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주전자 주문하면 안주 한상 기본

2009. 4. 26.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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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매거진 esc]

한정식·비빔밥 아성 도전하는 전주 막걸리 골목 기행…내용물 가라앉힌 '맑은 막걸리' 인기

소주·맥주·양주·와인 바람에 밀려났던 서민의 술 막걸리가 재조명을 받고 있다. 약초 등 다양한 재료를 활용한 새로운 맛과 향을 지닌 막걸리가 잇따라 선보이고, 수출도 늘고 있다. 최근 일본으로 수출돼 '웰빙 와인'으로 인기를 끌면서 일본인 관광객 중엔 한국의 '막꼬리집'을 여행코스로 택하는 이들도 많다고 한다.

비빔밥, 한정식, 콩나물국밥과 모주. '맛고을 전주'를 대표하는 음식들이다. 여기에 전주시민들이 한 가지 더 보태는 데 결코 주저하지 않는 것이 바로 막걸리다. 전주를 대표하는 술이 아니라 '음식'이다.

막걸리 인기 얻으며 '막 프로젝트' 시동

"전주에서 막걸리는 밥이요 생활이요 문화입니다."(이종진·44·전북대 강사)

"전주 막걸리문화는 거의 미학의 반열에 올라 있다고 볼 수 있죠."(김병수·41·전주한옥생활체험관 관장)

골수 막걸리 예찬론자들이 잔 높이 들어 설파한 심오한 '수작담'은 제쳐놓더라도, 전주는 실제로 국내에서 보기 드문 막걸리 도시임이 분명하다. 다른 대도시에 호프집들이 지천이라면 전주엔 막걸릿집 천지다. 그것도 '막걸리 전문점'임을 강조한 간판을 내건 술집들이 이 골목 저 골목 수십 집씩 몰려 있다.

막걸리가 전주의 독특한 식문화의 반열에 올라 있다는 사실은, 옛 도심뿐 아니라 신흥 아파트촌에까지 막걸릿집들이 떼지어 성업중인 데서 잘 드러난다. 삼천동·서신동·경원동·효자동·평화동 일대에 막걸리골목이 형성돼 있다. 10년 전까지 호프집들이 주름잡던 삼천동 우체국골목 주변과 '벌떼가든' 앞 골목 등엔 무려 100여곳을 헤아리는 막걸리 전문점이 밀집해 불야성을 이룬다. 물론 옛날식 막걸릿집들도 옛 경원동(풍남동으로 통합), 한옥마을 부근 골목 등 곳곳에서 명맥을 이어온다.

산전수전 겪으신 60대 주모가 지키는 허름한 옛 막걸릿집들엔 주로 어르신들이, 삼천동 주변엔 30~50대가, 서신동·평화동 일대는 20~30대가 많이 찾는다고 한다. 그러나 막걸리꾼들은 옛집·요즘집 가리지 않는다. '술맛 나는 집' '주모맛 나는 집' '안주맛 나는 집' '지저분한 맛 나는 집' 등 특징별로 단골집을 정해 놓고 기분 내키는 대로 찾아가는 이들이 많다. 예컨대 안주가 먹을만한 집으론 삼천동 우체국골목의 용진집과 벌떼가든 앞의 다정집, 주모가 괜찮은(물론 미모 기준이 아니다) 집은 경원동 한울집, 한옥마을 부근 동문사거리의 영산포집을 꼽는다.

주요 막걸릿집들에선 2007년 '대한민국 막걸리 품평회'에서 금상을 받은 '명가'라는 이름의 전주 막걸리를 낸다. "단맛·쓴맛·신맛·떫은맛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 술이다.

전주 막걸리가 '시민들의 생활이자 문화'라는 점은 이상과 같은 '하드웨어'만으론 설명되지 않는다. 전주 막걸리 전문점만의 독특한 내용이 있다. 일단 1만2000원짜리 막걸리 한 주전자(막걸리 세 통)를 주문해 보면 안다. 백반 상차림에 버금가는 푸짐한 기본 안주가 한 상 가득 깔린다.

집마다 철마다 다르긴 해도 대개 이런 식이다. 김치·나물류의 밑반찬들에다 다슬기·옥수수·두부·부침개·게장·생선조림 등이 기본으로 나온다. "한 주전자 추가요!" 하면 꼴뚜기회·조기매운탕·잡채 등이 나오고, "여기 하나 더!" 하면 홍어삼합·낙지회 등 주인장이 아껴둔 고급 안주들이 마침내 제공되는 방식이다. 안주들은 당일 주모들이 장에서 장만해 온 제철 재료들에 따라 달라진다. 이런 형식은 일정량의 소주·맥주를 시키면 안주가 대량으로 제공되는 통영의 '다찌' 문화와 닮았다. 하지만 막걸리라는 값싼 술과 전주식 음식문화가 어울려 훨씬 저렴하고 푸짐한 술상이 차려진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막걸리와 문화운동에 밝은 김병수씨가 말했다. "전주의 푸짐하고 맛깔스런 음식, 인정과 풍류가 막걸리와 결합해 독특한 술집문화를 낳은 셈이죠."

