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디세우스 내세워 문명과 야만을 구분짓다

2010. 4. 23. 21:30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한겨레] 고전 오디세이 ④ 자연세계에서 국가로 가는 길

낯선 손님을 예의롭게 맞고그가 곤경에 빠졌으면 돕고신에 대해 두려워한다면 '문명'손만 뻗으면 먹을 게 있어도손님에게 잔인하게 굴거나오만불손 무법천지라면 '야만'

서양에서 문명과 야만의 구분이 처음 등장하는 텍스트는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이다. 여신 칼립소의 오기기아를 떠나 20일간의 항해 끝에 간신히 육지에 발을 디딘 오디세우스의 말이다.

나는 또 어떤 인간들의 나라에 온 것일까?오만하고 야만스럽고 옳지 못한 자들일까?이방인에게 친절하고 신을 두려워하는 자들일까?(<오디세이아> 6권, 119~123행)

흥미로운 고민이다. 고민의 한 편에 오만, 야만, 불의가, 다른 편에 관대, 친절, 정의가 서 있다. 이른바 문명과 야만의 대립이 처음 등장하고 있다. 문명에 대한 나우시카의 말이다.

손님이여, (…) 올림포스 제우스는 마음 내키는 대로/ 나쁜 사람이든 좋은 사람이든 모두 가리지 않고 행복을 나누어 주시지요./ 그대가 겪는 어려움도 그분이 주신 것이니 참고 견디어야 해요./ 지금 그대는 우리 도시와 나라에 오셨지요. 도움을 구하는 사람이 간청하는 옷과 그 밖에 다른 모든 것을 받으실 거예요. 도울 수 있는 처지라면 당연히 도와야 하니까요. (<오디세이아> 186~193행)

문명의 기준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그 기준은 손님에게 열린 마음과 어려운 이를 돕는 마음이다. 서양 고대 세계에서 손님에게 열린 마음은 아주 중요한 덕목이었다. 손님을 잘못 대접하거나 손님으로서 예의를 지키지 않는 일로 해서 전쟁이 벌어지기도 했기 때문이다. 트로이 전쟁이 대표적이다. 여러 원인이 있지만, 파리스가 손님의 예의를 지키지 않은 것도 주요 원인 가운데에 하나이기 때문이다. 손님 파리스가 주인 헬레네를 유혹해서 트로이로 데려가 버린 일은, 그들이 해당 국가의 왕자이고 왕비였다는 점에서, 개인적인 연애 행각으로 끝나지 않았고 전쟁으로 이어졌다. 이런 이유에서 손님 대접에 관한 예의 일반에 대해서는 제우스가 직접 관장한다. "크세니우스 제우스"(Xenius Zeus)라는 별칭이 이를 잘 보여준다. "손님 환대의 예의를 관장하는 제우스"를 뜻한다. 이런 의미에서 오디세우스의 "신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진 자들일까"라는 물음은 제우스에게 던지는 것이다. 적어도 신을 두려워하는 자라면, 그의 간청을 들어주어야 하기에 그렇다.

이에 대한 나우시카의 답이 흥미롭다. 불행과 곤경에 빠진 손님을 돕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이다. 이유인즉, 인간은 제우스가 내리는 행복과 불행 앞에서 누구나 평등한 존재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언젠가 나도 그런 곤경에 빠질 수 있기에 그렇다는 것이다. 지극히 인간적인 해명이다. 소위 "인간 조건"(conditio humana)의 뿌리가 여기에 있다 하겠다. 사람은 누구나 서로의 도움이 필요한데, 이것이 인간 조건이기에 그렇다. 이와 관련해서 손님에게 열린 마음과 어려운 이를 돕는 마음이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 주목하자. 오디세우스의 주장에 따르면, 낯선 손님을 돕는 것은 제우스의 뜻이다. 사정이 이와 같다면, 어려운 처지에 빠진 사람을 돕는 것도 아마도 제우스의 뜻이다. 어려운 처지에 빠진 사람은 모두 낯선 손님에 속하기 때문이다. 낯선 이도 돕는데, 아는 이를 돕지 않는 것은 더욱 큰 잘못이기에 그렇다. 원래 라틴어 호스티스(hostis)는 손님을 의미하기도 하고 적을 뜻하기도 한다.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친구가 될 수도 있고 적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아는 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친구가 될 수도 있고 불구대천의 원수가 될 수도 있기에 말이다. 손님 환대의 규칙과 어려운 이를 돕는 마음은 논리적으로 이렇게 연결된다. 이를 통해서 어려운 이를 돕는 마음은 인간의 의무로 자리잡게 된다. 오디세우스의 간청이 신의 힘에 기초한다면, 나우시카의 답은 인간의 관점에 근거를 두고 있다 하겠다. 이 두 가지가 충족되고 서로 잘 연결된 나라가, 타인에 대해 열린 마음과 어려운 이를 돕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사는 곳이 이른바 문명 세계다. 이것이 호메로스의 생각이다. 이는 야만의 지역을 살필 때에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키클롭스의 지역으로 항해해 보자. 오디세우스와 폴리페모스가 나누는 대화다.

