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병주의 역사에서 길을 찾다] (47) 우리 민족의 세계기록유산

2009. 9. 29. 17:23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선조들이 남긴 찬란한 '기록 문화' 인류의 자부심 되다

올해는 우리 선조들의 뛰어난 기록정신이 유감없이 발휘된 해였다. 7월 말에는 유네스코가 '동의보감'을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했다는 반가운 소식이 들렸다. 불과 한 달 전 조선왕릉 40기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데 이어 또다시 경사를 맞이한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는 '동의보감'을 포함하여 '조선왕조실록' '훈민정음' '승정원일기' '직지심체요절' '조선왕조 의궤' '해인사 대장경판' 등 총 7건의 세계기록유산을 보유하게 됐다. 선조들의 뛰어난 기록문화가 우리 후손들의 커다란 자부심으로 자리를 잡게 된 것이다.

◇허준 선생이 태어난 곳이자 동의보감을 집필했던 곳으로 알려진 서울 강서구 가양동에 위치한 허준박물관에는 동의보감을 집필하는 허준 선생의 모습이 그림으로 재현돼 있다.

#1. 신분의 제약 탓에 들어선 의술의 길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의학서인 허준의 '동의보감'. 그 제목과 저자에 대해서는 대부분 알고 있을 것이다. 소설이나 드라마를 통해서 허준의 삶이 소개된 것도 '동의보감'을 널리 알리는 데 일정한 역할을 하였다. 그런데 소설이나 드라마와 같은 허구적 삶이 아닌 진짜 허준의 삶과 '동의보감'의 내용을 우리는 얼마나 많이 알고 있을까? '동의보감'의 저자, 조선 최고의 의원으로 유명한 허준(許浚)이지만 정작 그의 삶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것이 없다. 조선시대 의원은 중인의 관직으로 여겼기 때문에 그에 대한 기록이 소략하지만 그나마 그의 행적과 업적을 자세히 기록한 책이 '이향견문록'이다. 19세기 유재건이 쓴 중인층 이하의 전기인 '이향견문록'에는 허준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조선 성종, 중종, 세종 실록의 표지.

"허준의 자는 청원(淸源)이며, 어려서부터 배우기를 좋아하여 경전과 사서에 통달하였고, 특히 의학에 정통했다. 호는 구암(龜巖)이며, 태의(太醫)로 품계가 숭록대부(정 1품)에 이르렀다. '동의보감' 25권, '두창집요' 2권, 언해 2권, '태산집(胎山集)' 1권, '벽온신방' 1권, '구급방' 1권의 저서가 있다."

허준은 어의(御醫:왕의 주치의)로 활약한 만큼 실록 등에도 그에 관한 기록이 보이지만, 생애에 대해서는 지금도 여러 가지 견해가 전한다. 최근의 연구 성과에 따르면 허준은 양천 허씨로 1539년 허논의 아들로 태어났다. 형제로는 허옥과 허징이 있었다. 아버지 허논은 무과 급제자 출신으로 부안, 용천, 종성 등 북방 지역과 전라도의 지방관을 지냈다. 어머니는 중인층의 족보를 정리한 '성원록'의 기록에는 영광 김씨로 나타나 있는데 정실 부인은 아닌 것으로 나타난다. 허준은 무과로 관직에 진출한 양반 집안 출신이었지만, 어머니가 첩인 관계로 서자로서의 한계를 가지게 되었다. 서자로서의 신분적 제약 때문에 허준은 과거에 응시하지 않고 의관의 길을 걸었던 것으로 보인다.

#2. 종합 의서 편찬 주도한 수석 어의, 허준

허준은 젊은 시절 담양 등 전라도 지역에서 주로 생활하다가 20대 후반에는 서울로 올라왔다. 선조 시대의 학자 유희춘이 쓴 '미암일기'에는 유희춘과 허준의 만남이 기록되어 있다. 이즈음 허준의 의술은 상당한 수준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유희춘은 자신과 아내의 병을 치료해줄 것을 부탁하는 한편 서울 주변에 살던 친구들의 치료를 주선하기도 했다. 1569년(선조 2) 유희춘은 이조판서 홍담에게 허준이 내의원(현재의 국립의원)에 근무할 수 있도록 추천하였고, 마침내 허준은 모든 의원들이 선망하는 내의원에서 양예수 등 최고 수준인 의원들과 함께 자신의 의술을 발전시켜 나갔다. 선조의 신임을 얻은 허준은 1581년 왕명을 받아 한의학의 기초가 되는 '맥경(脈經)'을 출간하였으며, 1590년에는 광해군(당시 왕자)의 두창을 치료한 공을 인정받아 당상관의 품계를 받았다.

