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엽서로 조선침략을 미화할 순 없다

2010. 8. 12. 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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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ekly경향」은 강제병합 100년을 맞아 일본이 병합조약 체결을 기념하기 위해 발행한 엽서를 공개한다. 병합 기념엽서의 존재는 이미 학계에 잘 알려져 있고 언론에도 드물게 일부가 공개된 적이 있다. 그러나 이번에 공개하는 엽서는 언론에 처음으로 소개되는 것들로, 모두 29장이다.사진과 그림, 각종 문양으로 치장된 이 엽서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병합의 정당성을 선전하고 미화하고 있다. 최장근 대구대 역사학과 교수는 "일본이 강제병합을 통해 영토를 넓혔다는 점, 강제적인 조약이 아니라 동등한 입장에서 맺은 것이라는 점, 강제병합이 동양 평화를 위한 일이었다는 점 등을 선전하려는 의도가 여실히 드러나 있다"면서 "특히 지도가 표시된 엽서는 강제병합이 영토 확장 차원에서 이뤄졌음을 명확히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했다.박한용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실장은 "이 자료들은 일본제국의 조선 통치를 시각적이고 입체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평가했다.「Weekly경향」은 엽서 이외에도 당시 조선을 바라보는 일본의 시각을 알 수 있는 자료들을 함께 공개한다. 한일병합 당시 일본의 한 음악출판사에서 발행한 '한일병합' 창가집, 일본 신문 삽지, 조선과 일본 양국의 강제병합 주역들의 사진이 합성된 대형 액자그림, 영국과 미국 신문에 실린 기사와 카툰 등이 그것들이다. 식민지 시기 창가를 연구해온 민경찬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는 "병합조약 체결일자에 맞추어 발행된 창가집은 일본이 강제병합을 얼마나 치밀하게 준비했는지 보여주는 자료"라면서 "우리 음악계에는 그 존재조차 알려져 있지 않았던 자료"라고 말했다.엽서를 포함한 모든 자료는 미술사학자인 이돈수 한국해연구소장의 개인 소장품으로, 이 소장의 동의를 받아 공개하는 것임을 밝힌다.(박스 기사 참조) <편집자 주>

사진1

에 나와 있는 엽서의 우측 하단을 보면 '일한합방 기념'이라는 글자 아래로 발행일이 명시돼 있다. 명치사십삼년팔월이십구일. 병합조약이 공포된 1910년 8월 29일이다. 그 아래로는 영어로 '한국 병합 기념'이라고 쓰여 있다. 병합을 국제적으로도 선전하려 했던 것이다.

엽서를 보면 일본을 뜻하는 붉은 태양에서 뻗어나온 여러 갈래의 햇살이 조선 궁궐(경복궁?)을 비추고 있다. 오른쪽 상단의 사진은 1905년 일본의 조선 지배를 인정한 가쓰라-태프트 밀약의 주인공으로 강제병합 당시 일본 총리대신이었던 가쓰라 다로, 왼쪽 하단의 인물은 일본 육군대신 출신으로 병합을 실행한 주역인 당시 조선 통감 데라우치 마사타케다. 가쓰라 다로 아래 지구본에는 일본과 조선의 영토가 붉은 색으로 표시돼 있다. 이는 조선이 일본의 새 영토가 되었음을 과시하는 것이다.

사진2

는 도안이 흥미롭다. 사각 액자 안에 있는 것은 병합조약 전문이다. 액자에 걸쳐 있는 것은 태극기의 태극문양이다. 태극문양 안에는 조선 궁궐의 사진이 들어가 있다. 태극문양 위로는 독수리를 닮은 새가 날개를 펼치고 있다. 박한용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실장은 "형태로 미루어 이 새는 일본을 상징하는 매인 금치인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일본이 조선을 지배하게 됐음을 뜻하는 것이다.

사진3

에는 당시 일본과 조선의 황제가 등장한다. 위에 있는 인물이 일본 메이지 천황, 아래는 조선의 순종 황제다. 상하관계를 명확히 표시했고, 메이지 천황 옆에는 일본 황실을 상징하는 새가 긴 꼬리를 드리우고 있다. 형태로 보아 이 또한 금치인 것으로 추정된다.

사진4

는 활짝 펼쳐진 공작새의 깃털 좌우로 순종과 메이지 천황이 서로 대등한 구도로 배치돼 있다. 병합이 동등한 조건에서 이뤄진 경사스러운 일이라는 점을 강조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사진5의 구도도 비슷한데, 왼쪽은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인 영친왕이며 오른쪽은 후에 1912년 메이지 천황이 죽은 후 왕위를 계승한 요시히토 천황(다이쇼 천황)인 것으로 보인다.

