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건축가 임형남·노은주의 키워드로 읽는 건축과사회] <16>지식의 미궁

2010. 9. 1. 1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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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로 같은 香壇…조선 성리학 대가 '철학'을 가두다

율리시스, 오랜 항해를 시작하다

1979년의 어느 날 집집이 찾아다니며 전집을 판매하는 외판원이 억지로 우리 집에 떠맡기고 간 문학전집 중에서, 표지에 그냥 한글로 '율리시스'라고 아주 쿨하게 적힌 책이 있었다. 율리시스(Ulysses)라면 그리스 시대에 트로이전쟁을 수행하고 고향에 돌아오는 길에 온갖 고초를 겪는 그 장군 이야기? 그 정도의 상식을 가지고 책장을 들춰보았는데 정작 내용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주변에 문학에 조예가 깊은 사람에게 물어보았다. 그 사람은 내게 그 소설은 세상에서 제일 난해한 책이라고 이야기해주며 내용도 설명을 해주긴 했는데 도통 무슨 말인지 알아듣기가 힘들었다. 그럼에도 나는 순전히 객기로 "세상에서 제일"이란 말에 혹해서 읽기 시작했다.

객기와 패기를 대책 없이 섞어 난폭하게 읽어보았지만 (당연히) 무슨 말인지도 모르겠고 해서 정음문고에서 나온 '조이스평전'이라는 얇은 문고판 책을 한 권 사서 읽기 시작했다(삼중당문고니 정음문고니 을유당문고니 하던 읽기도, 가지고 다니기도, 가격도 편안했던 그 책들 다 어디 갔을까).

그 평전은 나와 같은 사람들을 위해 만든 책이었으므로 무슨 내용인지는 대강 알 것 같았다. 그러나 다시 책을 펼치면 읽히지 않아 괴로워했는데, 그 책이 어느 날 홀연히 집을 떠났다. 책이 떠난 것인지 내가 떠나보낸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초록색과 소라색의 중간 정도의 애매한 색을 가진 두툼한 그 책은 없어졌다.

조이스는 아일랜드에서 태어나서 평생 스위스와 파리 등 이곳저곳을 떠돌며 아일랜드와 더블린에서 사는 사람들, 아니 그 공간을 배경으로 조이스 자신의 내면을 그린 소설을 썼다. 특히 그의 소설은 '의식의 흐름'이라는 기법으로 인간의 내면을 독특하게 표현하였는데 그런 경향으로 말미암아 그의 소설은 난해하기가 세상에서 제일이다. 나는 다만 "더블린의 끝에 가고 싶다고 했다던가…." 다른 것은 잘 모르겠지만 그 말이 참 멋있어서 아주 많이 써먹는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대 김종건 교수가 30대 초반에 시작하여 지금까지 평생 조이스 소설을 번역하고 있다고 한다. 처음 시작한 것이 1960년이었다니 올해로 50년째 율리시스와 조이스 문학을 파고 있다.

◇조선의 대학자 회재 이언적이 철학의 미궁을 쌓아 만든 양동마을의 '향단'

얼마 전 신문에서 봤는데 처음 보았을 때보다 많이 늙어보였다. 율리시스보다 더 난해한 '피네건의 경야'도 어느 정도 번역했다고 한다. 훌륭한 분이다. 아무튼 나는 그 책을 다 읽지 못한 모든 책임을 출판사에 뒤집어씌웠다. 그 책이 우선은 세로쓰기였고 무엇보다도 번역이 조금 난삽하여 그리 된 것이고, 언젠가는 다시 읽으리라 오랫동안 벼르고 있었다. 얼마 전 아는 이와 이런저런 책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생각이 나서, 불현듯 잊혔던 옛사랑의 기억을 더듬듯 아련해져서 몇 년 전, 말하자면 가장 최근에(3년 전) 나온 1340쪽짜리 책을 하나 샀다.

이 정도 부피는 우리 집에 있는 책 중에서 가장 두꺼운 축에 든다. 동녘출판사에서 펴낸 잘 읽지는 않지만 보기만 해도 마음이 든든한 큰아들 같은 철학대사전과 맞먹는 덩치의 책이다. 엄청난 각주(4000개)와 해설과 자료 사진이 너무나도 친절하게 마치 된장국에 풋고추 놓고 먹던 밥상 대신 12첩 반상을 받는 느낌이랄까. 맛은 잘 모르겠지만 무척 식욕을 돋워주고, 아울러 우리가 좋아하는 '품위' 있는, 아니 폼 나는 책이었다.

