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양 창평 삼지천 마을에서 행복을 말하다

정지우 기자 2009. 4. 3. 1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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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림에서 찾는 행복

느리게 걸을수록 많은 것이 보인다는 담양 창평 삼지천 마을. 5백 년은 족히 된 돌담길과 고즈넉한 고택, 깊은 장맛을 내기 위해 정성을 다하는 명인, 진심으로 손님을 맞이하는 한옥 민박집 등 삼지천 마을에는 내딛는 걸음걸음마다 현재를 뛰어넘는 과거와 미래가 있다.

삼지천 마을의 돌담길을 걷다 보니…따뜻한 봄 햇살이 삭막했던 마음을 녹일 무렵, 바쁜 생활로 지친 심신을 달래고자 평화로운 시골마을 어딘가를 찾던 중 삼지천 마을을 알게 됐다. 느리게 걸을 수 있는 여유를 준다는 정보만으로도 가슴이 벅찬 것은 그만큼 빠르게 돌아가는 도시 생활에 염증을 느끼고 있어서였을 것이다. 삼지천 마을은 16세기 초에 형성된 전통 한옥 마을이다. 유명한 돌담길이 마을 전체로 굽이굽이 이어져 있고 그 사이로 보이는 전통 가옥의 모습은 옛 정취를 느끼게 한다. 그래서인지 마을에 들어서자마자 저절로 걸음이 느려지는 게 느껴졌다. 슬로 시티로 지정된 마을임은 알고 있었지만 과연 슬로 시티가 어떤 매력을 주는지 의문이 가득하던 차였는데, 종종걸음이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이곳 공기가 입구에서부터 그 매력을 내뿜고 있었다.

여기서 잠시 슬로 시티에 대해 짚고 넘어가자. 슬로 시티는 이탈리아 중북부의 작은 마을 그레베 인 키안티(Greve in Chiantti)의 슬로 시티 운동에서 시작됐다. 'Slow'는 단순히 'Fast'의 반대가 아니라 환경, 자연, 시간, 계절은 물론 우리 자신을 존중하며 느긋하게 사는 것을 의미한다. 슬로 시티의 슬로건은 한가롭게 거닐기, 듣기, 권태롭기, 꿈꾸기, 기다리기, 마음의 고향 찾기 등 여유로운 아날로그적 삶 추구다. 2007년 12월 1일, 아시아에서는 최초로 우리나라 전남지역 네 곳이 선정되었는데 전남 완도군의 청산도, 신안군의 증도, 장흥군의 장평, 그리고 바로 이곳 담양군의 '삼지천 마을'이다.

결국 슬로 시티란 바쁜 현대인에게 마음의 안정과 여유를 줄 수 있는 곳을 말하는데 삼지천 마을은 그에 걸맞게 무척 평화로웠다. 마을에 들어섰을 때 가장 마음에 든 점은 시끌벅적하고 상업화에 물든 관광지의 아우라가 아닌 지나가다 숨을 고를 수 있는 쉼터의 느낌을 준다는 것이었다. 마을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여느 시골 마을과 다르지 않았으며, 순박하고 인심 좋은 주민들에게서는 유명한 마을의 거만한 주인의식 같은 것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마을이 시작되는 입구이자 가장 큰 건물인 면사무소에서 무료로 대여해주는(공짜에 익숙하지 않은 도시 사람들에게는 이것 또한 작은 감동이다) 자전거를 끌고 이 동네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돌담길을 찾았다. 마을은 모두 돌담길로 형성되어 있지만 유독 이 돌담길이 유명한 이유는 우리나라에서 잘 볼 수 없는 2층 한옥집이 보이기 때문이다. 일본식 한옥을 연상시키기도 하는 이 한옥 앞에 서니 저절로 카메라 셔터에 손이 갔다. 마을에는 전통 방식 그대로 유지된 돌담길과 함께 정갈하게 보수가 된 돌담길도 있었다. 전통을 지켜나가는 곳에 인위적인 손길이 더해진다는 게 왠지 거슬려 이유를 물으니 머물다 가는 사람들에게 좀 더 가다듬어진 돌담길의 정취를 느끼게 해주기 위해서 만들었단다. 슬로 시티에는 여유와 아날로그적인 감성도 있지만 천천히 자연스럽게 나아가는 미래적인 요소도 존재해야 한다는 게 그 이유.