이른바 '맑은 막걸리'가 대세를 이루고 있는 것도 전주 막걸릿집의 특징이다. '맑은 막걸리'란 막걸리통을 냉장고에 이틀쯤 세워둬, 내용물을 가라앉히고 위의 맑은 술만 떠낸 것을 이른다. 대부분 술집에서 탁주와 맑은술을 선택해 주문할 수 있다. 둘을 적당히 섞어 마시는 이들도 있다. 맑은술을 선호하는 꾼들은 '맛이 깔끔하고, 양이 적어 배가 덜 부르며, 뒤끝이 좋다'고 주장한다. 일본인들도 '마르근 막꼬리'를 많이 찾는다고 한다.

술꾼들이 전주 막걸릿집의 술맛을 배가시키는 '문화'로 치켜드는 것이 바로 '교감하고 교통하는' 정다운 술집 분위기다. 20여년 막걸리와 고락을 함께해 왔다는 이종진씨는 "막걸릿집은 다른 술집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매력을 가진 술집"이라고 주장했다. "값싸고 푸짐하고 맛있는데다, 오가는 정이 살아 있기 때문이죠. 주모와 손님, 손님과 손님 간의 커뮤니케이션이 있는 술집, 이것이야말로 전주에 막걸리골목이 존재하고 유지되는 배경입니다."

곳곳에 흩어져 명멸하던 전통 방식의 막걸릿집이 한데 모여 전문 골목을 형성하게 된 건 오래전 일이 아니다. 호프집을 찾던 꾼들이 아이엠에프 이후 값싸고 안주 푸짐한 막걸릿집으로 모여들기 시작하면서다. 막걸릿집이 번성하자 전주시에선 3년 전 막걸리골목을 관광명소로 만들기 위한 '막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삼천동 30여곳, 서신동 10여곳의 막걸릿집 실내외 디자인을 지원하고, 문인협회·미술인협회·사진작가협회 등 지역 예술단체들과 '1집 1협회 자매결연' 사업을 벌였다.

미술인협회와 자매결연한 삼천동 용진집 주모 홍용자(51)씨는 "손님 중 절반 이상이 일주일에 1~2번 이상 들르는 문화예술 관련 단골손님들"이라고 말했다.

전주 술꾼들이 줄창 막걸리만 마시는 건 물론 아니다. '가맥'집도 많이 찾는다. 가게에서 파는 맥주가 가맥이다. 옛날 주점 영업시간을 새벽 2시로 제한하던 때, 슈퍼마켓 간이의자에 앉아 차수를 늘리며 병맥주를 마시던 관습이 그대로 이어진 것이다. 전주의 거의 모든 슈퍼마켓 간판엔 가맥 또는 휴게실이란 글자가 따라붙는다. 가게 안팎에 탁자·의자를 마련해 두고 맥주와 갑오징어구이·황태구이·계란말이·북엇국 등 안주를 독특한 양념장과 함께 낸다. 갑오징어구이로 잘 알려진 전일수퍼, 명탯국으로 소문난 임실슈퍼, 튀김닭발을 잘하는 영동슈퍼 등 이름난 가맥집들이 즐비하다.

'가맥'집, 들어나 봤나?

시끌벅적하고 정겨운 분위기는 막걸릿집과 다름없으니, 막걸리 전문점과 가맥집이라는 독특한 두 주점 양태가 전주의 음식문화·여가문화·밤문화의 한 축을 이루고 있는 셈이다. 술에 관심이 많은 백성이라면 볼거리 많고 먹을거리 많은 전주 여행길에 왁자지껄한 막걸릿집 찾아가 한잔 기울여볼 만하다. 막걸리는 10여가지의 필수아미노산에 단백질·식이섬유도 풍부한 훌륭한 우리 술이다.

전주 여행쪽지

콩나물국밥 해장까지 마무리

◎ 호남고속도로 타고 전주나들목에서 나가 우회전한 뒤 곧 좌회전해 녹두길 따라 시내로 간다. 종합운동장 네거리에서 우회전해 백제교 건너 화산로 따라 직진, 곰솔나무길 세창짜임아파트 지나 우회전한 뒤 좌회전해 삼천동 막걸리골목으로 간다. 삼천동 용진집 (063)224-8164(첫째 셋째 일요일 쉼), 한울집 (063)287-2787(매주 일요일 쉼), 전일수퍼 (063)284-0793. 해장국 먹을 만한 곳. 삼백집·왱이집과 함께 콩나물국밥으로 이름난 남부시장 안의 현대옥, 고사동 한성호텔 앞 골목 태봉집의 복탕과 홍어탕. 술에 관한 문의 전주전통술박물관 (063)287-6305, 한옥체험 문의 전주한옥생활체험관 (063)287-6300. 전주 관광지·막걸릿집 문의 전주시청 홍보담당관실 (063)281-2871.

전주=글·사진 이병학 기자 leebh9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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