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자기소개서가 된 여자

2010. 10. 15.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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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현시원의 너의 의미] 줄줄이 칸칸이 이력서

이번 주에는 호박 나이트를 홍보하는 호박 차 퍼레이드를 세 번이나 보았다. 차 위에 거대한 플라스틱 호박이 덩그러니 매달린 채 거리를 질주하는 모습이었다. '스스로 호박이 된 차'를 생각하며 집에 들어왔는데, 텔레비전의 해외토픽 뉴스가 시선을 끌었다. 저 멀리 지구 한편에서는 흑인 여성이 수백 번 자기소개서를 썼는 데도 취업하지 못해 제 몸통만 한 크기로 자기소개서를 출력해 몸에 휘감고 있었다. 등과 배에 흰 종이를 붙이고 무표정하게 거리를 걷는 장면은 <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 에 나오는 카드 병정처럼 우스꽝스러웠다. 하지만 거리에 서 있는 여인은 '저항'과 '홍보'의 중간 어디쯤에서 끊임없이 '나'를 말하는 우리의 자화상이었다. 자기 자신이 아닌 '홍보 패널' 자체가 되는 모습이야말로 오늘날 기가 빠져버린 돈키호테 아닐까. 해외토픽이 될 만큼 엉뚱한 행동을 했지만, 그가 원하는 종착지는 망상의 세계가 아닌 가장 현실적인 취업이니까.

나, 그리고 당신도 한번쯤 자기소개서를 써본 적이 있을 것이다. 자기소개서 양식으로 통용되는 문서는 인터넷에서 무료로 다운받을 수 있을 만큼 희소가치가 없다. 이력서, 자기소개서, 가슴에 붙이는 수험서는 모두 초등학교 때 처음 만난, 줄줄이 칸칸이 토막 난 받아쓰기 노트처럼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는 뿌리 깊은 시각적 형태다. 방에서 은밀하게 꺼내보는 사각형 문서 안에는 줄과 사각형뿐이다. 수직과 수평으로 나뉜 칸마다 수사가 빠진 건조한 정보들이 채워진다. 얼굴 사진은 문서 가장자리 네모난 칸에 올라오고, 연속성을 찾을 수 없는 지그재그 행동은 연대기 순으로 한눈에 들어오게 정렬된다.

자기소개서는 일종의 그래픽 디자인이다. 그래픽 디자인은 늘 그래왔듯이 세상의 효율성을 위해서 질서를 구축한다. 그래픽 디자인은 산업국가의 문화와 경제의 일부로, 개인의 들쑥날쑥하고 불확실한 성정과 사건을 한 장의 종이로 정리한다. 공백의 자기소개서를 채우는 글은 미래의 심사위원에게 보이기를 원한다는 점에서 모두 미래로 가는 말이다.

자기소개서는 냉혹한 심판대에 올라야 한다는 점에서 사적 감정의 물기를 쫙 뺀 건조한 디자인이지만, 시선을 돌리면 한 인간을 조망하는 다른 노력도 있다. 미국의 그래픽 디자이너 워렌 레러가 디자인한 < 찰리 > 라는 문고판 책은 입체적인 한 사람을 경쾌하게 그려냈다. 워렌 레러는 정신질환을 앓은 천재 음악가 찰스 랭을 '찰리'라 칭하며 책의 내용을 직접 꾸미고 디자인 했다. 책에는 찰스 랭의 이야기와 이미지가 '가장 그 사람 다운' 방식으로 담겨 있다. 책의 날씬한 규격은 찰스라는 남자의 신체 크기를 반영했고, 음악가인 찰스의 느낌이 풍기는 서체가 페이지마다 역동적으로 배열되어 있다. 이 책을 포함한 네 남자에 관한 시리즈의 제목은 < 초상 연작 > 이다.

누군가의 독특함과 고유함을 기다려주는 자기소개서 양식은 어떤 모습일까. 미래파의 매력적인 그래픽 디자인처럼 글자 크기를 다르게 하고 사진을 콜라주하듯 오려 붙이면서 자신을 소개할 수 없을까.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사람이 딱딱한 자기소개서를 쓰고 있지만, 한편에서는 누군가 자기소개서 위에 무심한 빨간 줄과 이기적인 연필심을 긋고 있다. 문서 위에 연필로 '누구 조카'임을 명시하는 행위로 자기소개서 양식을 기꺼이 파괴한, 이재오 특임장관 조카의 자기소개서에 관해 떠도는 이야기 말이다.

현시원 독립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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