◇허준 선생이 말년에 집필한 '신찬벽온방'(왼쪽)은 보물 제1087호로 지정돼 있다.

허준과 광해군의 인연은 훗날 광해군이 왕이 되었을 때 허준을 더욱 신뢰하는 계기가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선조가 의주로 피란을 갈 때도 허준은 선조를 모시면서 최고의 의원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1596년 선조는 허준으로 하여금 전쟁과 기근으로부터 백성을 구제할 수 있는 종합적인 의서인 '동의보감'의 편찬을 국가적 사업으로 명했다. 선조 시대 후반 허준은 의서 편찬에 모든 것을 걸었다. 그러나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 '동의보감'의 편찬은 일시 중단되었다. 전쟁이 끝나자 허준은 '동의보감' 편찬에 박차를 가했으나 다시 한 번 위기가 찾아왔다. 선조가 갑자기 돌아가신 것이다. 선조의 승하 때 수석 어의로 있었던 허준 역시 책임을 면할 수 없었다.

결국 허준은 사헌부의 탄핵을 받고 파직과 함께 도성 밖으로 쫓겨났다. 1608년부터 1609년 11월까지 2년여 동안 귀양살이와 복귀를 되풀이하는 나날을 보냈고, '동의보감'은 사라질 위기를 맞기도 했다. 그러나 새로 즉위한 왕 광해군은 허준을 전폭 신뢰하였다. 광해군은 귀양 시절에도 허준이 '동의보감'을 편찬할 수 있도록 전폭적으로 지원하였고, 1610년 마침내 '동의보감' 25권을 완성할 수 있었다. 그의 나이 71세 때의 일이었다. 1610년 '동의보감'을 완성한 허준은 1613년과 1614년 조선에 전염병이 유행하자, 왕명으로 이를 치료하는 새로운 의학 서적인 '신찬벽온방'과 '벽역신방' 등을 간행하였다. 전 생애를 조선의 백성 치료에 보낸 셈이다. 허준은 1615년 76세를 일기로 굵은 생을 마감하였다.

◇(왼쪽)흔히 팔만대장경으로 일컬어지는 해인사 고려대장경판과 제경판.◇(오른쪽)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이 소장 중인 승정원일기.

#3. '동의보감'에는 어떠한 내용 있을까?

'동의보감'은 원래 허준이 선조의 명을 받아 정작, 양예수, 김응탁 등과 함께 편찬 작업에 들어갔다가 1597년 정유재란으로 일시 작업이 중단되었다. 이후 광해군이 즉위한 후 허준에게 작업을 독려하여 1610년 마침내 그 완성을 보았고, 1613년 내의원에서 활자로 간행하였다. 25권 25책이며, 크게 5개의 강목으로 구성되어 있다. 주요 구성은 앞에 서문과 집례가 있으며, 내경(內景)편 3권, 외형편 4권, 잡병편 11권, 탕액편 3권, 침구편 1권이다.

허준은 권1의 집례에서 중국과 조선을 포함한 동북아시아의 의학권을 북의(北醫)와 남의(南醫), 그리고 자신의 동의(東醫)로 구분하였다. 허준 당대의 조선 의학이 중국의 그것에 못지않다는 자부심을 나타낸 것이었다.

본문에 해당하는 내경편은 신형(身形:몸), 기(氣), 혈(血:피), 언어, 오장육부 등 주로 현재의 내과병에 관한 내용들을 기록하고 있다. 외형편은 얼굴, 코, 입, 귀, 치아, 가슴, 사지, 피부 등에 관한 외과적 질병을 기록하고 있다. 잡병편에는 천지기운, 진맥(診脈), 약의 사용법 등 진단법으로부터 풍(중풍), 소갈(당뇨), 황달 등의 내과 질환과 상처 등의 외과 질환, 부인과 소아과에 관한 내용들을 기록하였다. 탕액편은 약물을 소개한 부분으로 약의 성분, 약효와 채취 시기 등에 관한 지식을 기록하였다. 침구편은 현재의 침술에 관한 내용으로 연침법, 화침법 등 침술의 방법과 함께 십이경맥(十二經脈)의 부위를 자세히 기록하였다. '동의보감'은 조선시대의 의학 서적인 '향약집성방'과 '의방유취'를 비롯하여, 중국의 의학 서적인 '본초', '맥경', '단계심법' 등 70여 종의 책을 광범위하게 참고하였다. 또한 구체적인 질병의 치료방법 이외에 정신 수양과 섭생(攝生)까지 기록하여 병의 근원을 치료하는 방안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동의보감'은 중국과 일본, 베트남 등지에도 전파되어 조선 의학 기술의 높은 수준을 동양 세계에 알렸다.

