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으로 씨름판 돌아온 이봉걸의 '잊을 수 없는 순간'

2009. 12. 2. 1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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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하장사 얘기 나오면 공식처럼 떠오르는 인물이 이봉걸이다. 씨름꾼의 대명사 김성률을 은퇴시키고 민속 씨름판을 스타들의 향연으로 물갈이한 주인공. 그가 있어 사람들은 많이 즐거웠고 신바람이 났다. 잇단 무릎 부상으로 서른 중반에 샅바를 풀고 사업에 뛰어들었던 그가 최근 에너라이프 씨름단 감독이 되어 모래판으로 돌아왔다. 2m5, 125㎏의 거구에 출중한 기량까지 겸비했던 진정한 씨름판의 영웅. 그래선지 그에게는 추억할 거리도 유독 많았다.  < 최재성 기자 kkachi@sportschosun.com>

89년 10월 천하장사 결승왜 그는 머리카락 한올 때문에 땅을 쳤을까?

안타까운 은퇴 → 사업 시련 → 감독으로 모래판 복귀 '뒤집기 인생'중학교시절 가출 밥먹듯 … 김성률 장사 꺾은 신화는 유명한 일화

◇민속 씨름의 화려한 부활을 고대하는 이봉걸은 "일본의 스모가 국가의 지원으로 탄탄하게 명맥을 유지하는 것처럼 우리 씨름도 소리, 한복과 더불어 영구히 보존되어야 할 전통문화"라고 강조했다. < 홍찬일 기자 hongil@sportschosun.com >

 ▶질풍노도의 시기

 경북 영양에서 나고 자랐다. 키가 크고, 힘이 세 별난 어린 시절을 보내다 1969년 대구 영신중 입학과 함께 유도에 입문했다. 연습은 주로 대구시청 뒤 유도회관에서 했다. 마침 거기에는 영남대 유도선수가 운동하러 다녔는데 키(1m76) 때문인지 툭하면 이봉걸을 붙들고 애를 먹였다. 기술 가르쳐 준답시고 수시로 누르고, 조르고, 꺾어댔다. 체격이 좋다 해도 기술도 없는 열세 살짜리가 용을 써본들 얼마나 쓸까. 결국, 무지막지한 조르기에 세 차례나 기절했고, 석 달 만에 낙향해 버렸다. 시골서 자란 순박한 마음에 적잖은 상처를 받은 것이다. 깜짝 놀란 어머니가 떡까지 해 대구로 데려다 줬지만, 이틀 만에 또 내려갔다.

 "도저히 못 하겠더라고요. 그래서 농사지었죠, 뭐. 이듬해엔 영양읍내 제과점에 취직해 제과-제빵 기술을 배웠습니다. 급식 빵을 만들던 큰 빵집이었어요. 거기서 한 2년 정도 일하다 다시 집에 돌아가 농사를 지었습니다." 시골은 답답했다. 이미 바깥바람을 쐰 터라 정도는 더 심했다. 그래서 친구와 둘이서 집을 뛰쳐나가 인근 마을에서 머슴살이를 했다. 멀리 도망갈 경비 마련을 위해 두 달만 하기로 하고 풀도 베고, 나무도 하고, 추수도 했다. 그러다가 달포 만에 아버지에게 끌려갔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허파에 바람 잔뜩 든 그를 말릴 이는 아무도 없었다.

 "열흘 후에 소 판 돈 300원을 훔쳤습니다. 친구는 고추 두 근을 팔았고요. 자장면 한 그릇 40원 할 때니까 큰돈은 아니었어요. 돈 많으면 게을러진다고 집에서 조금씩만 가져오기로 했거든요." 이번엔 좀 멀리 묵호항으로 가 생선 리어카를 끌었다. 한데 비린내 때문에 이틀 만에 두 손 들고 제 발로 귀가했다. 세 번째 도망처는 태백. 거기서 석탄 화물차 보조기사로 또 몇 개월 보냈고, 역시 중도 하차해 낙향했다. 그 후 4H 활동으로 가마니도 짜고, 그 힘들다는 담배 농사도 지었다. "담배 농사요? 말도 마세요. 밭에 들어가면 죽을 듯이 덥지요, 진딧물 농약 치는 거 괴롭고 힘들지요, 잎 따서 엮고 찌고 하는 과정 또한 장난 아닙니다." 나중엔 영덕에 있는 산으로 들어가 특수작물 재배도 하고, 양봉업자 따라다니며 벌도 쳤다. 그야말로 몸부림을 쳤다. 그렇게 6년을 방황하다가 마침내 화두를 풀었다. 답은 운동이었다.