지식이라는 미궁에 스스로를 가두다

'율리시스'는 제임스 조이스가 무려 8년 동안 쓴 한 편의 소설이다. 레오폴드 블룸이라는 유대계이며 광고 알선업을 하고 있고 예전에 도살장에서 잠시 일하다가 어떤 목축업자에게 입을 삐죽거렸다는 이유로 쫓겨난 그리고 오쟁이 진, 영어로는 'cuckold' 즉 사내구실을 하지 못하는 더블린 사람의 18시간 동안, 1904년 6월16일 오전 8시부터 6월17일 오전 2시까지의 일상이다(아일랜드에서는 매년 6월16일을 '블룸스데이'로 지정하고 화려하고 의미 있는 행사를 거행한다고 한다).

별다른 사건이 있는 것도 아니고 딱히 눈을 떼지 못하게 하는 이야기가 있는 것도 아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밥 차려 먹고 출근하고 중간에 장례식에 참석하고 점심 먹고 사람들을 만나고 해변을 잠시 거닐다가 술 취한 어떤 젊은이(또 다른 주인공)를 구해주고 집에 돌아와서 아내에게 하루를 이야기하곤 잠이 드는…, 그리고 아내 몰리의 쉼표 하나 없는 기나긴 독백(70쪽 분량)으로 끝나는 그냥 우주 안의 하루이고, 그냥 우주에 속해 있는 한 존재의 이야기이다.

그런데 그 안에는 단어와 문장이 가득하다. 그리고 생각으로 가득하다. 생각들이 가로 세로 대각선으로 통행하게 만든 건널목처럼 정신없이 건너다닌다. 마치 우주 안에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먼지보다 더 작은 존재 안에는 우주보다도 더욱 거대한 우주가 들어있다는 황당하고 우주적인 스케일의 허풍을 듣는 것 같고, 액자 안에 소녀가 사진을 한 장 들고 있는데 그 사진에는 사진을 든 소녀가 나오고 그 안에는 다시 사진을 들고 있는 소녀가 무한히 계속 나오는 그림을 보는 것 같다.

대강 그런 것이 이미지의 미궁, 지식의 미궁, 인식의 미궁…, 그런 것 아니겠는가. 그 평범한 사람과 그 평범한 사람의 아내 몰리, 그리고 스티븐 디덜러스라고 하는 '젊은 예술가의 초상'에서 조이스의 청년시절을 보여주었던 바로 그 청년이 시간적으로는 동시에, 이야기 속에서는 이어서 나온다. 그러면서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를 더블린의 블룸의 동선과 평행하게 놓고 이야기를 펼쳐나간다. 그 위에 성경과 그리스 로마신화, 셰익스피어를 비롯해서 총 망라된 서구의 정신사와 신학이 마치 간이 충분히 밴 갈빗살처럼 올려지고 그 위에 평생 조이스가 더블린에서 만났던 모든 사람과 사건이 뿌려진다. 그래서 읽기는 하지만 도무지…, 마치 미궁에서 헤매는 것 같다.

◇'향단'의 내부 전경.

건축가이며 공예가이며 또한 지식인의 표상인 명장 다이달로스(Daidalos)는 자기보다 잘난 사람을 못 보는 편협한 성격으로, 철저히 지식인 아니 지식 기술자의 표상이다. 결국 크레타 섬으로 쫓겨 와서는 사람 몸에 소의 머리를 가진 괴물 미노타우로스(Minotauros)를 가둘 수 있는 미궁을 만든다. 미노스왕을 위해 미궁을 만들었지만 사실 미노타우로스가 생겨나는 계기도 다이달로스가 제공한 것이었다.

포세이돈이 약속을 저버린 미노스를 골탕먹이려고 짠 계략에 빠진 미노스의 부인 파시파에를 '잘난 황소'에게 접근하게 하여준 것도 다이달로스의 멋진 솜씨였으니까. 더군다나 다이달로스는 미노타우로스를 잡으러 들어가는 테세우스가 성공적으로 임무를 완수하게 도와주기까지 한다.