사진6

은 강제병합을 주도한 일본측 대표 인물 두 명의 사진이 나란히 실려 있는 엽서다. 오른쪽은 1909년 안중근 의사의 저격을 받아 사망한 이토 히로부미, 왼쪽은 병합 당시 조선 통감이자 병합 후 초대 조선 총독이 된 데라우치 마사타케다.

사진7

에는 경술국적 이완용이 등장한다. 엽서 오른쪽에 있는 데라우치 마사타케와 이완용은 각기 일본 천황과 조선 황제로부터 권한을 위임받아 병합조약문에 서명했다. 병합조약은 공식적으로는 1910년 8월 29일 체결된 것으로 돼 있지만, 실제로 이완용이 데라우치 통감을 만나 조문에 조인한 것은 이보다 일주일 전인 8월 22일이다. 8월 29일은 순종 황제의 옥새를 날인하고 조약을 포고한 날이다.

사진8

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왼쪽부터 이토 히로부미, 이완용, 순종, 데라우치 마사타케다. 인물 배치가 흥미롭다. 왼쪽과 오른쪽에 각기 조선과 일본 인사 한 명씩을 쌍으로 배치해 균형을 맞췄다. 왼쪽에는 이토 히로부미와 이완용이 한 쌍을 이루고, 오른쪽에는 순종과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한 쌍을 이룬다. 엽서 속 사진에 나와 있는 건물은 당시 이완용이 데라우치를 만나 조약문에 서명한 조선 통감부다.

사진9

에는 일본 황거(천황이 거주하는 황궁) 앞에 있는 이중교가 등장한다. 이중교 사진 주위로 꽃문양을 배치해 축제 분위기를 연출했다. '明治四十三年 八月二十九日'(1910년 8월 29일)이라고 새겨져 있는 스탬프가 선명하게 찍혀 있다.

사진10

에는 순종(왼쪽)과 메이지 천황의 사진이 액자 속에 들어 있는 형태로 나란히 배치돼 있다. 사진11은 병합조약문 8개 조항 일본어 전문을 실은 엽서다. 엽서 아래에 '일한합방 기념'이라고 쓰여 있지만 강제병합 직후에 발행된 엽서는 아니다. 엽서에 찍힌 스탬프를 보면 '조선총독부시정기념'이라고 되어 있다. 시정(始政)이란 통치를 시작했다는 뜻으로, 조선총독부 통치를 기념한다는 뜻이다. 실제 발행일자도 명치 43년 10월 1일, 즉 1910년 10월 1일이다. 박한용 연구실장에 따르면 조선총독부는 해마다 이 같은 시정기념엽서를 발행했다.

사진12

사진13에는 조선과 일본을 상징하는 건축물 사진이 나란히 등장한다. 사진 12에는 이중교와 창덕궁 사진이 원형 테두리 안에 들어가 있고 '한일합방 기념'이라고 쓰인 스탬프가 찍혀 있다. 발행일은 1910년 8월 29일이다. 꽃문양으로 경축 분위기를 연출했다. 사진13에는 돈화문, 조선총독부,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등장한다. 데라우치 이름 옆 괄호에 있는 문구는 '원통감(元統監)'이다. 병합 이전까지는 통감이었다는 뜻이다. 총독부 사진 옆 '조선총독부'라는 문구에도 괄호로 '원통감부'라고 표시해, 통감부가 병합 후 총독부가 됐음을 명시하고 있다.

사진14

는 일본이 강제병합을 기념하기 위해 만든 축가 전문이 인쇄된 엽서다. "오늘 합방이 이루어져 팔도가 우리 영토가 되었다"로 시작하는 이 노래는 "제국만세"로 끝난다. 노래에 등장하는 '신후(神后)'는 신공황후를 가리킨다. 720년 편찬된 <일본서기>에는 신공황후가 조선땅에 도착해 신라, 백제, 고구려를 일본의 조공국으로 만들었다는 내용이 기술돼 있다. 사진15에 이 신공황후(왼쪽)가 등장한다. 이 엽서에 신공황후, 이토 히로부미(가운데), 도요토미 히데요시(오른쪽)가 등장한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모두 조선을 일본 영토로 편입시키는 일과 관련이 있는 인물들이기 때문이다. 결국 강제병합 2천년 전부터 시작된 조선병합의 꿈을 기어이 이뤄냈다는 의미가 담겨 있는 것으로, 병합에 역사적 연속성과 정당성을 부여한 셈이다. 사진 안에서 마차가 지나가고 있는 다리는 일본 황거 앞 이중교다.