#4. 세계가 인정한 우리의 기록유산들

'동의보감'에 앞서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기록물로는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조선왕조 의궤 등을 들 수 있다. 이들 기록물은 모두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 소장되어, 규장각이 기록물의 보고(寶庫)임을 알 수 있게 한다.

◇2007년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조선왕조 의궤.

조선시대 역대 왕들의 행적을 중심으로 조선시대의 역사를 정리한 '조선왕조실록'은 1대 태조로부터 25대 철종에 이르는 472년(1392∼1863)간의 기록을 편년체로 서술한 조선왕조의 공식 국가기록이다. 정족산본 완질 분량의 경우 1707권 1187책(약 6400만자)에 이르는 방대한 기록으로서 조선시대의 정치·외교·경제·군사·법률·사상·생활 등을 망라하여 조선시대판 타입캡슐과도 같다. '조선왕조실록'은 역대 국왕의 사후에 전 왕대의 실록이 편찬되는 방식을 취하였다. 국왕이 사망하면 임시로 실록청을 설치하고, 실록청에는 영의정 이하 정부의 주요 관리들이 영사(領事)·감사(監事)·수찬관·편수관·기사관 등의 직책을 맡아 실록 편찬을 공정하게 집행하였다. 편찬 후에는 국가에서 관리하는 사고(史庫)에 실록을 보관하였다. 특히 조선후기에는 가장 안전한 산간 사고를 설치하여 실록 보관에 만전을 기하였고, 그 결과 우리는 오늘날까지 실록 원형을 접할 수 있게 되었다.

'승정원일기'는 조선시대 왕명의 출납(出納)을 맡으면서 비서실의 기능을 했던 기관인 승정원에서 날마다 취급한 문서와 사건을 일자별로 기록한 책이다. 원래 건국 초부터 작성된 것으로 여겨지나 현재는 1623년(인조 1)부터 1910년(융희 4)까지 288년간의 기록 3243책이 남아 있다. 초서로 쓰여진 원본은 서울대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으며, 국사편찬위원회에서는 탈초한 영인본을 간행하였다. 원본의 책 크기는 일률적이지는 않지만 대체로 세로 40㎝, 가로 28㎝ 정도이다. '승정원일기'로 제목이 된 한 책의 장수는 70∼200장 정도로 편차가 나타나며, 3045책의 총 장수는 38만2487장으로 평균하면 125장 정도가 한 책의 분량이 된다. 288년에 걸친 역사기록물이라는 점과 3243책 총 문자량 2억4000여만 자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이라는 점에서 '승정원일기'는 세계 최대의 역사기록물이라 할 수 있다. '승정원일기'는 이러한 자료적 가치와 우수성이 확인되어 2001년 9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2007년에는 조선왕조 의궤(儀軌)와 해인사의 대장경판이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의궤는 조선왕실의 주요 행사를 기록과 함께 그림으로 정리한 책으로서 왕실문화의 현장 모습을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게 하는 자료이다. 의궤의 기록을 바탕으로 최근 왕실 문화를 재현하는 행사가 자주 열려 전통시대 문화의 진수를 직접 체험할 수 있게 한다. 해인사 대장경판은 '직지심체요절'과 더불어 선조들의 뛰어난 인쇄술을 체험하게 한다. 선조들이 수행한 자랑스러운 기록유산의 전통을 잇는 작업은 이제 우리들의 과제로 남아 있다.

건국대 사학과 교수 shinby7@konkuk.ac.kr[Segye.com 인기뉴스] ◆ 최진실 사망 1년… 사이버폭력 아직도 '기승'◆ 야당 "MB정부 나랏빚 108조 폭등"… 재정위기 우려◆ 100억도 성에 안 찬 5자녀◆ 이준기 '사기 당했지만 팬 위해 공연 강행'…대만 언론 극찬◆ 정운찬 총리 "세종시 수정 소신 변함없어"◆ 은밀한 이성의 사생활… "딱 내 얘기네"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공짜로 연극ㆍ뮤지컬보기] [☞'무릎ㆍ관절' 무료수술] < 세계닷컴은 한국온라인신문협회(www.kona.or.kr)의 디지털뉴스이용규칙에 따른 저작권을 행사합니다. >

Copyright © 세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