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 페이퍼진] 잊을수 없는 순간들 : 강만수 '통한의 LA올림픽'

2010. 5. 6. 1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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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림픽 3회(72년 뮌헨 7위, 76년 몬트리올 6위, 84년 LA 5위), 아시안게임 3회(74년 테헤란 은, 78년 방콕 금, 82년 뉴델리 동), 유니버시아드 3회(73년 모스크바 동, 77년 소피아 동, 79년 멕시코 금) 출전, 그리고 78년 로마 세계선수권 4위.... 굵직한 한국 배구 역사를 다 품고 있다. 이 모든 행보를 딱 한마디로 표현한 게 있다. '아시아의 거포'. 어쩌면 애칭이 이토록 잘 어울릴까 싶다. 9년간 현대자동차 지휘봉을 잡고 다섯 차례나 우승시키면서 지도력도 인정받았다. 온순한 성품이 지도자로는 되레 흠이라는 지적도 있지만, 대표팀에서는 아직 제대로 된 기회를 얻지 못했다. 맹장이 통하는 시절이 있고, 덕장이 먹히는 시절이 있다. 시대가 바뀐 요즘이라면 그야말로 그의 소리없는 카리스마가 제격일 수도 있다.

 ▶배구공 잡기까지

 운동 참 싱겁게 시작했다. 경남 하동초등학교 5학년 특별활동 시간에 공 한 번 받고 선수가 됐다. 골대 뒤에 멍하니 서 있는데 핸드볼 코치가 공을 던지며 받아 보라고 했고, 별 생각 없이 덥석 받은 게 전부였다. 그 짧은 시간에 무엇을 읽었는지 코치는 대뜸 핸드볼부에 합류시켰다. 그때까지만 해도 키만 좀 컸다 뿐이지 빠르지도 않았다. 운동신경 좋다고 느낀 적도 없었다. 그런데 난데없이 선수라니 그저 어안이벙벙할 따름이었다. 기술을 익히고 연습을 거듭하면서 공 끝에 힘이 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처음으로 출전한 지역대회에서 희열을 맛봤다. 문전에서 슛을 쐈는데 골키퍼가 겁을 먹고 공을 피해버린 것이다. 파워와 스피드가 이미 대포알 수준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얼굴에 맞았더라면 코뼈가 주저앉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 재미는 채 2년을 못 누렸다. 하동중학교에는 축구부와 배구부밖에 없었던 것이다. 운동선수 출신이라고 대번에 축구부로 불려갔다. 센터포워드와 골키퍼 두 포지션을 오가며 새로운 분야에 맛을 들여 갔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훈련 계속하다가는 죽겠다 싶어 일찌감치 포기했다. "골키퍼 훈련할 때였어요. 앞에서 공을 차면 몸을 날려 잡은 후 한 바퀴 구르는 훈련을 했는데 몇 번 구르고 나니 하늘이 노랗더라고요. 게다가 맨땅 아닙니까. 그날로 사실상 축구는 접었습니다. 공격수만 하라고 했으면 축구선수가 되었을지도 모르죠."

 그 와중에 배구부까지 들락거렸다. 바쁘긴 유독 바쁜데 딱히 손에 잡히는 건 없었다. '재주 많은 이 밥 굶기 십상'이라더니 그 말이 딱이었다. 어설프게 축구, 배구를 오가며 기운만 빼다가 3학년이 되면서 배구판에 제대로 뛰어들었다.

 기숙사가 없는 시골 학교라 여름방학 합숙훈련은 교실에서 했다. 책상 위에서 자고 밥은 지어 먹었다. 훈련은 주로 백사장에서 했다. 백사장을 달리며 체력을 키웠고, 백사장에서 배구 하며 전력을 다졌다. 숫제 비치 발리볼 팀이었다. 밟으면 쑥쑥 들어가는 모랫바닥은 갑절의 체력과 스피드를 요구했다. 백사장 훈련은 알게 모르게 엄청난 효과를 가져왔다. 나중에 코트에 섰을 때는 하나같이 펄펄 날았다. 그때 실력이 많이 늘었던 것 같다.

