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투표', '친박 죽이기'.. 세종시 올인한 친이
다들 출구전략이려니 했다.설이 지난 후에도 세종시 수정안에 대한 여론이 맘먹은 대로 올라가지 않은 터라 청와대나 친이계 처지에서는 돌파구가 필요했다. 당론 변경을 위해서는 최소한 113석이 필요한데, 친박이 똘똘 뭉친 데다 중립 성향의 의원들도 여론과 '미래 권력'의 눈치를 살피는 터라 쉽지 않아 보였다. 야당이 버티는 본회의 통과는 더더욱 난망했다. 그래서 한나라당 지도부가 '당론 변경을 위한 끝장 토론과 투표'를 제안했을 때 정가에서는 "손 털고 나올 핑계를 찾는 것이다"라는 관측이 나왔다.
그런데 막상 '끝장 의총'이 시작된 후 돌아가는 분위기는 사뭇 다르다. 청와대와 친이계에서는 당론 변경에 대해 자신 있다는 소리가 연달아 나온다. 청와대의 한 관계자는 "113표를 이미 확보했다"라고 하고, 한나라당의 한 친이계 인사는 "아니다. 120표도 넘었다"라고 주장한다. 청와대나 친이계가 이미 의원 개개인의 표심을 파악하고 표 단속에 들어갔다는 의미다. 이렇게 보면 친이계의 당론 투표 강행은 손 털고 나오려는 방어적 출구전략이 아니라, '당론 확정→여론몰이→본회의 통과'라는 적극적 출구전략이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친이·친박 간 견해 차이만 확인한 세종시 의총. 친이 측은 이제 투표 불가피론을 주장한다. |
그렇다면 여권 주류의 자신감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검찰 출신의 한 야당 중진의원은 "청와대의 잇따른 '비리 척결' 언명을 주목하라"고 말한다. "집권 세력의 최대 무기는 권력기관을 움직일 수 있다는 거다. 청와대가 교육 비리 척결, 지방 토호세력 척결 등 갑자기 사정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는데, 그 와중에 반대 세력이 주요 타깃이 될 가능성이 높다"라는 분석이다.
아닌 게 아니라 '끝장 의총'이 시작됨과 동시에 터져나오기 시작한 '친박 사정설'은 예사롭지 않다. 친박 중진인 홍사덕 의원은 "(청와대 참모진이 세종시 원안을 주장하는) 의원 누구에 대해 마치 무슨 흠이 있는 듯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니면서 위협하고 있다. 하나의 사례는 이미 파악했고, 한 가지 사례만 더 나오면 공개적으로 이야기하겠다"라고 한 라디오 방송에서 말했다.
이성헌 의원은 한발 더 나가 박근혜 뒷조사설을 폈다. "지난해 박근혜 전 대표에게 어느 종파의 중진 스님을 소개해 같이 식사를 한 적이 있는데 며칠 뒤 정보기관 사람이 그 스님을 찾아와 박 전 대표를 왜 만났고 무슨 얘기를 했는지 꼬치꼬치 캐물었다고 한다. 시대가 바뀌었는데 그런 이야기가 다시 나온다는 것이 참 안타깝다."
이처럼 친박 진영에서 직접 '뒷조사설'을 정면으로 제기하고 나선 계기에 대해 한 친박 의원은 이렇게 설명했다. "얼마 전 친박 의원 8명이 함께 모인 자리가 있었다. 한 의원이 '최근에 사업하겠다고 나간 비서로부터 연락이 왔는데, 권력기관에서 내 뒷조사를 한다더라' 하고 한마디 툭 던졌다. 그랬더니 여기저기서 '나는 전 근무처에서 연락이 왔다' '나는 30대 기업에서 돈 받은 게 없는지 조사한다더라'는 식의 얘기가 봇물 터지듯 나왔다. 평소 온순하기만 하던 한 중진의원이 '나쁜 ××들'이라고 할 정도면 분위기가 어땠겠나. 그냥 두면 안 되겠다는 주장과 함께 차라리 공론화하자는 공감대가 형성됐다."
김무성, 검찰에 꼬리 잡혔나?
친박 사정설과 관련해 여러 '설'이 나도는 가운데, 정가에서는 두 사건을 주목한다. 하나는 이달 초 회사 대표가 구속 기소된 부산 스포츠랜드 수사다. 부산지검 외사부는 2월11일 회삿돈 44억여 원을 횡령하고 서류를 위조해 거액을 대출받은 혐의 등으로 실내 스키돔 운영사인 스포츠랜드부산의 하 아무개 대표(57·여)와 임 아무개 분양총괄본부장(44)을 구속 기소했고, 하 대표가 빼돌린 돈 일부가 정·관계 로비자금으로 사용됐을 가능성에 대해 수사 중이라고 밝혔다. 이와 관련해 정가에서는 "칼날이 부산의 친박 의원들을 향하고 있다"라는 얘기가 무성하다. 몇몇 의원의 이름이 구체적으로 거명되기도 한다. 그런 가운데 묘하게도 이 회사가 최근 친박계에서 이탈한 김무성 의원의 지역구(부산 남구)에 있어 뒷말을 낳고 있다.
