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호의 차이나스토리] (12) 포청천의 혼이 살아있는 개봉부

2009. 9. 1. 0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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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판관' 포청천(包靑天)은 살아 있다. 송나라 때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900여년 동안 '청백리(靑白吏)'의 표상으로 인구(人口)에 회자(膾炙)될 뿐 아니라 존경의 대상이 되고 있다.

 최근 중국 스촨(四川)성 충칭(重慶)시에 '현대판 포청천'이 나타났다고 떠들썩하다. 그 주인공은 몽골족 출신인 왕리쥔(王立軍?50) 공안국장. 그동안 어느 누구도 손대지 못한 '공공의 적'을 차례차례 소탕하면서 중앙정부로부터 영웅 대접을 받고 있다.

 왕리쥔은 지난해 6월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한 보시라이(薄熙來) 충칭시 당 서기의 부름을 받고 랴오닝(遼寧)성에서 멀리 남쪽의 내륙 지방으로 달려왔다.

 이미 랴오닝성의 지방 공안국장을 지내면서 조직 폭력배를 잘 잡는 관료로서 이름을 날렸다. 두목을 총살시키는 등 800여명을 검거한 이야기는 '철혈의 경찰혼'이란 드라마로 만들어질 정도였다.

◇ 현대판 '포청천'으로 불리는 충칭시 왕리쥔 공안국장

 하루가 다르게 도시가 발전하고, 수많은 사람들의 유입으로 1997년 작할시로 승격되면서 중국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도시로 변한 충칭시는 관료들과 유착된 범죄 조직 탓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강하고 깨끗한 경찰이 필요했다. 왕 국장은 부임하자마자 원창(文强) 전 공안국 부국장 등 고위 공직자와 폭력배 1500여명을 검거했다. 조직 폭력배들이 왕 국장의 목에 1200만 위안까지 돈을 걸어 놓은 것도 아랑 곳 하지 않고 범죄와의 전쟁을 진두지휘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북송 시대의 존경 받던 청백리 포청천이 환생했다며 '왕청천(王靑天)'이라 부르고 있다.

◇ < 사진 2-kaifengyiejing > 포공호의 건너편에서 바라본 개봉부의 야경

 허난(河南)성 카이펑(開封)은 북송의 수도였다. 포청천이 직무하던 개봉부(開封府)는 원래 황궁의 남동쪽에 있다가 서쪽으로 옮겼다. 현재 포공(包公) 호수의 북쪽이었다. 그러나 명나라 숭정(崇禎) 15년(1642년) 황하의 범람으로 순식간에 모두 매몰됐다. 그리고 그 주변이 커다란 호수로 변해 버렸다.

 포공을 추모하는 사람들은 그 호수를 '포부갱(包府坑)'이라 불렀고, 세월이 흘러 '포공호(包公湖)'로 바뀌었다.

 호수를 뒤로 한 채 개봉부 앞의 광장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온다. 아직 관청의 문은 굳게 닫혀 있다. 붉은 담이 위압적이다.

 잠시 후 북소리, 징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옛날 관리의 복장을 한 병졸들이 만장 같은 깃발을 들고 나온다. 그 사이에 덩치 좋고, 멋진 수염을 기른 포청천이 따라 나온다. 어명(御命)을 받들기 위해서다.

 덕수궁 앞에서 열리는 '조선시대 위병 교대식'처럼 개봉부 앞에선 '송나라 어지 전달식'이 열리고 있다.

◇ 어명을 받기 위해 개봉부의 정문 광장에 나온 포청천

 개봉부에 들어서면 곳곳에 청렴을 강조하는 글귀와 엄한 처벌로 '일벌백계(一罰百戒)'하던 장비 등을 볼 수 있다.

 '공생명(公生明)', 공정함이 밝음을 낳는다. 모든 일처리를 공명정대하게 할 것을 일깨워주는 비석이 안뜰의 한복판에 당당하게 서 있다. 용의 머리로 장식한 작두, 날이 뾰족하고 긴 창이 전시돼 있다.

◇ 개봉부의 안뜰에 서 있는 '공생명'

 억울함을 알리는데 사용하는 북과 징도 있다. 북송 시대, 과거를 준비하는 선비가 있었다. 가난했다. 그러나 아내는 서방님의 뒷바라지를 위해 온갖 굳은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정성이 통했다. 선비는 과거에 급제했다. 모두가 기뻤다. 그러나 잠시.

 선비의 마음이 변했다. 출세욕에 눈이 먼 선비는 총각이라 속이고 공주와 결혼했다. 가난한 아내가 개봉부를 찾아와 포청천에게 억울함을 호소했다.

 '명판관' 포청천은 권력의 눈치를 보지 않고, 시골 아낙네의 바람을 명쾌하게 해결해 주었다.

 옛 이야기를 재현한 짧은 공연이 매일 펼쳐진다.

◇ 포청천의 집무실 앞에서 열리는 노천 공연

 지금 개봉부는 남녀노소 누구나 즐겨 찾는 교육의 장이자 관광 명소로 자리 잡았다. 포청천의 정신을 통해 옛 것을 배우고, 오늘에 실천할 수 있도록 각종 유적을 복원했다.

 영무루(英武樓)에선 전통 기예를 공연하고, 명례원(明禮院)에선 불교의 흔적을 감상할 수 있고, 복원된 감옥에선 죄수 생활도 체험할 수 있다.

 군데군데 '과녁 맞추기' 등 각종 놀이 시설과 기념품 판매소까지 만들어 놓았다. 심지어 돈을 내야만 '포청천'과 기념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해 놓았다.

◇ 개봉부의 집무실에서 판결을 하고 있는 포청천

 포청천은 개봉 사람이 아니다. 999년 지금의 안후이(安徽)성 허베이(合肥)에 출생했다. 이름은 증(拯)이고, 시호는 효숙(孝肅)이다. 주로 '포공(包公)'이라 불린다.

 1027년(인종 5년) 진사에 급제하고도 노부모를 모셔야 한다며 관직을 사양했고, 부모 사후인 1037년 처음으로 관직을 맡은 뒤부터 부당한 세금을 없애고, 부패한 관리를 엄단하고, 백성들의 억울한 사건을 제대로 처리해 칭송을 받았다.

 포공의 이야기는 후대로 내려와 남송과 금나라 때부터 '포공안', '삼협오의(三俠五義)' 등 많은 문학 작품의 소재가 됐다. 현대에 와서는 타이완과 대륙에서 '판관 포청천', '신포청천' 등 영화나 TV 드라마로 제작돼 13억 중국인들의 사랑을 받았다.

 특히 1993년 타이완에서 제작된 '판관 포청천'은 KBS TV로도 방영돼 인기를 끌었다.

 넓은 이마의 한 가운데 초생달을 세워 놓은 듯한 흉터가 있는 '포청천'은 사회가 발전할수록,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더욱 복잡해질수록 그리운 존재임이 분명하다.

  < 객원기자 www.chin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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