 ▶고달픈 배구선수

 당시 서울 대신고와 인창고, 부산 성지공고가 '빅3'였다. 대신고를 가고 싶었으나 겁이 나 엄두도 못 냈다. '선배들이 엄청나게 팬다'고 벌써 소문이 돈 터다. 마침 성지공고에 진학한 선배한테 연락이 왔다. 별 뾰족한 수도 없고 해서 동기 둘과 함께 그리로 갔다. 한데 대신고는 저리가라였다. 따귀는 기본이고, 안 맞으면 불안해 잠을 못 잤다. 믿었던 그 선배도 만만찮게 굴었다. "내가 많이 때려야 다른 애들이 덜 때린다"면서. 하지만, 그 매가 더 매웠고 갑절로 서러웠다. 몽둥이에 수시로 엉덩이가 터져 털썩 한 번 앉아 보지 못한 채 1학년을 보냈다. 하필 숙소가 토목과 옆이라 주변에 몽둥이가 넘쳐났다. 동기 다섯 중에서 집이 부유한 한 녀석은 덜 맞고 살았다. 그 꼴도 아픈 가슴을 후벼 팠다.

 감독은 아무리 화가 나도 꿀밤 정도였지만, 몇몇 선배들은 매질을 아주 낙으로 삼았다. 한 선배는 규칙을 정해놓고 때렸다. 토스한 공이 정확하게 자기 이마에 오지 않으면 곧장 화장실로 데려갔다. "그 선배는 요즘도 더러 보지만 정말 영원히 보고 싶지 않은 사람이에요. 그래도 그 바람에 기본기가 잘 다져진 건 사실입니다. 안 맞으려고 온 신경을 집중해서 토스하다 보니 기술이 늘 수밖에요."

 1학년은 훈련 30분 전에 운동장에 나가 코트에 물 뿌리고, 라인 긋고, 돌을 골라내야 했다. 살림살이에 비하면 그건 일도 아니었다. 한겨울 얼음물에 선배들 신발이며 유니폼을 빨다 보면 손등이 갈라져 피까지 났다. 그러고도 잠 한숨 곤히 못 잤다. 툭하면 다락방으로 쫓겨 올라가 쥐며느리처럼 웅크린 채 아침을 맞았다. 다락방에서 숨죽여 울기도 많이 울었다.

 견디다 못해 고향 친구 둘과 이마를 맞댔고, 거기서 기발한 아이디어를 찾아냈다. 다음날 아침 셋은 숙소 마룻바닥에 널브러진 채 꼼짝도 안 했다. 눈이 휘둥그레진 감독과 선배들에게 "아무래도 연탄가스 마신 것 같다"며 눈동자 풀고 침까지 흘려 보였다. 감독이 빨리 병원에 가 보라고 했다. 작전 성공이었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엉뚱한 약을 먹는 게 조금은 꺼림칙했지만, 그날 하루는 운동도 안 했고 맞지도 않았다.

 2학년 때는 머리 좀 컸다고 선배한테 대들었다가 더 맞았고, 친구들과 보따리도 싸 봤지만, 덜컹덜컹 7시간 비포장 하동 길이 엄두가 안 나 포기했다. 그 와중에 실력을 차곡차곡 쌓아 선배들을 능가했고, 국가대표 선수들조차 단념한 백어택까지 구사했다. 경기를 하다 보면 아무래도 포인트가 나는 쪽에 세터의 공이 몰릴 수밖에. 그 바람에 세터였던 1년 후배 신치용이 선배들에게 많이 맞았다. 강만수한테만 공 준다고.

 ▶올림픽 주전자 당번

 성지공고 3학년 2학기 때 태극마크를 달았다. 72년 뮌헨 올림픽을 겨냥한 대표팀에 막내로 이름을 올렸다. 구기종목 사상 최연소 국가대표라 큰 화제가 됐다. 입학 당시 1m78이던 키는 어느새 1m95까지 자랐고, 파워까지 붙으면서 될성부른 나무로 평가받은 것이다. "성지공고의 자랑이었죠. 태릉선수촌에 들어가던 날 감독님과 몇몇 선수가 따라와 선수촌 정문 앞에서 교가까지 불렀습니다." 딱 거기까지였다. 행복 끝 고생 시작. 바로 위가 성지공고 2년 선배인 박기원이었고, 왕고참은 근 열 살이나 많았다. 그 틈에 고등학생이 끼었으니 안 봐도 빤했다. 선수촌에서는 온갖 허드렛일과 잔심부름에 녹아났고, 외국에 나가면 짐 나르다가 다 지쳤다. 남들은 힘들다고 혀를 빼 무는 운동이 가장 쉬웠으니 말 다했다.

