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식기 팔던 오퍼상, 콘택트렌즈에 올인

박준식|이재영 기자 2010. 7. 30. 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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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니투데이 박준식기자][[IPO & CEO] 노시철 인터로조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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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는 07월29일(09:43) 머니투데이가 만든 프로페셔널 정보 서비스 'thebell'에 출고된 기사입니다.

1980년 어느 밤, 노시철은 집주인 눈치를 살피며 전화를 넘겨 받았다. 자정이 넘어 잠에서 깬 주인의 눈총에 뒤통수가 따가웠다. 한두 번이 아닌지라 짐짓 머쓱한 표정을 지었지만 그 날은 왠지 느낌이 좋았다.

예감은 들어맞았다. 리비아 지사 주재원은 1800만 달러짜리 신용장(LC)을 열라고 소리를 질렀다. 오더가 터진 것이다. 노시철은 그 해 겨울 입사 2년차에 5년치 일감을 잡고 부인과 함께 방배동 신혼방에서 쫓겨났다.

경남 함양에서 자란 그의 고향은 지리산 산골이었다. 1954년 3남5녀의 넷째로 태어났지만 아버지가 교육을 중히 여겨 1973년에 상경할 수 있었다. 큰 누이가 진주 교대를 나와 교사가 되는 걸 보면서 형제들은 공부 머리가 깨었다.

서강대 무역학과를 졸업하고는 곧장 대우실업에 들어갔다. 보직은 운 좋게도 무역상사 해외 영업. 양식기류의 냄비를 팔게 됐는데 초반엔 짧은 생각으로 품위가 없다고 여겼지만 알고 보니 자체 공장이 있는 섬유나 신발보다는 나았다.

주방용품은 담당이 자기 권한으로 제조사를 선정할 수 있었다. 나름대로의 사업을 꾸릴 기회였다. 일 잘하는 선배들은 업자를 줄 세워 놓고 만나기도 했다. 노시철도 처음엔 그게 부러웠지만 이내 생각을 고쳐먹었다.

눈앞의 이득을 탐하면 신뢰를 잃을 게 눈에 보였다. 해외에서 주문을 많이 따려면 물량과 기일을 맞춰야 했다. 업자에 신뢰를 줘야 관계가 오래갈 것이라 여겼다. 제조사를 을(乙)로만 보지 않았던 것이다.

1979년부터 1987년까지 줄곧 냄비만 팔았다. 대신 원칙을 반드시 지켰다. 제조사에 유통으로 얼마를 남기는지 알리고 가격을 조정한 것이다. 키친아트와 대림통상 등이 그와 거래했다. 그 양식기를 구주와 중동에 넘겼다.

처음엔 대우에서 10년을 채우려 했다. 하지만 1년 일찍 그만두게 됐다. 내 사업을 해도 되겠다는 자신감이 생겨 두류실업이라는 회사를 차렸다. 국내 업자들과 해외 바이어는 '미스터 로'를 믿고 거래했다. 사람마다 기준이 다르겠지만 10년 동안 돈을 많이 벌었다.

헌데 제조업이 1990년대 후반 들어 슬슬 중국으로 넘어갔다. 양식기도 이 흐름을 거스르지 못했다. 마진은 갈수록 박해지는데 전처럼 서비스를 해주려다 보니 몸이 축나기 시작했다. 사업을 시작한 후 독일 클라이언트의 퇴근시간에 맞추려고 밤 11시 전에 집에 들어가 보질 못했다.

2000년 들어 문득 결심이 섰다. 무역을 접고 제조업을 하기로 했다. 직접 만드는 제품이라야 100% 책임질 수 있겠다 싶었다. 한국에서 지속하려면 기술집약적인 산업에서 골라야 했다.

무엇을 할지 고민하던 시기, 콘택트렌즈 기술자 이성춘을 만났다. 그는 다니던 회사가 팔리자 사직서를 내고 회사를 세워 보려고 마음먹고 있던 차였다.

노시철이 자본을 대고 이성춘이 기술을 발휘하기로 의기투합했다. 그게 인터로조의 시작이다. 그러나 사업은 호락호락 하지 않았다. 3년 넘게 고전했다. 6억원이었던 자본금은 금세 바닥났다.

그래도 노시철은 함부로 증자하지 않았다. 동업한 이들의 지분이 줄 것을 걱정했다. 대신 사재 15억원을 회사에 이자 없이 대여했다. 동업자 정신이었다.

노시철은 직접 제품을 들고 밀라노와 홍콩 박람회를 뛰어다녔다. 영업에는 그만한 도사가 없었다. 깨끗한 매너와 신뢰감 주는 인상은 어디서나 통했다. 처음엔 안경 제조기기 부스 한켠에 판을 폈다. 이듬해에는 독자 코너를 차렸다. 그렇게 서서히 제품을 알렸다.

뉴욕에서 사업의 귀인을 만났다. 폴리 뷰(Poly Vue)라는 렌즈기기사의 스테판 엘런 던이 제품 진가를 알아봤다. 기술과 품질이 좋은데도 브랜드가 없어 가격 경쟁력이 있었다. 사람을 끌어당기는 노시철의 기질이 발휘됐다. 스테판을 고문으로 내세워 둘이 함께 세계 박람회를 누볐다. 기술력을 보증해줄 수표였다.

당시 인터로조는 세계 최초로 하이 데피니션(HD)이라는 디자인 기술을 개발했다. 망막 중앙에 초점이 잘 맞게 해 렌즈를 껴도 상이 깨끗한 기술이다. 클라이언트들은 무명 브랜드의 한국 회사를 반신반의하다 샘플을 써보고는 역량을 인정했다.

2003년부터 이익이 났다. 이듬해 100만달러 수출탑을 받고, 2007년엔 존슨앤존슨(J & J) 같은 메이저 회사만 갖고 있다는 누진다초점 렌즈를 개발했다. 작년엔 141억 원의 매출액 중 영업이익이 64억 원에 달했다. 사업 10년 만에 이익률이 45%가 넘는 회사가 됐다.

그대로도 장사가 잘되겠지만 상장을 한 이유는 노시철의 꿈이 커졌기 때문이다. 2008년, 일본 후생성에 1회용 렌즈 판매 허가신청을 냈고 작년 말 품목허가가 나왔다. 1조 원이 넘는 일본 시장을 뚫으려면 85% 비율인 단기착용 렌즈를 만들어야 한다. 이번 상장으로 조달한 121억원은 대부분 평택공장 투자에 쏟아 붓는다.

10년 전에는 성공을 의심했지만 지금은 확신한다. 한 눈 팔지 않고 집중하면 항상 생각지 못했던 결과가 찾아왔다. 콘택트렌즈 시장 규모는 약 6조원. J & J와 바슈롬 등 4개사가 과점하는 시장은 전체의 88%. 이 중 인터로조의 점유율은 0.2%. 노시철 사장은 "5년 내에 5대사로 올라서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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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준식기자 win04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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