친박 사정설에 이어 개헌론까지 나오자 박근혜 전 대표 지지모임인 '박사모' 회원들이 들고일어났다. 2월26일 한나라당 당사 앞에서 집회를 연 박사모. |
다른 하나는 서청원 전 친박연대 대표의 '무리한' 재수감이다. 서 전 대표는 18대 총선 당시 비례대표 공천 명목으로 특별당비를 받은 혐의로 기소돼 지난해 5월 징역 1년6개월의 대법원 확정 판결을 받았다. 의정부교도소에 수감됐던 그는 심장질환으로 지난해 7월 형 집행정지를 받았는데, 검찰은 지난 2월5일 서 전 대표 측의 2차 연장 신청을 승인하지 않고 재수감했다. 박근혜 전 대표 등 국회의원 254명이 연명한 '사면 복권 탄원서'도 소용이 없었고, "돌연사할 위험이 있다"라는 담당 의사들의 소견도 반영되지 않았다. 서 전 대표는 산소통을 옆에 낀 채 수감됐으며, 교도소에서도 잠잘 때면 산소 호흡기를 부착한다. 2월24일에는 흉통과 수면 장애 등으로 서울 신촌 세브란스병원에서 진료를 받기도 했다.
그런 서 전 대표를 두고 정가에서는 '세종시 정국의 희생양'이라는 평이 나온다. 서 전 대표를 볼모 삼아 미래희망연대(옛 친박연대)가 세종시 수정안에 반대하지 못하게 하려는 청와대의 계산법이 숨어 있다는 것이다. 올해 초 급물살을 타는 듯하던 한나라당과 친박연대의 합당론이 서 전 대표의 재수감과 동시에 수면 아래로 가라앉은 것도 청와대의 의중이 작용했다는 게 친박 측 시각이다. 미래희망연대의 한 고위 인사는 "한나라당 의원들은 내심 지방선거 전에 미래희망연대와 합당하기를 바란다. 지방선거 때 곳곳에서 친박 후보가 따로 출마하면 한나라당에 미칠 파장이 적지 않다는 판단에서다. 서 전 대표도 합당론에 찬성이다.
친박 세력이 한나라당 안팎에 쪼개져 있으면 박 전 대표에게 부담만 되니 들어가서 도와야 된다는 생각이 강하다. 그렇게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져 합당이 추진됐던 건데, 청와대가 '노' 해서 깨진 것으로 안다. 청와대는 '지금 합당하면 세종시 당론 변경에 불리하다. 113석보다 더 얻어야 하는 것 아닌가'라고 우려하는 것 같다"라고 말했다. 그는 청와대가 "3·1절 특별사면이 없다고 일찌감치 못 박은 것도 서 전 대표를 겨냥한 것이다. 대선 때 서 전 대표가 '도곡동 땅의 실제 주인은 이명박'이라는 포스코 경영진의 얘기를 폭로한 것 때문에 대통령 일가로부터 미운 털이 단단히 박혔다"고 덧붙였다.
형집행정지 연장 신청이 기각되어 재수감되는 서청원 전 친박연대 대표. |
청와대가 친박 사정설을 강력하게 부인하면서 잠시 주춤하던 '박근혜 죽이기' 논란은 이명박 대통령의 '개헌' 발언이 나오면서 또다시 불붙는 양상이다. 안 그래도 "세종시 다음은 개헌과 선거구제 개편일 것이다"라며 청와대의 박근혜 죽이기 다음 카드를 일찌감치 예견하고 있던 친박 진영은 "올 것이 왔다"는 반응이다. 이 대통령은 2월25일 권력 구조에만 손을 대는 '제한적 개헌'의 필요성을 언급했는데, 친이 진영이 그리는 개헌의 방향은 내각제나 이원집정제로 친박 진영이 주장하는 4년 중임제와 거리가 멀다.
한나라당의 한 친박 의원은 "세종시 수정을 몰아붙이는 것이나 박근혜 뒷조사를 하는 것이나 개헌을 추진하겠다는 것이나 다 박근혜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얘기다. 요즘 청와대에서 박 전 대표를 '미래 권력'이라고 쓰지 말라고 언론사에 압력을 넣는다던데, 박근혜를 인정하지 않겠다면 목숨 걸고 싸우는 수밖에 없다. 이제는 정말 전쟁이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명박 정부가 겨우 2년을 넘기는 마당인데, 차기를 둘러싼 여권 내부의 파열음은 갈수록 '하이톤'이다.
이숙이 기자 / sook@sisain.co.kr- 정직한 사람들이 만드는 정통 시사 주간지 < 시사IN >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 시사IN 구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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