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인생 50년 지휘자 정명훈 "주어진 현실 따라가다 보니 지휘자의 길"
50년이 흘렀다. 1960년 10월, 서울 시공관에서 김생려(1912~1995)가 지휘하는 서울시립교향악단과 하이든의 '피아노 협주곡 D장조' 3악장을 연주하며 '꼬마 피아니스트'로 데뷔했던 까까머리 정명훈. 그가 어느덧 57세의 지휘자가 되어 있다.

정명훈이 자신을 지휘자로 만든 여러 인연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김창길 기자지난 11일 오후 서울시향 예술감독실에서 만난 그는 일종의 '운명론'을 털어놨다. "스스로 지휘자가 되길 원하지 않았고, 그냥 주어진 현실을 따라갔을 뿐"이라는 얘기였다. 그 '현실'은 다름아닌 '사람'이었다. 그는 "어머니와 두 누이(정명화·경화), 지휘자 카를로 마리아 줄리니와 작곡가 메시앙"을 자신의 음악 인생 50년에 가장 커다란 영향을 미친 인물로 꼽았다. "그밖에도 몇몇 사람이 나를 음악가의 길로, 구체적으로는 지휘자의 길로 이끌었지만, 그 다섯 명만큼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은 드물다"고 회고했다.
"어머니는 나를 한번도 꾸짖은 적이 없어요. 항상 '잘한다'고만 했지. 자식을 그렇게 긍정적으로 지원하는 건 정말 어렵거든요. 두 누님은 나의 첫번째 음악 선생이나 마찬가지였죠. 누님들과 함께 연주하면서 앙상블(조화)을 깨달았으니까. 나는 그렇게, 누군가를 뒤따라가는 걸 좋아하는 편인 것 같아요. 1978년 LA필하모닉 부지휘자로 갔을 때만 해도, 지휘자가 되겠다는 결정을 내리지 못한 상태였어요. 그냥, (당시 상임지휘자였던) 줄리니 선생을 좋아해서 갔던 거죠."
그는 2005년 타계한 지휘자 줄리니에 대해 "지휘자나 연주자들은 청중의 박수를 받으려는 욕망이 큰데, 그분은 오직 음악에만 집중했던 정말로 순수한 사람"이라고 평했다. 가장 존경하는 작곡가로 손꼽은 올리비에 메시앙(1908~1992)에 대해서는 "성자 같은 분"이라고 말했다. 프랑스의 작곡가 메시앙은 정명훈이 자신의 작품 '투랑갈릴라 교향곡'을 녹음했을 때 "최고의 해석"이라고 극찬한 바 있으며, 세상을 떠나기 1년 전에 정명훈을 위해 < 4인을 위한 협주곡 > 이라는 음악을 쓰기도 했다. 그밖에도 정명훈은 자신을 지휘자의 길로 이끈 여러 '우연'들을 이렇게 소개했다.
"어릴 때는 피아노보다 운동에 빠졌어요. 농구, 미식축구, 수영, 육상 등등, 안 해본 운동이 별로 없어요. 내 주특기가 롱 점프(멀리뛰기)와 장애물 달리기였다니까. 그러다가 열세살 때 누님들이 (러시아 출신의 첼로 거장) 피아티고르스키 앞에서 오디션 받을 때 제가 반주자로 따라가게 됐어요. 브람스의 '더블 콘체르토'를 연주했는데, 다 듣고 난 피아티고르스키가 '너 지휘해볼 생각 없냐'고 하는 겁니다. 그게 지휘를 권유받은 첫 경험이었어요. 그후 뉴욕으로 가서 메네스음대 학장 앞에서 누님들과 또 오디션을 봤는데, 그때 학장이 피아노만 하지 말고 지휘까지 공부하겠다면 입학을 허가하겠다고 하는 겁니다. 장학금까지 준다면서. 그래서 지휘를 정식으로 공부하게 된 거죠."
그렇게 지휘자의 길을 걷게 된 정명훈은 예술감독 취임 6년째로 접어드는 서울시향의 연주력에 대해 "이제야 아시아 정상급의 여러 오케스트라 가운데 하나"라고 자평했다.
"5년 전에 아시아를 대표할 만한 실력있는 오케스트라들이 거의 다 일본에 있었어요. 약 10개쯤 되죠. 이젠 서울시향이 거기에 추가된 것이고, 그중에서도 상당히 잘하는 축에 든다고 볼 수 있죠. 물론 NHK교향악단이 우리보다 뛰어나다는 걸 부인할 순 없어요. 일본 최고의 연주자들이 다 모이는 곳이니까. (제가 특별예술고문을 맡고 있는) 도쿄필하모닉도 NHK교향악단을 따라가지 못합니다. 서울시향과 비슷한 수준이죠. 앞으로 유럽과 어깨를 겨룰 수준까지 가려면 아직 할 일이 많습니다. 그것도 한 5년쯤 걸리지 않겠어요?"
최근 한국의 차세대 연주자들에게 유난히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는 정명훈은 "그게 앞으로 내가 해야 할 일"이라고 했다. 그는 20대의 피아니스트 김선욱과 손열음에 대해 "내가 그 나이였을 때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뛰어난 친구들"이라고 평했다. 또 올해 15세의 어린 피아니스트 조성진에 대해서는 "그 '꼬마'하고 작년에 협연을 가장 많이 했다"면서 "시야가 넓고 어른스럽다"고 말했다. 종종 피아니스트로 무대에 서기도 하는 그는 "성악가를 반주해주고, 다른 연주자들과 협연하는 게 재미있어서 가끔 하는 것일 뿐"이라며 "취미 생활로 봐주면 좋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앞으로 3년 남았어요. 60세가 되면 모든 공식 직함에서 물러나 제가 꼭 하고 싶은 지휘만 가끔씩 할 겁니다. 스승이었던 줄리니 선생이 그랬던 것처럼요. 라디오 프랑스 필하모닉의 음악감독도 2012년에 끝나요. 더할 생각이 없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친구' 같은 오케스트라만 가끔 객원 지휘하는 거죠. 이를테면 이탈리아의 라 스칼라 필하모닉 같은 곳이요."
정명훈은 그 말 끝에 "서울시향은 친구 이상의 오케스트라"라고 강조했다. 올해 8월부터 2년에 걸쳐 서울시향과 '말러 교향곡 시리즈'를 선보일 그는 "말러의 교향곡은 마치 오페라와 같다"면서 "평생의 희로애락이 다 녹아 있는, 대단히 정서적이고 강렬한 음악. 그래서 말러는 지휘자의 육체를 몹시 지치게 만드는 작곡가"라며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 문학수 선임기자 sachimo@kyunghyang.com >- 대한민국 희망언론! 경향신문, 구독신청(http://smile.khan.co.kr) -ⓒ 경향신문 & 경향닷컴(www.kha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경향닷컴은 한국온라인신문협회(www.kona.or.kr)의 디지털뉴스이용규칙에 따른 저작권을 행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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