 ▶새로운 출발선에 서다

 더는 안 되겠다 싶어 김택수 당시 대한체육회장에게 편지를 보냈다. 영신중 시절의 억울한 사연과 함께 '1m96, 94㎏이다. 운동하고 싶다'는 내용도 담았다. 그 편지는 경북체육회 사무국장에게 전달되었고, 올라오라는 연락이 왔다. 계성고 갈까, 영신중에 편입할까 고민하다가 영신중을 택했다. 1학년으로 떠난 지 6년 만에 3학년으로 편입했다.

 "동기들은 이미 대학생이 되어 있었죠. 친구들과 만나면 어쩔 수 없이 술집에 가야 했어요. 저 때문에 대학생들이 빵집에 갈 수는 없잖습니까. 사복을 입어도 삭발이라 번번이 제지당했지만, 그때마다 주민등록증 보여 주고 들어갔죠. 중3 때 당당하게 술집 드나든 사람은 저밖에 없을 겁니다."

 이번엔 씨름을 하기로 했다. 학교에서는 단 한 명을 위해 없던 씨름부를 만들었고, 훈련은 영신고 씨름부와 함께 했다.

 나이는 고3보다 많았지만, 어차피 서열은 학년이었다. 고교 씨름부에 중3짜리가 들어갔으니 선배들 뒤치다꺼리는 도맡을 수밖에.

 "옷 빨래, 신발 빨래, 잔심부름, 정말 질리도록 했습니다. 그러고도 몽둥이는 달고 살았죠. 그래도 그 몽둥이 덕 많이 봤습니다. 훈련할 때 맞은 쪽으로 넘어지면 아프니까 그쪽으로 안 넘어지려고 버티면서 저절로 실력이 는 거죠."

 ▶모래판 세대를 바꾼 사건

 정규 훈련은 하루 2시간이었지만, 그 강도는 가히 '지옥급'이었다. 모래판 중앙에 버티고 서서 부원들을 상대로 이기든 지든 연속 20~30판은 치러야 휴식이 주어졌다. 말이 휴식이지 가쁜 숨만 돌리고 다시 샅바를 조여야 했다. 그렇게 다섯 번은 지옥을 갔다 와야 훈련이 끝났다. 워낙 연습벌레라 그런 지옥훈련은 프로에 가서도 계속했다.

 "고2 때 전국대회를 제패할 기회가 많았지만, 일부러 안 했습니다. 선배들을 처박으면 학교에 돌아가 박살 날 게 뻔했기 때문에 일부러 넘어져 줬습니다."

 마침내 더 이상 선배가 없는 고3 시절이 왔고, 4월 서울 문화체육관에서 벌어진 협회장기 대회에서 7전 전승으로 우승했다. 중학생부터 일반인까지 모두 출전하는 무제한 무대였다. 거기서 조별예선 선두로 장사급 8강에 올라 당대 최고 장사 김성률을 비롯해 이강근 김희원 홍현욱 등을 추풍낙엽처럼 쓰러뜨렸다. 그해 가을 진주공설운동장에서 열린 대통령기 장사급 8강 리그에서 또 김성률을 눕히며 우승했고, 한 시대를 풍미했던 김성률은 그 길로 은퇴하고 말았다. 세대교체의 주역이 된 것이다. 그 사건을 계기로 한국 씨름판은 이봉걸 홍현욱 이준희 등에게로 넘어갔다.

 ▶머리카락에 무릎 꿇은 골리앗

 89년 10월, 천하장사 결승에서 김칠규와 맞닥뜨렸다. 설악산 대청봉을 2차례나 오르는 등 하계훈련을 강하게 한 터라 기대를 많이 한 대회였다. 서른셋에 삭발까지 했으니 각오가 어땠는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제 마지막 장애물만 걷어내면 정상이라 기운이 펄펄 솟고 불 같은 파이팅이 심장을 달굴 시점이었다.

