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함 안기고 떠난 지 2년

2009. 5. 22. 22:10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한겨레]

〈닷발 늘어져라〉

권정생 글·김용철 그림/한겨레아이들·8000원

권정생 추모 2주기에 맞춰 <닷발 늘어져라-권정생 작가가 남북어린이에게 남긴 이야기 1권>이 책으로 나왔다. 동화집이 만들어진 사연부터 지금은 세상에 없는 작가의 삶의 지평을 쨍쨍히 비춘다.

권정생은 이름 그대로 옳았던 삶이다. 2003년 남북화해 분위기가 한창이던 시절, 남과 북의 작가가 함께 동화책을 만들자는 제안에 선생은 반색했다고 한다. 병석에서도 한달음에 옛이야기 5편, 120장을 써서 출판사에 보냈단다. 그러나 사업이 생각처럼 진척되지 않아 생전에 출간되지 못하다가 최근 출범한 '권정생어린이재단'과 출판사가 뜻을 모아 우선 남한에서 '닷발 늘어져라' '만석꾼 대감님' 2편을 엮어 책으로 냈다. 인세는 작가의 유언대로 남과 북의 어린이들을 위해 쓰기로 했다.

권정생은 청년이다. <닷발 늘어져라>에 실린 '만석꾼 대감님' 이야기를 보면 이미 <남북 어린이가 함께 보는 전래동화> 시리즈를 편찬하며 북한 사정을 훤히 꿰뚫었을 법한 작가가 왜 하필 북에서 기피하는 대감님 이야기를 실었을까, 궁금해진다.

그러나 원고와 함께 보낸 작가의 말은 이렇다. "북한 아이들이나 남쪽 아이들이나 모두 재미있게 읽을 것입니다." 차가운 체제의 장벽을 녹일 재미있는 이야기를 터뜨리는 자신만만 청년의 기백이다. 아마도 그는 끝까지 이 책이 북의 작가와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남북한 어린이들을 함박 웃길 거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으리라.

권정생은 할아버지다. 이야기 하나랑 무명 한 필 바꾸어도 아깝지 않은 옛이야기 속에 나오는 할아버지(<훨훨 난다>)다. <닷발 늘어져라>는 옛이야기가 입심 좋은 이야기꾼 만나 맛을 더하듯 전래동화 2편이 권정생 할아버지의 육성을 담아 새 옷을 입었다. 줄거리는 '혹부리 영감'과 비슷하지만 도깨비방망이를 얻은 착한 동생을 따라 하려다가 욕심부려서 고추만 닷발 길어진 형 이야기('닷발 늘어져라')를 쓰면서 작가도 낄낄 웃지 않았을까.

권정생은 따뜻한 이야기의 언덕이다. 고추가 길어졌던 형도 백 년 뒤엔 뉘우치고 잘살았단다. 쥐한테 인심 쓸 줄 아는 만석꾼은 그 덕분에 목숨을 건지고 쥐랑 함께 오래 잘살았단다.('만석꾼 대감님') 권정생 작가의 쥐들은 절을 하고, 권정생 작가의 도깨비방망이는 "김치 나온나 뚝딱" 하는 소리를 낸다. 아아 그리워라, 이야기는 이렇듯 의구한데 사람은 어째서 사라져야 한다는 말인가.

남은주 기자 mifoco@hani.co.kr

세상을 보는 정직한 눈 <한겨레> [ 한겨레신문 구독| 한겨레21 구독]

ⓒ 한겨레신문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한겨레는 한국온라인신문협회(www.kona.or.kr)의 디지털뉴스이용규칙에 따른 저작권을 행사합니다.>

Copyright © 한겨레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