돌담길을 걷다 보니 고가들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이곳은 고 씨 집성촌으로 고재선, 고정주, 고광표, 고재욱 고가가 유명하다. 그중 가장 유명한 고재선 고가를 찾았다.

뒷문으로 들어서자마자 넓은 마당이 있는 안채가 펼쳐지고 아무도 살지 않는 이 고가의 대청마루에는 봄기운이 완연한 햇살이 사람의 온기를 대신하고 있었다. 하루 전 때 아닌 눈이 내려 삭막한 분위기의 고가를 사진에 담아야 하는 건 아닌가 하는 걱정이 앞섰는데 하늘이 도왔는지 이날은 살랑살랑 부는 봄바람과 청명한 하늘이 이곳을 찾은 이들의 발걸음을 가볍게 해주고 있었다. 고재욱 고가에는 안채와 사랑채, 그리고 지금은 안타깝게도 가뭄으로 말라버린 연못이 있었다. 이 빈집에 무에 그리 볼 것이 많을까 했지만 집 안 곳곳을 살피다 보니 시간이 훌쩍 흐르면서 우리 조상들의 여유로운 한때가 머릿속에 그려지기도 했다.

고가의 매력에 흠뻑 취해 있을 무렵 이곳에서 조금 떨어진 고 씨 집안 종부 명인 기순도 씨의 장맛에 대한 얘기를 들었고 그곳으로 발걸음을 옮기지 않을 수 없었다.

마을을 돌아나가다 보니 허름한 쌀엿 간판이 두세 집 건너 한 집씩 붙어 있었다. 창평 쌀엿은 조선시대에 양녕대군이 이곳 창평 지역에 낙향해서 지낼 때 함께 동행한 궁녀들이 전수해준 것으로 이 지역에 부임한 현감들이 궁중 대감들에게 선물한 것으로 유명하다고 한다. 창평 쌀엿은 바삭바삭해서 입 안에 붙지 않고 먹은 뒤에도 찌꺼기가 남지 않으며 생강을 섞어 맛을 내는데, 이 쌀엿을 원료로 만든 한과 또한 유명하다.

때마침 지나가던 동네 주민이 한과 한번 맛보라며 한 봉지를 덥석 안겨주었다. "감사합니다!"를 연신 외치고 한 입 베어무니 과연 그 맛이 일품이었다. 겨울에 오면 엿을 고는 모습을 볼 수 있다는데 그 유명한 보성댁 간판 앞에 서니 엿 고는 모습을 놓친 것이 조금 아쉬웠다. 돌담 중간 중간 아직 피지 않은 담쟁이 넝쿨이 목적지를 향하는 발걸음을 또 한 번 조금씩 늦춰주었다.

진장의 깊은 맛을 이어가는 명인에게 인생을 배우고

마을 입구를 조금 벗어나 대나무 숲을 지나 기순도 명인의 집에 당도했다. 들어서자마자 마당을 가득 채운 4백여 개의 장독이 "과연 명인의 집이구나!" 탄성을 자아내게 했다.

온화한 미소로 일행을 반긴 기순도 씨는 둘러보기 전에 장맛을 보라며 일행의 점심상을 마련한 곳으로 우리를 이끌었다. "차린 것 없는 시골 밥상"이라는 기순도 씨의 말이 무색하게 청국장, 된장, 간장과 어우러진 깔끔한 나물 반찬들로 이루어진 보약을 능가하는 귀한 밥상이었다. 감탄사를 연발하며 한 상 해치우고 난 후 본격적으로 장맛의 비밀을 캐보기로 했다.