 한데 온몸이 물먹은 종이처럼 축 늘어졌다. 배가 너무 고팠다. 예선도 쉽잖았지만, 8강에 올랐을 무렵엔 뭔가 조치가 필요했다. 8강전을 앞두고 매니저에게 SOS를 보냈다. 어디 가서 초밥 좀 사오라고. 경기장 근처에 입맛대로 가게가 있을 리 만무했다. 매니저가 초밥집을 찾는 동안 8강전이 진행됐고, 다행히 4강에 올랐다.

 불행은 계속됐다. 매니저가 초밥을 들고 달려오는데 4강전 출전 명령이 떨어졌다. 입도 못 대 보고 허기진 배를 쓸며 다시 모래판에 올랐다. 또 이겼다. 이제 결승전만 남았고, 시간적 여유가 있어 충분히 허기를 달랠 수 있게 됐다.

 결정적인 문제는 거기서 터졌다. 초밥 먹으러 매니저 따라 라커룸으로 갔는데 초밥이 온데간데없는 게 아닌가. 그새 누군가 들어와 먹어치운 것이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기대감이 무너지면서 기운은 더 빠졌고, 전의를 상실한 채 결승전에 들어갔다.

 "얼마나 허기가 지는지 정신이 다 몽롱하더라고요. 네 번째 판이 끝나 2대2가 된 상황에서 제 코너로 가야 하는데 방향을 잘못 잡아 엉뚱한 중립코너로 걸어가기까지 했습니다."

 결국, 마지막 판에서 져 2대3으로 천하장사 타이틀을 날려버렸다. 이듬해 무릎 부상으로 은퇴하는 바람에 그게 마지막 천하장사 대회가 되고 말았다.

 "생각할수록 아쉬운 순간입니다. 정말 준비 많이 했었는데 기술도 아니고 허기 때문에 졌으니…."

 그날 아침 서울 방이동 숙소에서 아침을 먹는데 숟가락을 들자마자 목에 뭔가가 걸렸다. 빼 보니 주방 아주머니 것으로 보이는 30㎝가 넘는 긴 머리카락이었다. 순간 입맛을 싹 잃어 숟가락을 놓고 말았다. 결국, 1g도 안 되는 머리카락 한 올이 2m5, 125㎏의 골리앗을 쓰러뜨린 셈이다. 참 두고두고 가슴을 칠 일이다.

다섯번 무릎수술 배겨낼 장사 있나요…

 ▶오른무릎 수술만 다섯 번

 무릎을 안 다쳤더라면 천하장사 몇 번은 더 했을 텐데…. 지금 생각해도 못내 아쉬운 부분이다. 85년 3월, 중심잡기 훈련을 한다고 무학산에서 뛰어내려 오다가 무릎 연골이 찢어졌다. 불행의 시작이었다. 간신히 일어나 모래판에 돌아왔으나 다시 인대가 끊어졌다. 그것으로도 부족해 두 차례나 더 연골이 파열됐다. 하필 일이 생길 때마다 오른무릎이었다. 매번 수술대에 올랐으나 그때마다 용케도 일어났다. 하지만, 운도 늘 따라주는 건 아닌 모양이다. 90년 설날대회를 이틀 앞두고 컨디션이 뚝 떨어졌다. 몸살기가 도는지 몸이 아파 움직이기가 싫었다. 전재성 감독에게 쉬고 싶다고 했다가 야단만 맞았다. 대회가 코앞인데 주장이 게으름이나 부린다는 투였다. 어쩔 수 없이 천근만근 몸을 이끌고 모래판에 올라 후배 김성호와 연습게임을 하다가 기어이 끝장을 보고 말았다. 또 오른무릎이었다. 이번엔 인대가 끊어졌다. 더는 어려웠다. 이미 연골이 세 번 찢어지고, 인대가 한 번 끊어져 네 번이나 칼을 댄 너덜너덜한 무릎이 아니던가. 결국, 다섯 번째 수술에 들어갔고, 골리앗은 더는 일어서지 못했다. 4개월이나 병원 신세를 졌는데도 회복이 어렵다는 판정을 받았고, 그해 7월 춘천대회에서 눈물의 은퇴를 했다. 비가 억수같이 내려 앞도 안 보이던 날이었다.