 북한과의 올림픽 예선을 프랑스 생디에에서 치렀다. 북한 전력이 만만찮아 다들 0대3으로 질 거라고 했다. 시절이 시절인 만큼 중앙정보부 요원 두 명이 따라나섰다. "깨지면 한강에 다 빠뜨려 버리겠다"며 압력까지 넣었다. 일단 기싸움에서는 이겼다. 네트를 사이에 두고 "아오지 탄광으로 보내주겠다"며 신경을 건드렸고, 욕설까지 섞어가며 기를 죽였다. 북한 선수들의 반응은 고작 "말조심 하라우" 정도였다. 신경전이 먹혔는지 결과는 3대1 승리였다.

 "귀국했더라면 카퍼레이드 벌이며 영웅 대접을 받았을 텐데 무슨 영문인지 귀국을 안 시키더라고요. 그 길로 한 달간 유럽을 돌며 훈련하고 곧바로 서독으로 들어갔어요. 저는 어차피 주전자 당번이라 맘 편하게 생활했죠."

 올림픽 선수촌은 가히 별세계였다. 처음 보는 음식들이 즐비했고, 스테이크도 양껏 먹을 수 있었다. 세상에 이런 데가 다 있나 싶을 정도였다. 양젖에 설탕 타 먹는 맛도 아주 그만이었다. 새콤달콤 희한한 맛에 매료돼 입에 달고 살았다. 세월이 지나 그게 요구르트라는 걸 알았다. 연일 어찌나 먹어 댔는지 순식간에 살이 올라 피둥피둥해졌다. "나중에 동네 사람들이 그러더라고요. '너는 올림픽 나간다더니 어떻게 주전자만 들고 다니냐'고요. 그때는 물통이 따로 없어 주전자를 들고 다녔어요. 작전타임에 선배들이 벤치로 들어올 때마다 주전자를 들고 나갔죠. 그러니 동네 사람들은 TV로 주전자 들고 나가는 저의 뒷모습만 보신 거예요." 주전자 들고 따라간 뮌헨에서 한국은 7위에 머물렀다. 그러나 주포로 나선 76년 몬트리올과 84년 LA 올림픽에서는 각각 6위와 5위에 올랐다.

 ▶통한의 승부

 84년 LA 올림픽은 한국 남자배구가 처음으로 메달을 딸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조별리그에서 튀니지와 브라질, 아르헨티나를 꺾고 미국에만 져 3승1패를 기록했다. 각 조 1, 2위가 준결승에 올라가게 돼 있었고, 3연승의 미국과 2승1패의 브라질이 마지막 경기를 벌였다. 한국에도 깨진 브라질은 애당초 미국의 상대가 아니었다. 한국의 준결승 진출은 너무도 당연했고, 전력으로 볼 때 메달은 확정적이었다.

 정부에서는 마을잔치 하라며 이미 선수들 집에 돈을 보냈고, 대한배구협회는 메달만 따면 집 한 채씩 주겠다고 약속했다.

 "한인 식당에서 밥을 먹고 있는데 마침 미국과 브라질이 경기하더라고요. 어차피 빤한 스코어라 느긋한 마음으로 TV 중계를 봤죠. 근데 미국이 후보들을 내보내더니 첫 세트를 지더라고요. 설마 설마 하는 사이 2세트도 내주고 3세트를 마저 지는 거예요. 식당은 순식간에 초상집이 됐죠. 소리지르고, 눈물 흘리고...."

 한국은 미국, 브라질과 나란히 3승1패가 되었지만, 세트 득실에서 뒤져 조 3위로 밀려났다. 상대하기 까다로운 한국을 떨어뜨리려고 미국이 일부러 진 것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결승에서 미국은 브라질을 3대0으로 가볍게 요리하고 금메달을 가져갔다.

 "제가 와세다대 다닐 때 일본에서 우연히 LA 올림픽 당시 미국 감독이었던 더글러스 빌을 만났습니다. 그때까지도 분이 안 풀려 대놓고 따졌죠. 고의 패배를 간접적으로 인정하더라고요. 그러면서 '그때 얘기하지 그랬냐'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더군요. 지금 생각해도 참 가슴 아픈 일입니다."

