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져 가는 일본 인문주의의 계보

2009. 8. 28. 1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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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디아스포라의 눈 /

드디어 여름방학이 시작돼, 무덥고 소란스러운 도쿄를 탈출해서 나가노현 신슈의 구루마야마 고원에서 지내고 있다. 느긋하게 공부나 할 요량으로 도쿄에서 책을 한 보따리 싸들고 왔다. 한데 한 권도 읽지 않았다. 고원 특유의 변화무쌍한 하늘 색깔과 여름빛을 반사하는 나뭇잎의 광채를 그저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사이 하루해가 훌쩍 지나가 버린다. 이곳 인근에는 작지만 특색 있는 미술관들이 여기저기 산재해 있다. 가깝다고는 해도 표고 1700m의 고지인 까닭에 어디를 가더라도 자동차로 한두 시간은 걸린다.

아즈미노에 로쿠잔 미술관이 있다. 날씨 좋은 날에는 표고 3000m급 준봉들이 이어진 일본알프스가 한눈에 바라다보이는 곳이다.

일본 근대조각의 창시자라는 오기와라 모리에는 1879년 이 가난한 땅의 농가에서 태어났다. 로쿠잔은 그의 호다. 젊어서 기독교 영향을 받은 그는 1901년 미국에 가서 고학하며 미술을 공부했다. 그리고 1903년에는 미국에서 프랑스 파리로 건너가 살롱전에서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을 보고 큰 충격을 받은 뒤 로댕한테서 조각을 배웠다. 1908년 일본에 돌아온 그는 뛰어난 작품들을 잇따라 발표하고 명성도 얻었으나 1910년 서른 살 젊은 나이에 피를 토하며 세상을 떠났다. 조각가로 활동한 기간이 채 5년이 되지 않았다.

내가 처음 이 자그마한 미술관을 찾은 건 아직 10대 때였다. 그 이후 40여년의 세월이 흘렀는데, 기회 있을 때마다 이곳을 찾았다. 이번 여름에도 전남대학교 신경호 교수 등 한국에서 온 분들을 안내하면서 두 차례 방문했다. 올 때마다 젊었을 때 느꼈던 엄숙한 기분이 내 마음속에서 되살아난다.

전시관은 오래된 기독교 교회 모습을 하고 있다. 앙증맞아서 젊은 커플에겐 배경 삼아 기념사진 찍기 좋은 곳이다. 그러나 입구에는 로쿠잔이 좋아한 'Struggle is Beauty'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고투(苦鬪)는 미(美)'라는 뜻이다.

로쿠잔의 작품 중에 내가 가장 강렬한 인상을 받은 것은 유럽 체류 중이던 1907년에 제작한 <갱부>(坑夫)다. 북프랑스 탄광지대에서 가혹한 노동으로 살아가는 억센 탄광부의 반신상이다. 또 일본에 돌아와서 제작한 <디스페어>(절망)라는 여성상도 잊을 수 없는 명작이다. 엎드린 자세로 몸을 비트는 모습의 나체상인데, 이 시대 여성의 고뇌와 해방을 향한 몸부림을 잘 표현하고 있다. 그 때문일까, 이 작품은 당시 미술계의 주류로부터는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으며, 정부가 주최한 전람회에 출품됐으나 상을 받지 못했다.

일본 근대조각의 창시자 로쿠잔은 가난하고 불우한 사람을 주제로 '갱부' '절망' 등의 명작을 만들었다…롤랑·장 콕토 등과 교우했던 또다른 조각가 다카다는 간디를 직접 만나 소묘했다…그러나 지금 그 작품들은 일본알프스 자락 작은 마을들에 고요히 머물고 있을 뿐이다.

이처럼 로쿠잔은 그 자신이 가난했을 뿐 아니라 스스로 가난하고 불우한 사람들을 주제로 선택했다. 입신출세나 돈벌이 가치관과는 무관한 그의 예술활동은 바로 '고투는 미'를 실천하는 것이었다. 이 지방은 원래 벼농사도 제대로 되지 않는 한랭지대다. 로쿠잔이 태어나 자란 시대에는 얼마나 가난했겠는가. 그런 지방에서 이런 예술가가 태어나 고귀한 고투의 흔적을 후대에 남겨준 것이다.

아즈미노에 인접한 도요시나라는 작은 마을의 미술관에는 다카다 히로아쓰 컬렉션이 있다. 1900년생인 다카다는 로쿠잔의 한 세대 뒤 조각가인데, 그 이상으로 근대 일본을 대표하는 인문주의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다카다는 이시카와현 출신으로, 로쿠잔과는 달리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12살 때 로맹 롤랑의 <장 크리스토프>를 읽고 감격했다는 에피소드를 남길 정도로 조숙한 재사였다. 하지만 그 다카다도 예술에 뜻을 둔 뒤부터는 빈궁하게 살았다. 연보에는 1930년 서른 살 나이에 "가난을 벗어나는 수단으로" 프랑스에 건너갈 결심을 했다고 기록돼 있다. 프랑스에서도 궁핍은 이어졌으나 교우관계는 풍성했다. 도요시나 미술관에는 다카다가 제작한 갖가지 초상이 진열돼 있다. 로맹 롤랑, 간디, 알랭, 샤를 빌드라크, 장 콕토, 조르주 루오 등등. 모두 다카다가 직접 사귄 사람들이다.

1931년 스위스에서 살고 있던 로맹 롤랑의 초대를 받아 그의 집에 묵고 있던 마하트마 간디를 소묘했다. 그때의 모습을 다카다는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방 창가에 커다란 노인용 안경을 걸친 바싹 마른 흰옷 차림의 왜소한 사람이 달마처럼 앉아 물레를 잣고 있다. 이쪽 창가에는 내가 앉아 있다. 묵례할 뿐 서로 한마디도 주고받지 않는다. 좌선의 무언무답(無言無答)처럼. 해골 같은 그림자 뒤에는 광대한 산봉우리가 햇빛을 받아 빛나고 있다. 조용한 방 안에서 저릿저릿 전해져 오는 게 있다. 한마디 말도 없이 이토록 인간 존재를 강하게 느낀 적이 없다. 1시간, 2시간,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그저 미소와 묵례만의 대좌는 사흘이나 이어졌다."

1940년 독일군이 프랑스를 침공해 점령한 뒤 <마이니치신문> 특파원이 된 다카다는 항독 레지스탕스 운동을 지원했다. 전후에도 프랑스에 머물다 1957년에 귀국했다. 근대 일본에서 프랑스 유학은 미술계의 주류에 들어가고 지위 상승을 꾀하기 위한 제도였다고 할 수 있다. 다수의 미술가들이 그 길을 걸었다. 정부의 뜻을 받들어 전쟁 고취 그림을 많이 그린 후지타 쓰구하루는 그 대표적 인물이다. 같은 프랑스 유학파 중에서도 다카다가 걸어간 길은 그와 정반대였다.

스위스를 떠올리게 하는 높은 산들에 둘러싸인 작은 마을에 고요히 소장돼 있는 작품들이 근대 일본의 인문주의의 계보를 전해주고 있다. 이 계보는 항상 소수고 비주류였지만 매우 귀중한 지적·문화적 자산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그것조차 지금 일본에서는 경시당하거나 잊혀져 가고 있다.

서경식/도쿄경제대 교수

번역 한승동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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