사진16

은 노골적인 선전 엽서다. 조선의 궁성 앞에 수많은 인파가 몰려 '일한합방' 또는 '만세'라고 적힌 깃발을 흔들고 있다. 엽서에는 '조선왕성 앞에서 열린 일한병합 축하대회 광경'이라고 인쇄되어 있다. 조선 민중이 강제병합을 환영하고 있다고 왜곡한 것이다. 이 정도는 애교 수준이다. 사진17은 완벽하게 연출된 장면을 실은 엽서다. 사진을 보면 일본 대표들과 조선 대표들이 야외에 마련된 테이블에서 회의를 하고 있다. 아래에는 '일한병합 담판 표정'이라고 찍혀 있다. 강제병합조약이 마치 조선과 일본의 대등한 협상의 결과인 것처럼 포장한 것이다. 연출된 축하행렬 사진을 실은 사진18도 같은 맥락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사진19

사진20은 모두 조선 민중들이 강제병합을 환영한다는 의미를 담았다. 사진19에서는 한복을 입은 조선 여성이 일장기를 들고 있다. 사진20에서도 조선 민중들이 평화로운 표정을 짓고 있다. 두 엽서 모두 마을에 집집마다 일장기를 내걸고 있는 모습을 그려놓았다.

사진21

은 1910년 8월 29일자로 발행된 조선총독부 관보를 사진을 찍어 엽서로 만든 것이다. 관보에는 조약 내용이 실려 있다. 사진22는 강제병합의 의미를 상징적으로 축약해놓은 엽서다. 사각 테두리 안에서 대각선을 그려 일장기와 태극기를 합쳐놓았다. 한철호 동국대 역사학과 교수는 "매우 흥미로운 엽서"라면서 "일본이 우리 국기마저 유린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번에 공개된 엽서에는 일본과 한국의 지도가 그려진 엽서들이 여러 장 있다. 사진23은 1910년 8월 29일자 스탬프가 찍힌 병합 기념엽서다. 동해를 '일본해'로 표기했고, 독도는 지도상에 표시되어 있지 않다. 반면 1906년께 발행된 한글 엽서( 사진24)는 동해를 '대한해'로 표기하고 있다. 동해를 일본해로 표기한 것은 다른 엽서들도 마찬가지다. 사진25사진26은 일본과 조선 영토를 모두 붉은 색으로 표시했다. 사진25는 이완용(왼쪽)과 가쓰라 다로의 사진을 위쪽에 실었고, 사진26은 순종과 메이지 천황의 사진을 실었다.

조선과 일본을 붉은색으로 강조한 이유는 사진27사진28에서 또렷하게 드러난다. 두 엽서에 실린 지도는 조선을 '신영토'로 표기하고 있다. 최장근 대구대 교수는 "강제병합이 일본의 영토 확장 차원에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명확히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특히 사진28에 나오는 지도의 경우 신영토를 두만강 위쪽까지로 표시하고 있다는 점이 이채롭다. 최 교수는 "1909년 간도협약을 통해 간도를 청의 영토로 인정한 후에도 일본이 이 지역에 대한 욕심을 버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사진29

는 병합을 통해 확장되는 영토를 구체적인 수치로 명시했다는 점이 흥미롭다. 이 엽서는 병합 이후 늘어난 인구와 영토를 명시한 후 "독일 이상이 됐다"는 문구로 끝을 맺는다.

이처럼 일본이 만든 이른바 '한일병합 기념' 엽서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한결같이 일본의 조선병탄을 합리화하고 미화하는 내용이다. 박한용 연구실장은 "엽서는 일본제국의 조선 통치 효과를 시각적이고 입체적으로 보여주는 수단"이라면서 "엽서가 당시 주요 통신수단이었다는 점에서 일반대중을 상대로 한 선전의 목적을 함께 지니고 있었던 것"이라고 평가했다.

사진 30

은 중국, 일본을 여행한 어느 외국인 부부가 만든 사진첩의 표지 장식이다. 일본군이 난장이처럼 묘사된 조선인의 목에 줄을 걸어 꼭두각시처럼 조종하고 있는 모습이다. 사진31은 이 사진첩의 마지막 장이다. 정장을 차려입은 남녀가 손을 맞잡고 무대에서 퇴장하는 듯한 모양새로 인사를 하고 있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간다는 뜻이다. 오른쪽 하단에 적혀 있는 날짜가 1910년 7월 17일이다. 이들 부부의 눈에 비친 조선과 일본의 관계는 병합 이전부터 지배와 복속의 그것이었음을 보여준다.

