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한정신이 우리의 식량"

2009. 9. 17. 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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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36.5℃ 데이트] 새 루트 개척 메루피크 원정대

낙석 쏟아지는 절벽사탕으로 끼니 때우며셰르파없이 등정 성공인근 마을에 책 기증

바위와 어름, 눈의 혼합벽이 시작되는 공격캠프(ABC·5003m)에서 본격적인 등반이 시작되는 마지막 캠프2(6150m)까지 1100여m를 오르는 데 25일이 걸렸다. 평균 50~60도의 경사면에 1500m의 고정로프를 깔아야 했고, 식량과 장비 등 120㎏ 짐을 나르는 일은 등반 성공을 좌우할 만큼 가장 중요한 작업이었다.

해발 5570m의 캠프1에선 눈사태로 눈에 묻히는 역경도 있었다. 하지만 더 큰 고난은 90도에 가까운 직벽이 시작되는 캠프2에서부터였다. 6명의 대원 중 캠프2에 도착한 김세준(40) 대장과 왕준호(38) 김태만(37) 대원 등 3명은 이틀을 쉬며 고소에 적응한 뒤 등반을 시작했다. 정상까지 고도는 510m에 불과했지만 9일이 걸렸다. 50m를 오르는데 이틀이 걸렸던 적도 있다.

조우령(42) 대원은 "낮엔 따가운 햇살, 밤엔 영하 20도 안팎으로 떨어지는 일교차로 바위는 자연풍화가 심해 낙석과 파편으로 등반이 어려웠다"고 설명했다. 그 50m 구간은 바위를 까내며 올라가야 했다. 그 9일간 공중에 매단 1평 남짓한 포터레지(허공침대)에 2명이 잤고, 그 밑에 매단 해먹은 김태만씨의 잠자리였다. 무게 때문에 식량을 최소화하는 탓에 아침부터 등반이 끝날 때까지 초콜릿과 사탕이 전부였고, 저녁만 알파미(수분율을 8% 이하로 최소화한 쌀)로 끼니를 때웠다.

왜 이런 산행을 하냐고 묻자 "쉬운 것은 다들 하지 않냐, 어려움을 이겨내며 진정으로 자유로워지고 싶었다"고 김세준 대장은 대답했다. 그래서 등반엔 1명의 셰르파(고용인)도 쓰지 않았고, 무산소에 신루트였다. 김 대장은 "선등했던 (왕)준호는 돌이 떨어져나가 두 번이나 10m씩 추락했고, 날씨까지 나쁘고 북벽인 탓에 9일간 햇볕을 쪼인 것은 2시간 뿐이었다"고 말했다. 거의 탈진상태에서 등반 9일 만인 2008년 7월13일 오후 6시40분, 20분 간격으로 왕준호-김태만-김세준 순으로 정상에 섰다. 인도 가르왈 히말라야의 메루피크(6660m) 북벽 루트 개척 세계 초등이 이뤄지는 순간이었다.

김 대장은 "이 등반은 3명 중 누구 한 번의 실패만 나와도 철수해야 하는 원푸시 방법이었다"며 "고통스런 과정이었지만 모험에 도전하려는 극한정신이 굶주림 속에서도 진정한 우리의 식량이었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이 소식은 국내 3대 산악지는 물론 미국의 <알파인>과 <아메리칸알파인저널>, 프랑스의 <몽테뉴> 등 해외 유명산악잡지에도 소개됐다. 이들은 높은 등반성을 인정받아 지난 15일엔 제10회 대한민국 산악상 시상식에서 대상을 받았다.

"더 잘 하라는 격려의 뜻으로 상을 받는다"고 수상소감을 밝힌 원정대는 향후 4년 원정계획도 이미 다 짜놓았다. 구체적인 산이름을 밝히진 않았지만 이번에 갔던 인도 가르왈 히말라야를 비롯해, 파키스탄 히말라야, 덴마크령 그린란드의 미등봉이 목표다.

7~8년째 국내외 여러 산에서 호흡을 맞춰온 그들은 스스로를 "더 이상 파트너가 아니라 가족"으로 대한다. 베이스캠프에서 망원경으로 정상을 바라보던 조우령 대원이 무전교신에서 "뭘 먹고 싶냐"고 묻자, 막내 김태만씨가 얼어붙은 입으로 "양 한마리를 먹고 싶다"고 했다. 대원들은 하산 뒤 인근 우타르가시 마을에서 양고기 회식으로 회포를 풀었다. 자신들의 배만 불리지 않고 인도 델리에서 구입한 각종 어린이서적 150여권을 이 마을에 기증해 어린이도서관 세우기 운동도 펼쳤다.

올해 내셔널지오그래픽 국제사진전 한국 예선에서 인물부문 대상을 받아 11월 본선 출품예정인 김형욱(30) 대원은 "앞으로도 등반과 함께 이 운동을 계속 펼쳐나갈 것"이라고 했다.

글·사진 권오상 기자 ko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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