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똥파리' 양익준 감독, 달동네서 태어나 레드카펫의 스타로

2009. 4. 10. 0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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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나올 때부터 범상치 않았다. 아버지는 '양복쟁이'셨다. 어머니는 시장에서 옷감을 끊어다가 날랐다. 태아를 품고도 서울 중림동 야트막한 산동네의 비탈을 오르내렸다.

1975년 어느날, 양복천을 잔뜩 안고 계단을 오르던 만삭의 여인에게 산기가 왔다. 그 자리에서 아기를 낳았다. 지나가던 할머니가 탯줄을 끊었다. 밀려 밀려 더이상 오를 수 없을 때까지 올라가서야 산동네에 겨우 둥지를 튼 이름없는 삶들. 그 속에서 이불 포대기조차 깔지 못하고 경황없이 세상에 나왔던 조그만 아기가, 훗날 레드카펫의 주인공이 되리라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첫 장편영화 '똥파리'(영어제목 Breathless)로 세상을 놀라게 한 영화 배우 겸 감독 양익준(35)의 출발점은 마치 상징처럼, 고단한 길 위에 있었다. 35년 후 그가 세상에 내놓은 '똥파리'는 마치 가차없이 치고 들어오는 폭력을, 활활 불타오르듯 부릅뜬 눈으로 견뎌내는 몸뚱이같다. 그는 "'연기'라는 단어가 싫다"고 되뇌었다. "삶을 살아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다른 말로 대체할 수 없어 연기라 부르는 그것은, 그림을 그리는 일 따위가 아니라 삶을 투영하는 것이고 끓어오르는 무엇을 뱉어내는 것"이라고 했다.

'똥파리'는 아버지의 가정폭력으로 어머니와 여동생을 잃은 한 청년의 이야기다. 그 또한 남을 패고 빚을 대신 받아주는 일로 살아가는 깡패다. '엿같은 세상'에서 이 남자의 언어란 욕과 주먹이 전부다. 그가 한 여고생을 만난다. 포장마차를 운영하던 어머니를 철거깡패들에게 잃고, 정신을 놓아버린 아버지를 모시고, 갈수록 포악해지는 남동생을 데리고 사는 소녀다.

남자와 소녀가 사는 세상이란 폭력이 폭력을 부르고 가난이 가난으로 대물림되는 곳이다. 약한자가 더 약한자를 해치고 가난한 자가 더 가난한 자의 등을 쳐먹고 살도록 돼있다. 암울하기만 한 두 인생에 희망은 있을까. '똥파리'같은 인생들의, 숨쉬기조차 어렵도록(Breathless) 절망적인 세상에 대해 이야기하는 이 영화는 그러나, 징글맞도록 반복되는 폭력을 지나고, 지긋지긋한 가족을 넘어 희미한 희망의 싹을 심어놓는다."어렸을 때부터 봐왔던 것들이죠. 옆집 얘기고, 앞집 사연이고, 건넛집에서 일어났던 일들이죠. 내 이야기이기도 하구요."

서울의 변두리를 전전하면서 보낸 그의 학창생활은 '내일'이 없었다. 중학교 1, 2학년이 되자 친구들 거반이 담배피고 술마시고 본드를 불었으며 '나이트'에서 시간을 탕진했다. 양익준 그도 마찬가지였다. 비행청소년? 아예 그런 말도 개념도 필요없었다. 열에 일곱이 그런 동네였으니까. 모두들 속에서 무엇인가가 끓어올라 미칠 것 같았지만 아무도 바르게 뱉어내는 방법을 가르쳐주지 않았다.

"중학교 때 친구들끼리 술마시고 싸운 적이 있었어요. 가족 얘기하다가요. 나는 아버지가 싫다고 소리질렀고, 어떤 친구들은 엄마가 이혼하고 좌판에 나앉았다고 했고, 또 누구는 엄마 아빠가 어떻다고 울었고…"양익준도 장래희망란에는 '과학자'를 늘 써놓았지만 되고 싶은 것도 하고 싶은 것도 없었으며 존경하는 위인은 알 수도 없었다. 그러다가 친구 하나가 방송국 춤경연대회에서 1등을 했다. '현진영과 와와' 백댄서로 뽑힌 친구도 있었다. 춤은 친구가 했으니 "난 탤런트나 돼 볼까"했다. 어른되는 법을 제대로 몰랐으니 배우가 되는 법도 알 턱이 없었다.

