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치 스크린]때론 내버려 두는 것이 낫다

2010. 3. 25. 1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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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어밴던드

김길태 사건이 오싹한 것은 그 끔찍한 살해가 일어난 현장에 앞으로도 누군가가 살아간다는 거다. 재개발이 된다고 하지만 수많은 사람이 현장검증 자리에 있었으니 그 정확한 '위치'에 대한 기억은 오래갈 것이다. '지금'이 지나면 바로 사건 현장은 공론장에서 퇴출된다. 남는 건 괴담이다. 휘황찬란한 부산 구포역 민자역사 조명 뒤 한 구석에 열차추돌 사건 이후'아이를 업은 목 없는 여인' 귀신의 음습한 이야기가 떠도는 것처럼.

<어밴던드>가 다루는 이야기는 1966년에 옛 소련 어딘가에서 벌어진 사건이다. 확실한 이유는 제시되지 않지만 남편은 자신의 아내를 살해했고, 쌍둥이 아이들도 죽이려고 했다. 요행히 아이들을 살릴려는 어머니는 트럭을 몰고 탈출하지만 그만 트럭에서 죽는다. 그로부터 40년이 흘렀다. 그동안 영국을 거쳐 미국으로 입양된 메리 존스(아나스타샤 힐 분)는 자신 앞으로 유산이 있다는 연락을 받고 러시아로 향한다. 유산은 40년 전 참극의 사건이 벌어진 집. 트럭을 수배해 그곳을 찾아가는데 캄캄한 한밤중이다. "밖의 상황을 알아보겠다"고 나간 트럭 운전수는 어디론가 자취를 감춘다. 집으로 들어간 메리는 "이틀 전부터 이곳에 들어와 있다"는 한 남자를 만난다. 그 역시 다른 곳으로 입양된 쌍둥이였다. 바로 그 집에서 자신의 어머니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알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남매는 불가사의한 존재 및 사건과 맞닥뜨린다.

이 영화는 나초 세르다 감독의 장편 데뷔작이다. 그러나 공포장르 팬층과 미확인비행물체(UFO) 마니아들에게 세르다 감독의 이름은 이미 유명세를 떨쳤다. 그의 단편 <애프터매스>(1994)는 1990년대 후반에 '인터넷비짜샵'(저화질의 불법 비디오물을 파는 인터넷사이트)에서 인기 품목이었다. 국내의 장르영화 동호회에서도 이 작품을 상영하기도 했다. 조금 생뚱맞지만 세르다 감독의 이름은 다른 쪽에서 더 유명했다. 언젠가 KBS <일요스페셜>을 통해서도 방영된 '로즈웰 필름'(외계인 해부 필름)을 만든 사람이라는 소문이 국제적으로 나돌고 있다. 이 소문은 확인되지 않았다. '애프터매스'에서 탁월한 실력을 발휘한 시신 해부 묘사 덕분에 생긴 것인지도 모른다.

'시간과 공간, 원인과 결과가 뒤죽박죽된 사건'은 이미 판타지 / 호러 영화에서 익숙한 내러티브다. 시미즈 다카시 감독의 영화 <주온> 시리즈에서 가야코 사건을 맡은 형사는 모자의 귀신이 출몰하는 집을 불태우려다 청소년으로 성장한 10여 년 뒤에 자신의 딸과 마주친다. 송일곤·김동욱 감독의 영화 <거미숲>(2004)에서 터널의 문을 열고 들어간 감우성은 자신의 교통사고를 목격한다. 사실 의외로 이런 이야기 구조를 갖고 있는 영화는 난해하다는 인상을 받는데 신통하게도 이 영화는 매우 안정적이다. 또 하나, 이 작품의 특이한 점은 자신의 생령과 조우하는 신들이다. "죽기 전에 사람들은 자신의 생령과 조우하게 된다"는 동생 니콜라이(카렐 로덴 역)의 주장은 알고 보면 러시아 어느 지방에서 내려오는 미신인지도 모른다. 생령은 하얗게 눈을 뒤집고 출몰하는데 루치오 풀치 감독의 <비욘드>(1981) 이후에 백안(白眼)을 공포의 클리셰로 오랫만에 제대로 사용한 경우다.(게다가 비욘드의 경우 생령이 아니라 실제 눈먼 여인이었다) 생령은 영화의 주인공들에게는 두려움 또는 기피의 대상이지만 이들이 그들 앞에 나타나는 이유는 해석의 여지를 다분히 남겨 놓는 것도 이 영화의 매력이다. <애프터매스>를 기억하는 팬은 어쩌면 그의 장편 데뷔작에서 피가 흥건한 고어 신을 기대했는지도 모른다.

물론 그런 끔찍한 장면도 딱 하나 있다. 그러나 영화를 전반적으로 지배하는 정서는 오싹함(eeriness)이다.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안정된 톤을 유지한다.

인상적인 것은 살인을 저지르는 아버지에 대한 묘사다. 그는 일말의 동정이나 감정이입을 허용하지 않는 절대악이다. 장르 특유의 극단적인 가부장제에 대한 반명제다. 이런 측면에서 영화는 <주온> 시리즈의 근간이 되는 모자 살해 사건을 떠올리게 한다. 시공간 속에서 뒤틀린 인과관계의 매듭을 근본적으로 풀 수 없다는 측면에서 할리우드적 장르 공식에서 벗어난다는 점 역시 공통점이다. 차이가 있다면 <주온>은 공포가 연쇄를 이루며 이유 없이, 끝도 없이 전염되는 식이다. 반면에 이 영화는 가족의 뿌리를 과거의 어느 시점에 회귀시켜 거둬 가는데 성공한다면 사건이 최종적으로 정리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영화는 결론적으로 주장한다. 때로는 어떤 것은 포기한 채로 '내버려 두는'(abandoned) 것이 차라리 낫다는 것을.

청소년 관람 불가. 2010년 3월 25일 개봉.

<정용인 기자 inqbu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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