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다, 가리비가 벌어진다

2010. 3. 13. 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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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매거진 esc] '머구리'들이 직접 캔 서산의 자연산에서 수산시장의 수입산까지 조개를 찾아서

봄은 남쪽에서 온다. 지난 4일 북위 37˚6 동경 127˚의 서울시를 벗어났다. 낮 12시20분. 연식이 오래된 크레도스 승용차 위로 빗방울이 떨어진다. 이날 낮 최고기온은 6.3℃다. 한 달 전인 지난달 4일이 입춘이었다. 서울과 같은 북위 37˚언저리에, 중국 산둥성의 더저우-에스파냐의 세비야-미국 동부 버지니아주 리치먼드-샌프란시스코-일본 니가타가 있다. 더저우에도 봄이 왔을까? 최근 강남의 한 일본식 주점에서 처음 마셔본 니가타 맥주의 산지인 니가타에도 봄이 왔을까? 12시25분 비가 승용차 차창을 긋는다. 이날 새벽의 최저기온은 4.5℃였다. 그러나 계절은 가난한 사람이든 연식이 오래된 승용차든 차별하지 않는다. 가난한 사람만 봄바람이 피해가지도 않는다. 연식이 오래돼 연비가 나쁜 승용차라고 봄비가 피해가지도 않는다. 하늘은 어두웠지만 분명 이날 최저기온은 4.5℃, 영상이었다.

자연산-양식 차이는 게가 있는지 여부

서해안 고속도로를 내처 달렸다. 송학 인터체인지를 지나 두 개의 방조제를 지났다. 오후 3시5분. 충남 서산시 대산읍에 들어섰으나 목적지는 쉽게 찾아지지 않았다. 전화로 다시 설명을 들었으나 설명대로 찾아간 도로는 갑자기 끊겨 있었다. 회색 구름이 잔뜩 낀 하늘에서 계속 비가 내렸다. 한 번 더 돌아간 도로는 역시 끊겨 있었다. 작은 표지판이 서 있었다. '계속 갈 수 있습니다.' 길을 잘못 든 게 아닐까 의심이 들게 할 정도로 좁은 콘크리트 1차로 도로를 탔다. 등 뒤에는 현대스틸산업, 삼성석유화학 공장이 있었다. 이런데 자연산 가리비가 날까 의심이 드는 찰나, 마법처럼 갈대와 수풀로 좁아졌던 시야가 탁 트였다. 넓은 가로림만의 일부다. '덕수네 가리비'는 바다 앞에 있었다.

이곳에서 가리비는 봄을 알리는 조개다. 가리비과(Pectinidae)에 속하는 해산 패류로서, 특히 가리비속(Pecten)에 속하는 종들을 말한다. 연안으로부터 매우 깊은 수심에까지 서식하며, 전세계에 분포한다. 4~5개월 된 것이 가장 맛이 좋으며, 이 시기의 가리비는 회로 먹기도 한다. 가리비는 사시사철 채취할 수 있다. 그러나 이론적으로만 그렇다. 가리비는 수심이 최소 10m가 넘는 바다에서만 채취할 수 있다. 중국·북한산이 아닌 자연산 가리비는 서해 일대에서 아주 적은 양만 잡힌다. 잠수부들이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 손으로 캔다. 파도가 높고 바람이 센 겨울엔 배를 띄울 수 없다. 비가 와도 배는 뜨지 않는다. 봄이 오면 배가 뜬다. 키조개, 새조개도 봄을 알리는 제철 조개다. 김덕수 사장은 '머구리'들이 키조개와 새조개를 잡는다고 설명했다. 머구리란 심해 잠수부를 일컫는다. 북위 37˚00의 바다에서 머구리는 조개를 캔다. 4일에도 비가 와 배가 뜨지 않았다. 다행히 이틀 전 전화해서 미리 자연산 물량을 확보할 수 있었다.

