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심 걷는 해는 어디쯤 떴을까

2010. 1. 22. 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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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디아스포라의 눈 /

지난해 말 열흘가량을 파리에서 보냈다. 내내 잔뜩 흐리고 때때로 눈까지 뿌렸다. 정말 파리의 겨울다운 우울한 날씨였다. 이번 여행 목적의 하나는 여러 디아스포라들을 만나는 일이었다.

도착 다음날 파리 제7대학 아자데 키안 교수를 만났다. 그와는 지난해 9월 이화여대에서 열린 학회에서 알게 됐다. 학회에서 그는 이른바 '히잡(스카프) 논쟁'을 예로 들며 서구 지식인의 자기중심주의를 날카롭게 비판하는 논지를 펼쳤다. 그의 일가는 팔레비 국왕 시절 엘리트층에 속했다. 아버지는 이란혁명 당시 사형선고를 받고 도피생활을 하다가 파리로 망명했다. 젊어서 조국을 떠난 이 여성은 미국에서 공부하고 지금은 파리에서 가르치고 있다. 보수 엘리트층 출신인 그가 어떻게 진보적 사상을 갖게 되고 서구중심주의 비판자가 됐는지 자세히 들어보고 싶었으나, 유감스럽게도 시간이 충분치 못했다.

그다음에 만난 사람은 나세르라는 팔레스타인 아티스트다. 1948년 '나크바'의 해에 그는 요르단강 서안의 제닌 근교에서 태어났다. '나크바'란 제1차 중동전쟁 결과 팔레스타인 사회가 파괴당하고 대량 난민이 발생한 '대재앙'을 가리킨다. 그의 아버지는 팔레스타인 인민군 사령관이었다. 프랑스에 이주한 지 30년이 됐단다. 이스라엘이 요르단강 서안과 가자에 진군해 점령한 1968년 제3차 중동전쟁을 계기로 고국을 등졌을 것이다. 레바논 출신 아내와 함께 몽마르트르에서 살고 있다. 지금은 프랑스에서 낳은 아들이 평화운동가로 열심히 활동하고 있다고 했다.

세번째는 하린카라는 유대계 여성 아티스트. 그는 칠레에서 태어났으나 폴란드에서 칠레로 이주한 아버지한테서 이주 이유나 경위에 대해 생전에 한마디도 듣지 못했다고 한다. 어머니는 독일에서 1939년 칠레로 이주한 유대인이었다. 그때가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해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해니까, 어머니의 탈출과 이주는 "기적이었다." 하린카는 부모의 집안유래에 대해 지금도 거의 아는 게 없다.

형 둘이 한국에서 투옥당하고 난 뒤 우리집 설날은 어색해졌다. 그 자리에 오지 못한 형들에 대한 수심이 모두의 얼굴에서 떠날 수 없었던 건 당연했다. 그 시절 우리처럼 한숨의 나날을 보내는 가족들이 한국에도 세계에도 많이 있다는 걸 잊어선 안 될 것이다. 한탄 어린 설날은 지난 이야기가 아니다.

그는 피노체트의 군사쿠데타 몇 개월 뒤 19살 나이에 이스라엘로 이주했다. 새로운 삶을 꿈꾸며 키부츠에 들어갔던 것이다. 그러나 그곳의 군대와 같은 규율과 권위주의에 적응하지 못했다. 게다가 이스라엘 국적을 취득한 그에게 병역의무가 부과된 사실을 알게 됐다. 안주할 나라를 얻는다는 건 팔레스타인 사람들 억압에 가담하는 대가였던 셈이다. 국가라는 것의 본질과 그때 조우했던 것이다. 지금도 이스라엘에는 국가의 불의에 가담하기를 거부하는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이 적지 않다. 나는 하린카 이야기를 들으면서 은국님을 생각했다. 하린카는 키부츠에서 몰래 팔레스타인 지원활동을 벌이고 있던 연인과 둘이 파리로 옮겨 갔다. 하린카는 말했다. "이스라엘에서도 칠레에서도 나는 이방인이었어요. 물론 파리에서도 그렇지만, 그래도 여기는 모두가 이방인이니까 마음이 편해요." 그의 작품은 아스라하게 어떤 흔적이 떠오르는 듯한 추상화다. 지워져버릴 것 같은 그 자신의 궤적을 더듬고 있는 것 같다. 파리 시내에서도 벨빌이나 나시옹 같은 서민 동네에서는 색색의 얼굴을 한 잡다한 사람들이 밀치락달치락 오가고 있다.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나세르나 하린카와 같은 사연을 가슴에 품은 채 살아가고 있다.

특별할 것도 없이 새해가 밝았고 벌써 열흘이 지났다. 일본에서 섣달그믐과 정월 초하루는 가족이 모두 모이는 중요한 날이다. 우리 형제가 어렸을 때 우리 집에서는 가족 모두가 함께 일본식 떡 만들기와 대청소를 하거나 새해맞이를 위한 장보기를 하러 갔다. 섣달그믐의 바쁜 일정이 한밤중에 일단락되면 모두 신사에 참배하러 갔다. 학문의 신을 모신 그 신사에는 수호신인 소 석상이나 동상들이 여기저기 있었다. 어머니는 그 소 머리를 매만진 통통한 손으로 우리 형제들 얼굴을 동글동글 쓰다듬으며 웃었다. 그렇게 하면 머리가 좋아진다는 얘기가 전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새해에 모여든 아이들에게 아버지가 인사나 훈시 같은 한 말씀을 하셨다. 새해 음식은 어머니가 솜씨를 발휘한 일본식 설 요리와 함께 조선의 제사 요리도 나왔다. 우리 설날은 그처럼 일본문화의 영향을 거의 그대로 받아들이면서도 자세히 보면 조선문화의 단편들이 뚜렷이 남아 있었다.

이윽고 아이들이 자라 대학에 진학하고 한국이나 도쿄에 가면서 우리 집 설 풍경은 바뀌었다. 아이들은 부모나 사회에 반항하면서 자신이 믿는 길을 가려고 했다. 형 둘이 한국에서 투옥당하고 난 뒤 설날은 더욱 서먹서먹하고 어색해졌다. 남은 가족들이 모였고 어머니는 변함없이 설음식을 준비했다.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될 수 있는 한 약한 소리나 푸념을 늘어놓지 않으려 애썼다. 하지만 그 자리에 오지 못한 형들, 추운 감옥에 있는 형들에 대한 수심이 모두의 얼굴에서 떠날 수 없었던 건 당연했다. 즐거워야 할 설 모임은 종종 누군가의 한숨 소리와 함께 언쟁이나 눈물 사태로 이어졌다.

그런 설이 10년간 이어지다가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고 그 3년 뒤에는 아버지도 돌아가셨다. 형 둘이 출옥한 것은 그러고도 몇 년이 더 지난 뒤였다.

그리고 또 20여년의 세월이 더 흘렀다. 사람이 나이를 먹고 언젠가 세상을 떠나는 건 피할 수 없는 일이고, 이제 그 시절과 같은 설은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겠지만 그걸 한탄해서 무엇하랴. 다만 자신의 신념을 위해 어쩔 수 없이 고통을 견뎌내야 하는 젊은이가 지금도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시절의 우리처럼 탄식과 한숨의 나날을 보내고 있는 가족들이 한국에도 세계에도 많이 있다는 걸 잊어선 안 될 것이다. 사람들의 고통과 탄식은 결코 지난 시절의 얘기가 아니다.

서경식/도쿄경제대 교수

번역 한승동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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