다이달로스는 병도 주고 약도 주다가 결국 자신도 비참하게 갇히게 된다(역시 불러주면 누구에게든 어디든 가는 지식인의 슬픈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같이 갇힌 아들 이카로스(Icaros)에게 날개를 달아주었으나, 너무 높게도 너무 낮게도 날지 말라고 말한 아버지의 경고를 듣지 않고 태양을 궁금히 여긴 이카로스는 태양에 접근했다가 날개를 붙인 촛농이 녹아서 떨어져 죽는다. 아무도 풀지 못할 미궁을 만들었던 다이달로스는 스스로 지식이라는 미궁에 빠져서 나오지 못한다.

김종건 교수는 1960년 이 책을 처음 만나 번역을 시작하여 1968년에 정음사에서 첫 번역본을 만들고, 20년 후 범우사를 통해 많은 부분을 고치고 바르게 펴서 다시 내고, 다시 20년 후에 생각의나무에서 또다시 더욱 정교하게 다듬은 책을 만들었다고 한다.

김 교수는 조이스가 32살 때부터 40살까지 쓴 책을 50년 동안 연구하는 셈이다. 김 교수야말로 조이스가 만들어놓은 미궁에 갇혀 있다. 그러나 사실은 김종건 교수를 가둔 것은 조이스가 아니라 김종건 교수 자신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지식인은 흔히 자신을 스스로 가두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지식이라는 것의 매력이 바로 그 미로 속 같은 복잡함과 빠져나올 수 없는 막막함과 더불어 그 복잡하고도 미묘함에 있기 때문에…, 결국 그는 다이달로스이며 미노타우로스이며 결국은 실을 되짚어 나오는 테세우스가 되지 않을까. 모든 것은 스스로가 원인이며 스스로가 결과이다.

철학을 가둔 미궁, 향단

얼마 전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에 등록된 경주의 양동마을, 그 들머리에 둥실 떠있는, 아니 언덕 위에 높이 올려져 있는 집 한 채가 있다. '향단'이라고, 춘향이 몸종 향단이가 아니고 향나무가 있는 집이라 향단이다.

이 집은 한훤당 김굉필, 일두 정여창, 정암 조광조, 퇴계 이황과 더불어 '동방오현'으로 불리는 조선 초기의 대학자 회재 이언적(李彦迪·1491∼1553)이 어머니와, 또는 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착한 동생 이언괄을 위해 경상감사 재직 시에 주상(중종)의 재료지원을 받으며 직접 지은 집으로 전해진다.

◇건축가이자 공예가이며 또한 지식인의 표상인 명장 다이달로스가 만든 크레타섬의 미궁과 괴물 미노타우로스를 죽이러 온 테세우스.

그런데 이 집은 참으로 묘한 집이다. 무슨 집이…, 들어가는 곳도 애매하고, 마당도 애매하고 방도 애매해 도무지 알 수 없는 집이다. 우리가 아는 상식을 깬다. 겉모양은 동네 제일 높은 언덕에 행세깨나 하는 부자나 높은 관리가 당시 잘나가는 건축가에게 의뢰해서 지어놓은 돈으로 바른 저택 같이 보이기도 하지만 들어가면 돈으로 바른 집이 아니다. 내가 보기에는 생각으로 바른 집이다. 아마 그 생각이 맞을 게다.

경사를 올라 왼쪽으로 방향을 돌리면 높은 대문이 나오고 대문을 들어서면 긴 행랑채가 담벼락처럼 앞을 막아선다. 담벼락 오른쪽에 빠끔히 문이 있긴 하지만 당최 그 문이 들어가는 문으로 보이지 않는다. 높고 고고하게 내려다보는 저런 문은 해인사 경판고나 태안사 혜철 스님 부도로 올라갈 때나 보이는 건데 뭘 경배하라는 강력한 사인 같기도 하다.

그래서 진로를 대폭 수정해서 담처럼 막은 행랑채를 앞에 두고 고민한다. 왼쪽은 부엌으로 들어가는 방향이고 오른쪽은 사랑채로 들어가게 된다. 일단 왼쪽으로 들어가면 부엌채에 딸린 2층 고방 아래 기둥만 무성한 공간을 만나게 된다. 마치 큰 동물의 몸통 아래로 들어가는 것 같다. 아스라이 행랑채와 본채 사이의 좁은 통로가 보이고 오른쪽으로 부엌마당이 보인다. 부엌마당은 낙숫물에 팬 땅처럼 우묵하게 생겼고 크기는 꼭 펼쳐놓은 손수건만 하다. 넓이의 느낌은 소거된 채 깊이만 있는 곳 같다.

