서울시정개발연구원·서울역사박물관은 2009년 길음뉴타운의 역사를 < 길음동 > 이라는 책으로 펴냈다. 책에는 대림아파트 4단지에 수용된 곳을 1270번지 일대라고 적어놓았다. "4구역/ 길음2동 1270번지 일대/ 사업면적 9만1728㎡"이라고 표로 정리돼 있다.

집은 없어져도 그 밥풀때기들은 여기 살고 있을까. 통계는 아마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길음뉴타운의 재정착률은 17.1%. 애초 재정착률을 높이는 게 이 지역 재개발의 첫째 목적이었다고 하는데, 이렇게 재정착률이 낮은 이유는 길음역 주변의 아파트단지를 한번 휘둘러보면 대번에 알 수 있다. 최근 새로 찍은 아파트 광고에 나올 것같이 건물이 번듯하다. 한가롭게 인공 숲이 우거지고 한쪽으로 폭포도 보인다. 애당초 분양가가 너무 높았다.

부동산에 물으니 대림아파트 분양가(2005년 입주)는 평균 1억7천만원, 밥풀때기들에게 어림도 없다. 최근 입주를 시작한 8단지는 1층의 분양가가 3억500만원이었다고 한다. 대림아파트의 24평 세대는 477세대, 33평은 792세대, 38평은 76세대, 43평은 240세대다. 겉으로 보기에는 길음동 산동네 주민의 기찻집 단칸방, 고작해야 3~4평에 불과했을 방이 평균 33평 아파트로 업그레이드됐다. < 길음동 > 에는 '개발 전 1565가구, 5480명이 개발 뒤 1836가구, 5512명이 됐다'고 기록돼 있다. 가구 수는 17% 늘었으나, 주거 인구는 아주 조금 늘었다(0.6%). 누군가를 쫓아내야 들어올 수 있는 '제로섬'이다. 그 제로섬의 규칙은 '돈'이다.

대신 김소진의 원체험은 '가난'이다('원체험, 현실 그리고 독자', < 그리운 동방 > ). 김소진은 눈 온 날 변소에 갔다 오는 길에 욕쟁이 함경도 할머니의 짠지 단지를 깨뜨린다. 증거인멸의 가능성도 없게 눈 위에 발자국이 또박또박 나 있다. 그는 단지를 감싸 눈사람을 만들고는 하루 동안 가출을 감행한다. 해 질 녘 집으로 들어서지만 사람들이 평소와 다름이 없다. 눈사람은 중천 해에 녹았고 그의 비행을 알아챘을 이들은 아무 말이 없다( < 눈사람 속의 검은 항아리 > ). 비슷하다. 있던 게 모두 사라지는 일이 벌어졌는데도 지금 사람들은 아무런 내색을 하지 않는다. 다른 것이라면 눈사람은 녹았을 것이나 짠지 단지도 없다는 사실이다. 우리에게 남은 것은 김소진이 되짚어 써준 얇은 책장의 기억뿐이다.

날렵한 베티·투생·세종의 미아리행

길음동은 대표적인 서울의 달동네였다. 드라마 < 엄마가 뿔났다 > 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그 집이 어디라는데요?" "길음동." "거기가 어딘데요?" "아, 있잖아, 미아리에서 돈암동 쪽으로 넘어가서…." "아, 됐어요." 일반인들이 가진 생각이다. "돈암동은 시내, 미아리고개 너머는 미아리는 촌"( < 길음동 > 주민 증언 중)이라고 생각했다. 미아리고개는 몇 번의 복개 공사로 많이 낮아졌다. 지금은 살짝 고개를 들면 정상이 보이지만 예전에는 고개를 높이 들어 바라봐야 했다. 그런 고개나마 6·25 때 서울에서 의정부로 통하는 유일한 길이었다. 북으로 끌려가는 이들을 애를 끊으며(斷腸) 바라본 고개다. "미아리 눈물고개 님이 넘던 이별고개/ 화약연기 앞을 가려 눈 못 뜨고 헤매일 때/ 당신은 철사줄로 두 손 꼭꼭 묶인 채로/ 뒤돌아보고 또 돌아보고 맨발로 절며 절며/ 끌려가신 이 고개여 한 많은 미아리 고개." < 단장의 미아리 고개 > 는 1956년 반야월이 불렀다. 미아리고개 정류장 앞에 있는 아리랑 아트홀에 노래비가 세워져 있다.