 ▶세 차례의 부상

 78년 로마 세계선수권대회를 앞두고 그간 혹사당한 어깨가 말썽을 부렸다. 어지간히 아픈 건 아프다 소리조차 안 하고 뛰던 시절이었지만, 세수는 고사하고 숟가락질도 못할 지경이었으니 경기는 꿈도 못 꿨다.

 "그래도 뛰었어요. 제 역할을 대신할 마땅한 선수가 없어 무조건 뛰었죠. 그게 정신력인가 봐요. 숟가락도 못 들던 팔로 경기를 했으니까요. 급하니까 되더라고요." 물론 기량을 다 발휘하지는 못했다. 블로킹도 부실할 수밖에 없었고. 그러고도 소련, 이탈리아, 쿠바에 이어 4위에 올랐다. 그래서 더욱 아쉬운 메달이다.

 그해 12월 방콕에서 아시안게임이 열렸다. 5연패의 아시아 최강 일본을 꺾고 우승 한번 해 보는 게 모두의 소원이었다. 마침 어깨 통증도 괜찮아졌고, 전력도 좋아 내심 기대가 컸다. 한데 개막 한 달 전 연습도중 발목을 접질리고 말았다. 부러지지는 않았지만 퉁퉁 부어올랐다.

 치료라고는 침 맞고, 피 빼는 게 고작이었다. 그러니 좀체 낫질 않아 근 한 달을 쉬었다. 그 사이 선수단은 방콕으로 떠났다. 설령 나았다 해도 한 달을 쉬어 컨디션이 말이 아니었다. 마음을 접고 쉬고 있는데 갑자기 출국하라는 연락이 왔다. 암만해도 전력이 불안한 데다 혹시나 하는 기대감에 일단 합류시켜놓고 보자는 생각이었던 것 같다. 발목에 붕대 감고 뒤늦게 혼자 방콕으로 날아갔다.

 안 죽을 만하면 뛰자 싶어 코트에 들어가 어금니를 물었다. 한국의 사상 첫 금메달은 그런 고통 속에서 조금씩 현실로 다가왔다. 24년 후인 2002년 부산 대회에서야 두 번째 우승을 달성했으니 당시 부상 투혼이 얼마나 값진 것이었는지 어렵잖게 짐작할 수 있다.

 84년 LA올림픽 예선 일본과의 원정경기에서는 갈비뼈가 상했다. 죽어도 이겨야 된다는 생각에 백어택을 너무 많이 한 게 화를 불렀다. 갈비뼈에 금이 간 것이다. 1m95의 키, 95㎏의 몸으로 3m씩 날아 수도 없이 공을 후려대니, 게다가 매번 엄청난 파워까지 실었으니 성하다면 되레 이상할 일이었다. 몸통에 붕대까지 감고 뛰었지만 끝내 2대3으로 지고 말았다. 잊히지 않는 승부 중 하나다.

 84년 LA 올림픽을 마치고 그해 10월 일본으로 건너가 공부를 시작했다. 배움에 대한 아쉬움을 털어버리기 위한 어려운 결정이었다. 온종일 학원에서 골머리 앓아가며 책과 씨름한 끝에 이듬해 와세다대 체육교육학과 3학년 편입에 성공했다. 하지만, 들어가는 게 다는 아니었다. 그 후로는 시험공부 때문에 또 고통의 나날을 보내야 했다. 스트레스가 얼마나 컸으면 속병을 앓아 위내시경 검사를 세 번이나 받았다.

 와세다대 배구팀에 소속돼 있었지만, 한국과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순수 클럽팀이다 보니 등록금을 내야 했고, 수업도 다 들어야 했다. 성적 나쁘면 졸업을 안 시켰다. 학창시절 책 버리고 운동만 한 외국인에게는 버거운 도전이었다. 결국, 한 학기를 더 다녀 2년 반 만에 졸업했다.

 공부는 힘들었지만, 배구판에서는 연일 신화를 썼다. 맨 처음 얼굴을 내밀었을 때 선수들이 기절했다. 온다 만다 소문은 있었지만, 막상 세계적인 배구선수가 애송이들 취미 활동하는 클럽팀에 나타나니 믿기지 않을밖에. "서른 살 때였어요. 선수들 가르쳐 가며 같이 뛰었는데 그 바람에 말이 빨리 늘었죠. 첫해 2부리그 전승으로 1부리그에 승격했고, 1부리그에서 또 전승으로 우승했어요. 와세다대가 33년 만에 우승했다고 전 일본이 떠들썩했습니다."

