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칸〉[정주리의 연애학 AtoZ]남자들에게

2009. 5. 18. 2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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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깨가 탈이 났다. 몇 해 전, 근육 좀 만들어보겠다고 한밤 중에 아령 들고 설치다 왼쪽 어깨 인대가 늘어난 적이 있는데 이번엔 오른쪽이다. 컴퓨터 앞에 오래 앉아 생긴 직업병이야 업계에서는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만, 다 늙어 시작한 바이올린이 한몫 단단히 한 모양이었다. 며칠 침 맞으러 다니면서 괜찮아졌다 아팠다가를 되풀이하느라 꿀꿀한 봄날이었다. 문득 걷고 싶어졌다. 몸이 조금 삐걱댄다 싶으면 걷기만큼의 치료약이 없다는, 그 동안의 경험에서 나온 믿음이랄까.

무턱대고 제주로 날아갔다. 제주 올레. 제주의 마을과 오름과 바다와 마늘밭과 현무암 검은 들판을 열하루 동안 걷고 또 걸었다. 언제 그랬냐는 듯 어깨 통증이 사라졌다. 하기야 컴퓨터 앞에 죽치고 앉아있지도, 잔뜩 긴장하느라 어깨를 딱딱하게 굳힐 일도 없으니 자연 치유는 어쩌면 당연한 일. 고사리가 지천으로 핀 4월 말 제주에는 여자들이 참 많았다. 올레꾼들을 위한 전용 숙소에는 대구 부산 서울 익산 인천 등 전국에서 모인 20~30대 싱글 여자들이 드글드글했다.

여행을 자주 다녀보니 알겠다. 정말 많은 여자들이 배낭 하나 메고 용감하게 대한민국과 세계 곳곳을 누비고 있다는 것을. 2000년대 초반까지는 20대 중반에서 30대 초반까지의 싱글들이 대부분이었다면 날이 갈수록 30대 중·후반과 40대, 심지어 50~60대 여성의 나홀로 여행객들도 많아지고 있다. '여자 혼자 다니면 위험하다'는 걱정스러운 시선을 깨고 이 위험한 세상을 혼자 누비는 여자들이 많아진다는 것은, 그만큼 여자들이 용감하고 씩씩해지고 있다는 뜻이리라. 그 반면에 혼자 여행 다니는 남자는 참 보기 드물다. 대학 때 학점 따듯 배낭여행 다녀오고는 땡.

민박집의 밤은 그야말로 사랑방. 맥주 한 잔 앞에 두고 숱한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왔다. 시민단체 상근 활동가, 여행 가이드, 대학원생, 국책연구소 직원, 예비 간호사, 보험회사 콜센터 직원, 대학생, 백수 등 하는 일도 나이도 다양한 여자들이 저마다의 사연과 생각을 풀어놓았다. 그 중에서도 특히 기억에 남는 친구는 스물 다섯살 먹은 부산 아가씨다. 남자친구가 결혼을 조른다고 했다. 남자친구의 나이가 스물아홉이었나 서른이었나. 많은 나이도 아닌데, 아무래도 보수적인 지역색과 유부남이 대부분인 직장 분위기(어서 결혼해버리라는 부추김)에 휩쓸려 몇 달 전부터 결혼하자고 노래를 부른다나.

문제는 이 아가씨는 전혀 결혼할 마음이 없다는 것. 스물 다섯살이면 하고 싶은 것도 가고 싶은 데도 얼마나 많겠는가. 하늘을 훨훨 날아도 모자랄 나이에 결혼이라니,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고 했다. 그런 생각을 솔직히 털어놓고 기다려달라고 이야기했는데도 남자친구는 '넌 너무 이기적이야! 왜 네 생각만 하는 거니? 날 사랑한다면 결혼해!'라며 막무가내라니 기가 막힐 수밖에. 이 친구, 남자친구의 닦달을 피해 제주에 왔고, 며칠 동안 올레길을 혼자 걸으며 연애와 자신의 미래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고 했다. 짐작컨대 아무래도 헤어지지 않았을까.

'옛것은 사라져서 없는데 새로운 것이 보이지 않을 때가 바로 위기'라고 얘기한 사람이 안토니오 그람시였던가. 요즘 남자들을 볼 때면 자꾸 '위기'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여자들은 더 용감해지고 똑똑해지고 생각이 많아지는데, 남자들은 그대로이거나 오히려 더 퇴보하고 있다는 느낌. 여자들은 나이가 들수록 세상과 더 많이 부딪치고 경험하며 연애와 삶에 대해 고민하는데, 정작 이 여자들을 상대해야 할 남자들은 더 단순해지고 더 보수화되고 더 답답해지니 안타까운 노릇이다. 남자들에게 진심으로 충고하노니, 여자들이 변했다며 개탄만 하지 말고 변하는 여자들에 발맞춰 함께 변해볼 생각은 없는지.

< 연애 칼럼니스트 정주리 > [스포츠칸 연재만화 '명품열전' 무료 감상하기]- 경향신문이 만드는 生生스포츠! 스포츠칸, 구독신청 (http://smile.khan.co.kr) -ⓒ 스포츠칸 & 경향닷컴(http://sports.kha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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