혹시 그대가 환대해주거나 아니면 손님의 당연한 권리인/ 그 밖의 다른 선물을 줄까 해서 이리로 와서 그대의 무릎을 잡는 것이오./ 가장 강력한 분이여. 그대는 신들을 두려워하시오. 우리는 그대의/ 탄원자들이오. 제우스는 탄원자들과 이방인들의 보호자시며/ 존중받아 마땅한 손님들과 동행하시는 손님의 신이시오./ 이렇게 말하자 그자는 즉시 비정하게 대답했소./ "이봐, 나그네, 나더러 신들을 두려워하거나 피하라고/ 명령하다니 너는 어리석거나 멀리서 왔나 보군."(<오디세이아> 268~274행)

도움을 청하는 오디세우스에게 폴리페모스는 아주 "비정"하게 거절하고 있다. 나중에 폴리페모스는 손님들에게 식인(食人)을 할 정도로 잔인하게 굴었다. 이 대목에서 문명과 야만의 구분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하겠다. 인간적인 것과 잔인함의 대비가 바로 그것이라 하겠다. 문명의 형성에 대한 호메로스의 생각을 좀더 살펴보자.

오만불손한 무법자들인 키클롭스들의 나라에 닿았다. (…)/ 밀이며 보리며 거대한 포도송이들로 포도주를 가져다주는 포도나무하며/ 모든 것이 씨를 뿌리거나 경작하지 않건만, 그들을 위해 풍성하게 돋았다. (…)/ 그들은 회의장도 없고 법규도 없었다.(<오디세이아> 106~113행)

키클롭스 지역의 묘사가 매우 흥미롭다. 어찌 보면, 키클롭스의 지역이 바로 유토피아다. 유토피아(utopia)란 어디에도 없는 곳, 즉 '무토피아'(無土彼亞)다. 서양의 유토피아에 대한 생각의 뿌리가 여기에 있다 하겠다. 묘사에 따르면, 일단 부족한 것이 없는 곳이다. 일을 하지 않아도 저절로 먹을 것이 제공된다. 그야말로 부러울 것이 없는 그런 곳이다. 그러나 호메로스는 이곳을 무법천지에 불경스럽고 회의장도 없고 법규도 없는 곳으로 묘사한다. 단순 생존이 아닌 사람이 살기 위해 요청되는 제도와 조건들이 갖추어져 있지 않다는 것이다. 생존과 생활의 구분이 처음 등장하는 대목이 여기가 아닌가 싶다. 아무리 먹을 것이 풍부하다 할지라도, 그것이 사람다운 삶을 채워주는 곳은 아니라는 점을 지적하고 있는 셈이다. 결론적으로 단순한 생존(生存)이 아닌 생활(生活)이 있는 곳이, 국가라는 제도가 작동하는 곳이 문명의 세계라고 호메로스는 생각한 것 같다. 문명에 대한 호메로스의 이런 생각은 이후 내내 서양 역사를 지배하게 된다. 증인으로 키케로의 목소리를 들어보자.

무엇보다도 바로 말의 힘 때문에 인간이 짐승보다 우월하다. 흩어진 사람들을 한자리에 모으고, [그들을] 야만의 거친 삶에서, 이곳 로마처럼, 사람답게 살 수 있는 문화와 문명의 세계로 이끌 수 있었던, 또한 국가가 이미 세워졌을 때, 입법과 사법 그리고 법에 입각한 권한과 법이 보장한 권리에 대한 규정과 틀을 마련하고자 할 때, 어떤 다른 힘이 가능했을까?(키케로, <연설가에 대하여> 제33장)

키케로에 따르면, 인간이 다른 동물과 다른 존재일 수 있는 것은 인간이 자연 상태의 야만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문명의 틀 안에서 살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를 가능케 해준 근본적인 힘이 말이라고 한다. 모여 살게 하고 거기에서 문명과 문화를 가꾸고 살도록 사람들을 설득한 힘이 말이기에. 키케로에 따르면, 이런 말의 힘에 기초해서 성립한 제도가 국가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문명 담론의 성격이 달라진다. 문명 담론이 폴리스(로마의 경우 키비타스(civitas))의 성립과 연결되어 논의되기 때문이다. 폴리스라는 말에서 국가의 개념이, 폴리스라는 말에서 모여 사는 곳의 의미인 도시의 개념이, 도시의 개념에서 세련됨이, 세련됨에서 닦음, 길들임, 수양과 예의의 개념이 흘러나온다. 이 반대, 곧 잔인하고 무례하며, 조야하고 거칠며, 들판과 산에서 흩어져서 살며 나라도 없는 곳이 바로 야만이 지배하는 곳이다.

안재원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HK연구교수

공식 SNS [통하니][트위터][미투데이]| 구독신청 [한겨레신문][한겨레21]

Copyrights ⓒ 한겨레신문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한겨레는 한국온라인신문협회(www.kona.or.kr)의 디지털뉴스이용규칙에 따른 저작권을 행사합니다.>

Copyright © 한겨레.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크롤링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