하긴 향단에 들어오면서 계속 느껴지는 감각이란 점점 사라지는 넓이에 대한 감각과 마치 비 맞은 식물처럼 또렷한 깊이에 대한 감각이다. 좁은 틈으로 안채가 보인다. 역시 그 틈은 무척 깊다. 기껏해야 부속채와 안채의 방 한 칸 사이로 생긴 틈인데 무척 깊다. 좁은 틈을 따라 들어가면 다시 부엌마당과 쌍둥이처럼 닮은 안채마당이 나온다. 지붕 사이로 열린 눈곱만 한 하늘이 인색하기 그지없게 보인다.

그리고 대청마루와 안방이 있다. 이 집의 중심이자 모든 동선의 종결점인 안채의 공간에 이르게 된다. 마치 긴 여행 끝에 도착하는 깊은 동굴 안에 마련된 지성소처럼 안채가 나온다. 어렵게 향단의 대청에 들면 넓지 않은 마루가 길게 앞을 막아선 행랑채와 평행하게 펼쳐진다. 그리고 서도 앉아도 앞은 보이지 않는다. 전면의 아래 반은 행랑채의 정연하고 반복적인 지붕기와의 패턴이, 위로 반은 쾌활하고 텅 빈 하늘이 채우고 있다. 그뿐이다.

우리의 옛집에서 대청은 구성상 그 집의 중심 역할을 수행한다. 이는 상징적이기도 하지만 실질적이기도 하다. 제사가 치러지고 한 해의 수확을 펼쳐서 볼 수도 있는 공간이다. 그래서 앞에는 늘 넓지 않더라도 반듯한 마당이 있고 그 안은 넓기도 하고 깊기도 하며 앞과 뒤가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향단에서는 그런 것은 안중에도 없다. 일단 접근 자체가 뒤로 돌아서 들어가게 되어 있고, 앞에는 마당도 없고 시선도 없다. 앞으로 들어가며 깊어지는 집이 아니라 집을 에둘러서 빙 돌아가면서 깊어지는 집이다. 대청은 집의 중심을 향해 나선형으로 구성된 각 공간들의 최종 종점이며 옴파로스(Omphalos)이다. 왜 이럴까?

이언적의 본명은 이적이다. 그에게 중종이 선비 언(諺)자를 하사하여 이언적이 되었다. 이언적은 10살 때 아버지 이번을 여의고 삼촌인 우재 손중돈에 의해 키워진다. 손중돈은 어린 이언적에게 학문이라는 필생의 '의미'를 부여해준다. 이언적은 열심히 자라나서 학문을 완성하고 우리나라 성리학의 기초를 만든다. 그는 마치 건축가가 집을 짓듯이 학문을 차근차근 쌓아올리고 담을 치고 방을 만들어서 비로소 조선의 사림(士林)이 나머지 시대를 통치할 수 있는 견고한 이론적인 성채를 완공한다.

이언적이 추구한 것은 세상을 움직이는 관념의 실체이다. 관념에 의해 실체가 형성된다. 이상 혹은 본질, 결국 이(理)가 현상이며 실존인 기(氣)를 생산하고 통제한다. 관념은 개념으로 만들어지며 개념은 이름 지어진 본질 그 자체이다.

결국 그런 이야기이다. 모든 것은 이름으로 존재하고, 의미로 존재한다. 그는 아주 철저하고 치밀한 건축가였다. 건축이란 것이 그런 것 아니겠는가? 세우는 것(建)은 이야기이고, 쌓는(築) 것은 시간일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세워놓은 이야기와 쌓아놓은 시간의 맥락이나 뿌리를 알지 못하면서 이 집 참 이상하다든가, 이 집이 참 좋다든가 하는 것이 합당한 일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다만 추정을 해 볼 뿐이다. 자신이 평생 갈고 다듬어놓은 학문과 그 안에서 살아갈 그의 어머니와 양동마을이라는 장소를 엮어서 만들어낸 독특하고도 깊은 이언적이 만든 철학의 미궁 안에서.

가온건축 공동대표·'서울풍경화첩' 공동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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