고개를 따라 내려오면 오른편으로 드문드문 '철학집'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김소진은 1991년에 데뷔했으나 '낡은' 리얼리즘 소설가였다. 1990년대는 날렵한 소설들이 각광받는 때였다. 김소진의 아내인 함정임도 그러했다. 김소진은 함정임에 대해 이런 말을 한다. "나는 아내, 아니 이 작가의 뒤이은 소설들을 읽을 때마다 그 첫 소설을 읽을 때 느꼈던 현기증을 매번 되풀이했다. 가령 '오래된 항아리'라는 단편의 어느 페이지를 보면 내가 모르는 팝송의 제목이 여섯 곡이나 나온다."

이런 날렵한 소설가 중 한 명이 윤대녕이었다. 단편집 < 은어낚시통신 > (1994)에 실린 'January 9, 1993. 미아리통신'은 장 자크 베네(당시는 '장 자크 베넥스'라고 했다)의 영화 < 베티 블루 37.2 > 의 여주인공 베아트리체 달을 닮은 '베티'와 프랑스 소설가 장 필리프 투생을 닮은 '투생'과 거스름돈으로 받은 동전을 옷이 축 늘어지도록 넣고 다녀 ('순신'이라고 해야 할 것을) '세종'이라 불리는 '나'가 새해를 불어터진 자장면을 먹었을 때처럼 더부룩하게 맞아 딱히 나눌 만한 이야기가 없어 무료해하다가 미아리 점집으로 가는 이야기다. 베티와 투생과 세종의 미아리행은 말하자면 2NE1이 심심하고 심심해서 고무신을 신어보는 것과 비슷했다.

젊은 일행이 겨울비가 내리는 날 찾은 미아리고개에는 흑진주여자운명감정소, 상록수여자철학관, 홍일점여학사역학점술원, 성심여자거북철학원, 확실한희망의메아리, 목련화여자예언의집, 천도화여자점성가, 백암·송학·대산 운명철학관이 서 있다. 옆으로 인도가 푹 꺼져서 미아리고개가 고개였음을 알려주는 듯한 길 옆으로 이 집들은 여전히 서 있다. 이름이 바뀌었으나 '흑진주'는 여전하다. 흑진주여성역학사, 권윤자역학사, 라일락여성철학관, 이화여성철학관, 철원역학운명감정원, 송원이창배철학관, 모란여성거북점, 왕창운명건강이야기, 목련화여성예언가, 은하수여성작명사주역술원, 태양철학관, 계명철학관, 유림운명철학원, 현대예언운명철학, 진심예언가, 김익중철학관, 진화철학관, 백일홍여성역학사…. 소설에서는 골목 안으로도 철학관의 간판이 나열되지만, 현재는 드문드문하다. 철학관은 원래 걷어내고 나면 그냥 가정집이었다. 현재 미아리 점집은 전성기에 비해 20%로 줄었다고 한다. 베티·투생·세종이 마침내 "지금까지 여기를 찾아다닌 것 같은 기분마저" 들어서 점을 보러 들어간 '국화정사숙녀점성가'도 없다. 시위를 주동하다 쫓겨 산으로 들어갔다가 스님한테 사주 보는 법을 배운 기구한 '국화'씨도, 이 간판의 집도 아마 소설일 것이다. 그들이 가장 못 믿는 것은 사주고 그들이 가장 믿는 것은 기구한 운명이었다.

도도한 흐름에서 살아남은 '그 남자네 집'

미아리 점집은 굴다리로 통한다. 굴다리를 건너오면 점집 몇이 점점이 있다. 건너와 오른쪽으로 꺾어 성신여대역 방향으로 걸어가면 태극당이 나온다. 태극당 앞에 '전차 종점터'가 있다. <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 에서 구보가 탄 전차는 동대문에서 '교외'로 가는 열차를 갈아타야 한다. 1939년께 이 전차는 돈암동까지 연결된다. 여기까지가 '시내'라는 표지다. 미아리고개 앞에서 전차는 멈췄다. 전차는 1968년 11월30일자로 철거됐다.