장독대 하나를 열어 친히 찹쌀고추장을 퍼주시어 맛을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차지고 깊은 장맛에 맵지도 짜지도 않은 것이 신기할 뿐이었다.

"대숲 바람과 솔바람, 햇볕을 받으면서 전통 옹기에서 숙성되기 때문에 최고의 맛을 낼 수 있어요. 이 장독에 있는 장들은 모두 거쳐야 할 과정을 거치고 오랜 시간 묵힌 것들이지요. 사람이나 장이나 진득한 맛이 있어야 제 맛이지. 그나저나 어제까지 그렇게 춥더니 오늘 날씨가 너무 좋네. 복 받은 사람들이야."

기순도 장의 특징은 간장, 고추장, 된장, 청국장에 모두 죽염을 기본 재료로 사용한다는 것이다.

"아까 오는 길에 대나무 밭 봤죠? 거기서 3년 넘게 자란 왕대를 마디마다 잘라 대통 안에 부안에서 가져온 천일염을 가득 다져 넣고 소나무 장작으로 구워요. 한 번 구우면 대는 타서 재가 되고 소금은 굳어 하얀 막대가 되는데 이걸 빻아 다시 대통에 넣고 아홉 번을 굽죠. 마지막 아홉 번째는 송진으로만 불을 때는데 이 과정이 끝나기까지 두 달이 넘게 걸려요."

이렇게 힘겨운 시간을 거쳐 만들어진 죽염이 질 좋은 국산 콩과 만나 죽염 된장이 탄생한다.

된장과 간장, 고추장의 원료인 메주를 만드는 과정도 만만치 않다. 동짓달에 메주를 만든 뒤 짚에 매달아 한 달 정도 발효시킨다. 잘 뜬 메주를 숨 쉬는 항아리에 죽염수와 함께 5개월 이상 발효시킨 후 마지막으로 죽염수에서 뺀 메주를 메줏가루와 섞어 항아리에서 숙성시키면 단백질, 탄수화물, 철분, 칼슘 등의 영양소가 풍부한 된장이 완성되는 것이다.

몇 해 전부터는 청국장을 재래식 방법 그대로 만들고 있는데 죽염 청국장은 청국장 특유의 냄새가 나지 않아 남녀노소, 외국인까지 거부감 없이 먹을 수 있어 인기라고 한다.

장독대를 배경으로 소나무가 멋있게 늘어선 모습을 보고 감탄하니 기순도씨가 한마디 한다."예부터 장 담그기에는 최적의 장소라는 말을 들어왔어요. 수천 그루의 소나무에서 날리는 송홧가루, 지하 150m에서 퍼 올리는 암반수가 장맛을 돋워줘요. 어떻게 보면 우리 장은 자연의 선물이기도 하지요, "

왜 이런 고정관념이 생겼는지 모르지만, 장인 혹인 명인이라 불리는 사람들은 고집이 세고 자신의 일에 자부심이 대단해 사람들에게 융통성이 없다는 이미지가 강했다. 하지만 기순도 씨가 우리에게 보여준 것은 깊은 장맛 만큼이나 깊은 삶의 자세와 장을 대하는 마음이었다. 고 씨 집안의 종부로서 깊은 장맛을 잇기 위한 그녀의 노력은 결코 가볍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결코 무게를 느끼지 않았다고 했다.

"내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이고 지금도 아주 즐겁게 하고 있어요. 게다가 자식들도 이렇게 잘 도와주니 더 바랄 것이 없지요. 앞으로도 노력과 정성으로 장맛을 지켜나가고 싶어요."