술도 타고난 천하장사였다는데…40도짜리 소주 한짝 해치우기도

 ▶타고난 천하장사

 몸집은 외탁했다. 어머니가 당시로써는 큰 축에 속하는 1m62였고, 이모가 1m68, 외삼촌이 1m90이었다.

 어릴 때부터 체구가 크고 힘이 세 동네 어른들은 볼 때마다 "장군 되겠다"고 했다. 지게 둘러메고 산에 나무하러 가면 동네 어른들보다 더 많이 지고 내려왔다. 이게 초등학교 4학년 때 얘기다. 5학년이 되면서 1m70을 넘어섰다. 의자 위에 올라선 친구보다 컸다.

 영덕에서 특수작물 재배할 때는 지게 여러 개 작살냈다. 힘이 좋아 많은 짐을 얹다 보니 지겟가지가 버티내지 못하고 부러진 것이다. 정미소에서 방아를 찧은 뒤 쌀 열세 말과 쌀겨 두 포대를 얹어 강을 건너다 지게가 부러지는 바람에 쌀을 물에 빠뜨린 적도 있다. 쌀 한 가마 무게가 80㎏이니 한 말이면 16㎏, 열세 말이면 208㎏이다. 여기에 쌀겨까지 두 포대 얹었으니 어떤 지게가 버텨낼까.

 옷과 신발도 문제였다. 봄에 산 옷을 가을에 입으면 소매 끝이 팔목 위로 쑥 올라갔다. 신발도 사정이 별반 다르지 않았다. 발은 280㎜를 넘어 290㎜로 가는데 당시 시골에서 파는 신발은 커야 270㎜. 오죽했으면 어머니가 "비비운동화 한번 깨끗하게 못 신긴 게 한이 된다"고 하셨을까.

 그래서 늘 검정 고무신을 신었다. 그 검정 고무신에도 발을 다 못 넣어봤다. 앞만 걸치고 뒤는 질질 끌고 다녔다. 그래도 남들보다 산을 더 잘 탔다. 한번은 검정 고무신을 석유에 담가 두면 늘어난다는 얘기를 듣고 따라 했다가 쪼그라들어 못 신은 적도 있다.

 먹는 것도 달랐다. 학창시절 대구 칠성시장에서 돼지고기 석쇠구이를 혼자 스물여덟 판 먹은 적이 있다. 말 그대로 28인분이다.

 주량은 장비를 능가할 정도. "스물두 살 때쯤인가 안동에 놀러 가서 소주 한 짝을 마신 적이 있지요. 강가에 텐트 쳐놓고 후배들하고 쏘가리, 메기 잡아 매운탕 끓여서요. 팬티 바람으로 강에다 발 담그고 마시는데 좋더라고요."

 당시 소주 한 짝이면 40병이다. 게다가 마신 소주가 40도짜리 금곡소주였다는 사실이 듣는 이를 질리게 한다. 40도짜리 소주 40병. 20도도 채 안 되는 요즘 소주와 단순비교를 해도 80병이다.

 "선배들한테 엄하게 술을 배워 아직 비틀거려 본 적 없습니다. 요즘은 부담스러워 그렇게는 못 마시죠. 즐기는 수준으로 그냥 대여섯 병 정도 합니다."

 체구에 어울리지 않게 입은 짧았다. 된장에 멸치 들어가면 숟가락을 안 담갔고, 밥상에 생선 오르면 아예 밥을 못 삼켰다. 그러니 몸무게가 키를 따라주지 못했다.

 럭키금성 씨름단에 입단했을 때 황경수 코치가 밤마다 족발 한 접시에 막걸리 2병을 먹였으나 체질 탓인지 효과를 보지 못했다.

 "은퇴하고 4년쯤 지나니까 음식이 받더라고요. 요즘은 밥상에 생선, 젓갈 없으면 허전할 정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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