"술먹고 길거리에서 오줌을 싸는 데 친구가 뒷통수를 팍 치더라구요. 그 자리에서 엎어져서 꼼짝 앉고 있었죠. 나름 죽은 연기를 했던거에요. 미친놈이지. 자기 오줌에 엎어져서 일어나지 않으니까 친구들이 진짜 겁을 먹더라구요. 이 정도면 진짜 연기 재능이 있는 거 아니냐 싶었죠."

중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상업고등학교를 다녔고, 입대 전에는 어린이용 완구를 파는 영업사원도 하고 용산 전자상가에서 냉장고도 날랐다. 아현동 가구점에서 배달도 했고 공사판 일용 노동도 숱하게 했다. 몇 십만원 받아 쥐면 술값이 반. 사고 싶었던 청바지 하나 사면 그만인, '내일 없는 청춘'이었다.

그러다가 군에 갔고, 병장 말년 대학 복학 얘기를 하는 고참들을 보고는 불현듯 대학에 가야되는가 싶었다. 수능을 봤고 중학교 시절 탤런트가 되겠다는 꿈을 생각해내고 공주영상대에 지망했다. 실기를 보기 전날엔 사고가 있었다. 친구들과 거리를 지나다 맞은편에서 오던 패들과 시비가 붙어서 흠씬 두드려 맞았다. 바로 내일이 실기인데 얼굴 반이 시커멓게 멍이 들었다. 최종면접까지 모든 질문이 "얼굴은 왜 그래요?"였다. 추가합격 10순위에나 이름이 올라있던 그는 다행히 끝에서 몇 번째 합격장을 받아들었다.

대학 졸업 후에는 6개월 '무료' 과정으로 명계남씨가 개설했던 연기학교 '액터스21'에 다녔다. 30여편의 단편과 장편에 출연했다. 첫 걸음은 배우로서였다. 그러다가 어느날 대만출신 감독 허우샤오시엔의 한 마디를 들었다. "생각하는 것은 물 위에 글을 쓰는 것이고 영화를 만드는 것은 돌 위에 새기는 것이다". 그말을 6개월 동안 방안에 붙여놓고 단편 영화 첫 작업을 준비했다. 그리고 첫 장편영화 '똥파리'는 난곡동 지하 전세방을 경기도 능곡 지하방으로 옮기며 완성했다. 그 결과는 해외평단의 격찬 속에 총 18개 국제영화제에 초청되고 7개영화제에서 9관왕을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돈을 벌 뿐 소통하는 법을 몰랐던 이 땅의 불쌍한 짐승으로서의 아버지, 가족이라는 짐을 짊어지고 짓눌리면서 살아가도록 하는 시스템에 대해서 말을 하고 싶었습니다. 사실 내게는 '살풀이'같은 작품이기도 합니다."영화 속에서 주인공 연기를 한 양익준 감독은 내내 끔찍하게 욕하고 때린다. 영화가 끝나고 자신의 단편을 담은 DVD라도 팔라치면 관객들이 머뭇머뭇 다가오길 꺼릴 정도다.

하지만 양 감독은 영화와는 달리 웃음이 헤프고 장난과 농담을 좋아하는 청년이다. 웃음과 영화는 그의 삶에 숨통을 틔워준 언어다. 마지막으로, 그의 아버지의 반응이 궁금했다. 아버지에 대한 다이너마이트같은 분노와 증오로 출발하는 아들의 영화를 어떻게 봤을지 궁금했다. 그는 시사회에 모신 아버지께 "불편하셨죠?"라고 물었다. 아버지는 시선을 먼 곳으로 떨어뜨리시며 "니가 죽을 때는 마음이 영 이상하더라"라고 답하셨다. 4월의 봄날 이른 아침 서울 가회동 골목의 한 카페에서 만난 그의 전언이다.

이형석 기자/suk@heraldm.com사진=박해묵 기자/mook@heraldm.com- `헤럴드 생생뉴스` Copyrights ⓒ 헤럴드경제 & heraldbiz.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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