연탄에 올려 1분이면 가리비가 벌어진다. 집게로 가리비를 살짝 집었을 때 살이 떨어지면 곧바로 먹는다. 너무 익히면 외려 맛이 없다. 자연산과 양식의 가장 큰 차이는 게가 있는지 여부라고 김 사장은 설명했다. 자연산 가리비가 입을 벌리자 작은 게가 기어나왔다. 살짝 익힌 가리비 살을 입에 넣었다. 그림 동화에 나오는 헨젤과 그레텔은 과자로 된 집을 뜯어 먹었다. 바다가 조개·생선이 가득한 해물탕이라면 그 바다를 한 숟갈 떠먹는 맛이었다. 독곳리도 사람 사는 마을이다. 주민들은 아마 가끔 이완구 충남도지사가 세종시 문제로 사퇴한 게 옳은지, 유상곤 서산시장이 시정을 잘하는지 토론할지 모른다. 두 지자체장 모두 한나라당 소속이니 지방선거도 이슈일 게다. 그러나 가리비 맛은 지방선거와 상관없다. 그냥 봄의 맛이었다. 독곳리 바다와 비슷한 북위 37˚03에 이탈리아 시칠리아의 시라쿠사가 위치한다. 시칠리아 바다에도 봄이 왔을 게다.

봄은 북에서 올 수도 있다. 가리비에 한해서는 그렇다. 조개구이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봄은 북에서 온다. 북에서 출발한 봄은 5일 새벽 1시 서울 노량진 수산시장에 도착한다. 봄이 가져온 건 북한산 가리비다. 새벽 1시부터 4시까지 조개부터 활어까지 각종 어패류 경매가 이뤄진다. 구매자는 해산물 도매상이다. 전문 경매인이 마이크를 잡는다. 번호가 달린 모자를 쓴 도매상들이 경매인 주위를 감싼다. 경매는 빨리 낙찰될 경우 30초도 되지 않아 끝난다. 조개류 경매는 일요일 새벽을 제외하고 6일 내내 새벽 1시께 이뤄진다. 우리가 먹는 가리비는 대부분 중국·북한산이다. 국내 자연산 가리비는 거의 유통되지 않는다. 5일 새벽 노량진 수산시장에서는 800㎏의 가리비가 경매로 팔렸다. 1㎏에 5000원의 가격에 낙찰됐다. 새벽 2시30분 노량진 수산시장 건물을 벗어나는 순간 세상은 조용했다. 다음날 가리비를 먹을 사람들은 아직 자고 있다. 그들이 자고 있는 사이에 봄은 노량진 수산시장을 통해서 서서히 번져갔다.

우리가 먹는 것은 대부분 중국·북한산

그러니까 봄은 어디서든 온다. 피부로 봄바람을 맞는다. 두피에 봄비가 떨어질 수도 있다. 눈으로도 봄이 온다. 그러나, 혀를 거칠 때 계절은 몸을 관통해 지난다. 가리비, 키조개, 새조개 등과 주꾸미를 먹으면 봄을 먹는 거다. 요리사의 현란한 조리법이나 소스의 깊은 맛을 요리의 최고봉으로 치는 미식가라면 '그까짓 조개'라고 폄하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때로 요리는, 재료의 맛만으로 감동을 줄 때가 있다. 봄을 느끼기 위해 북위 37˚6을 꼭 벗어나지 않아도 된다. 입춘이 막 지난 지난달 17일 찾은 서울 강남의 '달래네 조개찜'에서도 봄을 먹을 수 있었다. 그날 밤 폭설이 왔지만 춥지 않았다. 알코올 때문만은 아니었다. 가리비, 새조개, 키조개, 주꾸미가 봄철 먹거리다. 봄철 먹을거리를 먹으면 봄이 온다. 아무튼, 봄은 온다.

서산=글 고나무 기자 dokko@hani.co.kr·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

자연산 당기면 미리 전화하삼

◎ 덕수네 가리비 | 자연산 가리비 구이 1㎏ 1만7000원(양식 1만원). 날씨가 궂으면 자연산 가리비가 없다. 자연산을 먹고 싶으면 미리 전화하고 가는 게 좋다. 근처에 황금산이 있어 트레킹도 할 수 있다. 숙박시설은 차로 5분 거리인 삼길포까지 가야 한다. 충남 서산시 대산읍 독곳리 569-62. (041)667-7513.

◎ 노량진 수산시장 | 조개류를 싸게 살 수 있다. 거대한 키조개는 3개에 1만원 선, 수입 가리비는 1㎏에 1만원 선이다. 새벽 1~4시 경매가 열린다. 일반인도 회원 가입을 하면 매일 해산물의 경락가격(도매가)을 확인할 수 있다. (02)814-2211. http://www.susansijang.co.kr

◎ 달래네 조개찜 | 서울 강남 학동사거리에 있다. 조개찜, 조개 떡볶이, 문어 초회 등이 괜찮다. (02)3445-9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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