집을 나서려는데 잠깐 들어오라며 모과차를 내왔다. 그리고는 소화도 잘되고 몸에 아주 좋다며 죽염 몇 알씩을 손에 쥐어주었다. 호텔의 브런치와 커피 전문점의 진한 커피에 길들여져 있던 도시인들의 얼굴에 잠깐 감동의 빛이 어렸다. 이런 것들을 잊고 살았구나…. 천천히 모과차를 홀짝이며 일어선 우리는 고마운 마음을 뒤로하고 마지막 코스인 민박집 '한옥에서'로 향했다.

한옥에서의 정다운 시간이 지친 마음을 도닥인다

삼지천 마을에는 민박집이 딱 하나 있는데 그곳이 바로 '한옥에서'다.친절한 주인아저씨와 한옥의 멋을 제대로 살린 이곳은 삼지천 마을에 들른 여행객들이 꼭 한 번씩 들르는 곳이다.

마당에 들어서니 안채 건너편에서 공사가 한창이었다. "방을 조금 늘리려고 공사 중인데 정신이 하나도 없어요." 잘 정돈된 마당에는 돌길이 펼쳐져 있고 햇살이 잘 드는 문가에는 대나무 지지대가 인상적인 빨랫줄이 걸려 있었다. 그야말로 어릴 적 시골에서 보던 정취 그대로다.

마당 안쪽으로 들어서니 살이 너무 통통하게 올라 마을 사람들조차도 토종 진돗개가 맞느냐고 의심하게 하는 귀여운 강아지가 몸을 쭉 빼고 있었다.

이곳 역시 삼지천 어느 곳과 마찬가지로 조용하고 잔잔했다. 그래도 여행 온 기분을 조금 내고 싶은데 하고 생각하다 널을 발견하곤 기쁜 탄성을 내질렀다. 익숙지 않은 널뛰기가 신기하고 재밌는 건 다른 여행자들도 마찬가지리라.

안채는 전통 한옥 양식이고 건너 채는 내부를 개조한 한옥인데 이곳이 바로 여행자들이 머무는 곳이다. 화장실도 따로 마련해 여행자들이 불편을 느끼지 않게 배려했다. 해가 저물 무렵 갑자기 시장기가 느껴졌다. 주인아저씨에게 배고픔을 하소연하자 집 뒤편에서 장작과 커다란 솥뚜껑을 가지고 나왔다.

"여기다 삼겹살 구워 먹으면 정말 맛있어요. 불 한번 피워봐요." 아저씨가 가르쳐주는 대로 불을 피우고 삼겹살을 구워 먹으니 < 패밀리가 떴다 > 가 따로 없다. 이 마을에 와서 가장 떠들썩한 시간을 만난 우리는 삼겹살을 구우며 정신없이 웃고 떠들기 시작했다.

처음 이곳에 도착했을 때, 기나긴 밤 시간을 무얼 하며 보낼지 은근히 걱정했던 우리는 낮의 여유로운 시간이 지겹지 않았던 것처럼 밤 또한 여유롭게 그리고 즐겁게 보낼 수 있었다. 삼지천 마을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갔다가 다시 현재에 머무르면서 아주 천천히 한발씩 앞으로 가는 느낌이었다. 무엇하나 자극적인 요소가 없는데 결코 심심하지 않았다.

눈에 보이지 않는 슬로 시티의 조건들, 마음의 여유를 찾게 해주는 공기, 진정성, 친절함, 이 모든 것을 갖추고 있는 곳이 삼지천 마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삼지천 마을이 가지고 있는 무형의 자산이 꼭 지켜졌으면 하는 마음이 한옥에서의 시간을 아쉽게 붙들었다. 마음이 복잡해지는 날 홀로 찾아와 또다시 느림의 미학을 안고 가리라는 다짐과 함께….

의상 협찬|st.a·제시뉴욕(02-3442-0151), gv2(02-3445-6429),루이까또즈·jeep·빅토리아 녹스·헤지스(02-546-7764) 모델|강민석, 최유진코디네이트|이윤정 헤어 & 메이크업|장라윤 사진|김외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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