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편지]서방님 혼불

임의진 목사·시인 2010. 2. 17. 1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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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두새벽 똘물 잠잠히 흐르고 눈물고개 과수댁 물동이 질 시간. 저도 모르게 깼다가 다시 눈 감았으리. 요샌 수돗물 시원하게 쏟아지니 누가 머리꽁지 무거운 물동이를 지랴. 까글한 쇠손 얼음덩이로 곱아들지 않아도 되는 세상, 고르릉 고르릉 팔순 구순까지 살았으면 싶어 과수댁은 하루 늙는 일도 서럽다. 쇠꼴냄새 따라 무정하게 가버린 서방님 극락왕생 하옵시라 물 한 그릇 떠놓았지. 경기도 사는 큰딸이 믿어보라 사다준 가죽양장 성경책은 가끔 라면 끓일 때 받침으로 쓰는데, 언제부턴가 그래선 안 될 거 같아 백양사 달력 옆에 올려놓고 빈다. 천지신명님 말씀 책으로 받드는 것, 까막눈이라 읽어볼 일이야 없겠지만서두.

곧 매화 피겠구나. 공동묘지 사이 뙈기밭엔 봄쑥 오르겠다. 솨솨 솔바람 치던 귀신골도 꽃비가 내려쌓이리. 엿장수로 장터마다 떠돌던 오정리 아재는 과수댁 남기고 죽은 죄로 장날마다 꿈에 나와 현몽한다. 변변한 화장품 한번 사주지 못한 죄가 커서 천리향 나무는 만리나 가게끔 울창하게 살펴주고, '암시랑토 않게코롬(별고 없도록)' 날마다 대문간 안에서 지켜 살피시는 혼령이시여. 교회의 성인 천사들이나 다를 바 없는 서방님의 혼령이, 혼불들이 밤마다 마을의 불침번이다.

미명에 나는, 교회 다니는 교인들이 마을을 비운 사이 서방님 혼불들을 종종 만난다. 양심도 없이 저 혼자 먼저 좋은데 천국으로 가버려 새로 젊은 선녀랑 바람이 났다는 혼령들은 내 전혀 알 바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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