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결혼정보회사 등급표의 망령/김태성 한국결혼산업연구소 소장

김태성 2010. 8. 29. 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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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사라졌던 미혼남녀의 직업 등급표가 최근 다시 등장해 논란이 되고 있다. 8∼9년 전쯤 한 결혼정보회사에서 유출됐던 것이라는데 망령처럼 부활(?)해 결혼을 앞둔 젊은이들에게 좌절감과 분노를 자아내고 있다.

며칠 전 한 일간지에는 결혼을 통해 극적으로 '팔자'를 바꾸는 일은 더 이상 힘든 시대라는 요지의 기사와 함께 결혼정보회사의 등급표라는 게 인쇄돼 나왔다. 친절하게도 신랑신붓감 구분해서 아주 큼지막하게 보도됐고, 표 제목은 '한 결혼정보회사의 직업별 등급'으로 독자들의 눈길을 끌게 했다.

기사 보도 후 인터넷에는 '조건 보고 계급 나누고 배우자 선택하는 건 진짜 정신이상이 걸린 사회의 표상' 등과 같은 항의성 댓글이 수없이 올라왔다. 일부 네티즌은 '답답하다, 이런 현실이' '걱정이다. 결혼이나 할 수 있을까' 등 좌절감을 표시하기도 했고 '사람이 무슨 도축장 쇠고기, 돼지고기냐'란 과격한 표현도 있었다.

이와 관련해 동종업계 듀오의 김혜정 대표는 한 일간지와 인터뷰에서 "8∼9년 전 인터넷에 떠돌던 출처 불명의 등급표가 어느 순간 듀오의 등급표로 바뀌어 있었다"며 곤혹스러워 했다. 등급표의 출처에 대해선 '노이즈마케팅' 일환으로 한 결혼정보업체에서 흘린 것이란 의견도 있다.

결혼정보 등급표의 망령에 대해 가볍게 넘겨서는 안 되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결혼정보회사 레드힐스 김일섭 부사장은 "기성세대가 만들어 낸 터무니없는 허상이 결혼을 앞둔 젊은 세대를 좌절과 결혼 냉소주의에 빠지게 할 우려가 있으며 업계 전체에도 결코 도움이 되질 않는다"고 말했다.

가뜩이나 결혼하지 않는 사회다. 혼인율이 해마다 떨어지고 있다. 2007년 이후 해마다 2만∼3만건씩 줄고 있다. 혼인하는 나이도 점점 늦어지고 있다. 당연히 출산연령도 후퇴하면서 출산율이 떨어지고 나아가 인구정책 전반이 타격을 받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한 결혼정보업체'가 만들어 낸 등급표가 주는 사회적 파장은 만만치 않을 수 있다는 지적이다. 일반 중소기업 정규직이 남성 최하등급인 15등급이라면 자영업자나 비정규직 종사자들의 비애감은 얼마나 클까. 1∼15등급에 포함되지 않는 직업군들의 자죄감과 냉소는 또 어떨까.

등급표를 접한 이들의 첫 생각은 과연 무얼까. 긍정적일까 아니면 부정적일까. 등급에 포함된 그들을 부러워할까 아니면 자신의 처지를 비관할까. 결혼은 등급에 포함된 사람만 누리는 특권인가.

그렇다고 이들이 결혼할 수 없는 사람들일까. 결혼정보회사는 특별한 사람들만 가입하는 곳일까.

여러 생각이 겹칠 것이다. 그리고 결국에는 '결혼은 해서 뭣하나'란 냉소주의와 염세주의가 이들을 지배할 우려가 크다. 모든 게 허상으로 인해 벌어질, 개연성이 높은 현실이다.

하지만 관련업체들이 누누이 강조해 왔지만 결혼정보회사에는 등급표가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 그것을 가지고 있는 업체가 있다면 떳떳하게 공개하는 건 어떨지 모르겠다.

결혼은 남성과 여성이 다양한 조건 아래 만나 사랑의 감정을 싹틔우면서 사회 구성단위의 기초인 가정을 꾸리는 극히 '인간적인 행위'다. 가정은 인구를 생산하고 교육해서 사회를 영속시키는 중요한 모태가 된다. 이런 행위를 애초에 등급으로 규정할 순 없다.

결혼정보회사는 가정을 이끌 수 있는 최소의 능력만 있으면 누구나 가입이 가능하다. 회사는 이들 개인의 선호도를 충분히 파악한 후 만남을 주선한다. 이때 회사가 일방적으로 만남을 정하는 것이 아니라 당사자들이 모두 동의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등급표가 있어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는 것이다. 등급표의 망령이 이젠 영원히 사라졌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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