 공에 비해 대접은 엉망이었다. 선수단 버스가 없어 경기장에는 전차를 타고 가야 했고, 도시락이나 주먹밥 하나 까먹고 경기를 뛰어야 했다. 천근만근 늘어진 몸을 전차에 싣고 귀가할 때마다 '도대체 내가 뭐 하고 있나' 하는 생각에 몹시 심란했다. 와세다 나왔다고 하면 남들은 이름 얹어놓고 졸업장 거저 받은 줄 안다. 남의 속도 모르고.

 졸업장을 품으면서 비로소 지옥을 벗어났다. 역시 공부는 적성에 안 맞는다는 걸 통렬히 깨닫게 해 준 죽음의 다섯 학기였다. 그런데 졸업과 함께 상상도 못할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일본 2부리그 팀 도레이에 입단하면서 도카이대 대학원에다 등록해버린 것이다. 무슨 마음으로 그랬는지 모르겠다. 오기였는지, 한풀이였는지. 시험 스트레스가 또다시 숨통을 옥죄는 가운데 이번엔 도레이를 업고 새 역사를 썼다. 입단 첫해 우승을 견인하며 1부리그 승격의 숙원을 풀어준 것이다.

 마가린 비빔밥

 성지공고 다닐 때는 시절도 그랬지만, 연일 맞아가며 파김치가 되도록 훈련해도 먹는 건 영 신통찮았다. 밥하고 김치가 주식이었고, 어쩌다 된장 푼 어묵국이 상에 오르면 모두의 표정엔 생기가 돌았다. 밥 위에 마가린 한 덩어리 떼어 올리고 간장 뿌려 비벼 먹는 건 별미이자 보신이었다. 성지공고 시절 숙소 생활하는 선수들 쌀은 학생들이 책임졌다. 전교생이 편지봉투로 한 봉투씩 내면 몇 가마니 됐고, 그걸로 한동안 버티곤 했다. 김치와 된장, 그리고 반찬 값은 학교에서 댔다. 어쩌다가 쌀이 떨어지면 학생회장을 불러 다그쳤다. 성품이 곱고 인자해 이유 없이는 후배들 뺨 한 번 안 때리고 지냈지만, 끼니에 문제가 생기면 그냥 안 넘어갔다.

 대표팀 알람시계

 국가대표팀이 해외에 나가면 기상 시각에 맞춰 막내가 선배들을 다 깨워야 했다.

 2년째 막내 생활을 하던 73년 브라질에 갔을 때다. 폭염으로 경기가 밤에 열리는 통에 숙소에 돌아오면 늘 자정이었다. 선배들은 씻고 곧바로 잠자리에 들었지만, 막내는 여전히 긴장을 풀 수가 없다. 오전 훈련, 오후 경기의 빡빡한 일정이라 피곤한 건 매한가지지만 알람시계가 잠들면 다음날 팀 운영에 차질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는 둥 마는 둥 고달픈 밤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살짝 잠이 들었다가 뭔가 찜찜해 눈을 번쩍 떴더니 온 사방이 환했다. 주섬주섬 짐을 챙겨 바깥으로 튀어나갔더니 선배들은 이미 버스에 다 올라앉아 막내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아이보다 배구

 둘째 아이 얘기만 나오면 아내가 눈을 흘긴다.

 일본 실업팀 도레이에서 뛰던 88년 2월이었다. 만삭의 아내가 한 새벽에 잠을 깨웠다. "진통이 오니 빨리 병원 가자"며. 한데 거기서 평생 꼬집힐 빌미를 제공하고 말았다. 다짜고짜 싫다며 버틴 것이다. "전날 러닝을 많이 해 피곤도 했지만, 일어나는 대로 또 훈련해야 한다는 생각밖에 안 들더라고요. 오로지 배구 생각만 한 거죠. 뭐, 첫째도 혼자 가서 낳은 걸요." 할말을 잃은 아내는 평소 친하게 지내던 옆집 일본인 아줌마를 깨워 병원에 갔다. 더욱 기가 막힌 건 그 다음이었다. "배구선수는 어깨 아프면 안 되잖아요. 그래서 아이를 거의 안 안아 줬어요. 그랬더니 툭하면 잔소리예요. 허허허." 정말 바가지 긁힐 소리만 골라서 한다.

 < 최재성 기자 kkachi@sports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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