사진32

는 미국 신문에 실린 카툰이다. 이토 히로부미가 지도에서 조선을 떼어내는 모습을 그렸다. 이토의 손에 의해 조선(COREA)이 지도상에서 사라지면서 일본의 지배 하에 들어갔음을 풍자한 것이다. 발행일자가 표시되어 있지 않아 정확한 시기를 알 수는 없다. 다만 내용으로 보아 을사늑약에서 강제병합 사이의 시기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된다.

합방, 합병, 병합 |

이번에 공개된 엽서들은 대부분 '합방 기념'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지만, 일부 엽서에는 '일한병합 기념' 또는 '일한합병 기념'이라고 표기돼 있다. '합방'이란 두 나라가 대등한 지위에서 서로 하나가 된다는 뜻이다. 일본이 조선을 집어삼켰다는 사실을 숨긴, 기만적인 표현이다. 그렇다면 '합병'과 '병합'은 무엇일까. 한철호 동국대 교수의 설명이다.

"'병합'은 당시 일본 외무성 정무국장 구라치 데쓰기치의 작품이다. 그가 1920년대에 남긴 <조선병합의 경위>라는 책을 보면, 그가 이 말을 만들기 위해 얼마나 고심했는지 알 수 있다. 일단 합방은 조선의 입장에서 보든 일본의 입장에서 보든 적절한 용어가 아니다. 합방은 대등한 조건에서 하는 것이므로 일본 입장에서 보면 조선이 일본의 영토가 되었다는 의미를 담을 수 없다. 사실에 부합하는 것은 집어삼킨다는 뜻의 '병탄'이지만, 이건 또 너무 노골적인 표현이다. 대안으로는 당시 널리 사용되던 '합병'이 있었지만, 이걸로는 약하다고 생각했다. 고심 끝에 그가 만들어낸 말이 바로 당시 거의 사용되지 않던 '병합'이다. 결국 '병합'이란 말은 일본이 침략을 정당화하기 위해 정교하게 고안한 것이므로, 우리는 병합이란 말을 함부로 쓰면 안 된다. 강제병합, 병탄, 경술국치 같은 표현이 본질에 부합한다."

자료 제공자 이돈수 한국해연구소장

이돈수 소장은 20년 이상 역사자료 수집에 노력을 기울여온 자료수집가다. 이번에 공개된 자료는 그가 소장하고 있는 자료의 극히 일부로, 그가 2000년 이후부터 일본인 소장자들로부터 입수한 것이다. 지난 2005년 서울옥션에서 일제강점기 기생들을 주제로 연 '기생전'에 소개된 엽서 400여장도 그의 소장품이다.

이 소장은 1945년 이전 발행된 엽서만 1000여장을 소장하고 있지만, 그의 소장 목록의 중심을 차지하는 것은 서양에서 만들어진 한국 관련 고서들이다. 그 중 단일 주제로 가장 많이 확보하고 있는 것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소속 선원으로 1653년 조선에 표착한 하멜과 관련된 자료들이다.

그가 역사자료 수집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대학에 입학하던 1984년에 찾아왔다. 그해에 그는 우연히 익사할 뻔한 위기를 가까스로 넘겼다. 물에서 나왔을 때 그의 뇌리를 스친 첫 이미지가 삶과 죽음의 경계를 노래한 제망매가였다. 그 후 학생운동을 하던 친구들과 찾아간 한 술집의 벽지가 고서에서 뜯어낸 종이들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고 그는 현기증을 느꼈다고 한다. 전통적으로 글과 문장을 숭상해왔다는 나라에서 이럴 수가 있는가라는 탄식이었다. 그때부터 고서적상을 드나들며 자료 수집을 시작했다.

출발은 개인적인 이유에서였지만, 꾸준히 자료를 모으는 동안 이 소장의 지향점은 자료수집의 사회적 공공성을 향하게 됐다. 그는 사소한 생활용품 하나까지 모으는 일본인들의 기록문화를 거론하면서 "당시에는 흔해빠진 물건처럼 보이는 것들도 시간의 두께가 쌓이면 당대의 역사를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가 된다"면서 "축적한 자료들은 언젠가 그것을 잘 사용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건네져야 한다"고 말했다.

<정원식 기자 bachwsi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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