여태껏 남아 있는 것은 도대체 무언가. 박완서의 < 그 남자네 집 > (2004)은 돈암동 단독주택으로 이사한 후배의 집을 보러 갔다가 해방 뒤 이곳에 살았던 기억과 함께 첫사랑을 떠올리는 내용이다. "그 남자네 집은 천주교당 뒤쪽 성북경찰서 옆 양회다리로 통하는 큰 한길가에 있었다. 그 집은 한길에서 한 걸음 물러나 있긴 해도 대로변에 바깥 마당을 끼고 있는 집이었다." 2004년 빨래하던 개천(안감천)도 복개돼 어디가 어딘지 몰라서 찾기를 포기한 자신의 집과 달리, 그 남자네 집을 '나'는 찾아낸다. "내 예상을 뒤엎고 이 시대의 도도한 흐름에서 홀로 초연히 그 남자네 집은 조선기와집으로 남아 있었다."

당시 충신동(종로5가)에 살았던 박완서는 이것을 경험이 많이 들어간 소설이라고 했다. 모델로 한 집이 아직도 남아 있다면, 이 언저리일 것이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 남자네 집' 부근에는 몇 채의 기와집이 남아 있다. (소설에서 묘사한 대로) 골목을 통째로 쓰게 대문이 안쪽으로 들어가 있던 기와집은 안마당이 턱없이 좁고, 영업 안 하는 전파상은 철문이 아니라 아예 짐을 쌓아 문을 막아놓았지만. 어느 집이든 단지 소설일 뿐이든 상관없다. '그 남자네 집'은 남아 있는 집들의 애달픔에 대한 작가의 '안심'이 아니었을까.

■ 길음동~돈암동 문화산책 코스 약 3.5km

서울 지하철 4호선 길음역 7번 출구로 나와 길음메디컬약국 앞에서 마을버스(8번·9번)를 탄다. 마을버스 종점에서 내리면 신안파크아파트다. 옆으로 돌산 올라가는 계단길과 오솔길이 있다. 돌산은 1970년대까지 돌을 캐내던 곳이다. 김소진은 이곳이 항상 "개똥 천지"였다고 한다. 지금은 정자와 체육시설이 있다. 돌산 옆으로 난 길은 북한산 자락으로 통한다. 서경대를 지나 화계사, 대동문으로 갈 수 있다. 버스 종점 길옆으로 난 초등학교 옆 담장을 짚어 걸어 내려온다. 이 길은 강북구와 경계가 된다. 길음동 일대는 1973년 성북구에서 도봉구로 분리돼 미아1, 2, 3동으로 불리다 1975년 강북구가 생기면서 둘로 나뉘었다. 성북구 지역은 길음1, 2…동으로 불리고, 강북구 쪽은 미아1, 2…동으로 불렸다. '미아리텍사스' '미아리고개' 등 부정적 어감에 반감을 가진 강북구 주민은 개명 결의를 했고 2005년 삼양동·송중동·송천동 등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길음초등학교 옆길을 따라 내려오면 대림아파트가 보인다. 가팔랐던 산동네의 흔적은 이 길에만 남아 있다. 길에서 담 사이로 힐끗거리면 아파트가 저 아래쪽으로 내려다보인다. 더 내려와서 길음1동 주민센터 사거리에는 '새생명교회'라고 크게 쓰인 옛 인수교회가 보인다. 몇 안 남은 < 장석조네 사람들 > 의 배경이다. 마을버스에는 여전히 '인수교회'를 정거장 이름으로 붙이고 있다. 이 사거리를 아랫방향으로 흐르는 길이 인수로인데, 예전에 인수천이 흘렀다.

길음역 방향으로 내려와 성신여대 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미아리고개부터 성신여대입구까지 직선 오르막·내리막이다. 오른편으로 '철학관'들이 보이고 도로를 옆에 두고 보도가 내려간다. 성신여대 쪽으로 빠지는 굴다리를 넘어간다. 오른쪽으로 길을 틀면 성신여대 방향이다. 태극당 앞에는 '전차 종점' 표지판이 있다. 더 직진하면 건너편으로 돈암시장이 보인다.

돈암시장 앞을 지나 직진하면 성북경찰서·성북구청이 나타난다. < 그 남자네 집 > 에서 복개돼 흔적이 없다고 한 '안감천변'은 복천이 진행 중이다. "(6·25 때) 남자들은 성북경찰서를 거쳐서 이 세상 사람이 아니게 되었다"는 성북경찰서의 위용은 지금도 압도적이다. 성북경찰서 옆 '양회다리'의 이름은 복원되지 않았다. 경찰서를 바라보고 오른쪽 다리는 보문2교, 왼쪽 다리는 보문1교다. 건너편의 천주교 성당(돈암성당) 옆길로 접어들어보라. 몇 채의 기와집을 만날 수 있다.

구둘래 기자 anyo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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