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명중의 나는 지금도 꿈을 꾼다] <60> 나의 페르소나를 찾아서

2009. 3. 9. 0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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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현목의 '사람의 아들' 임권택의 '짝코' 두 작품 중 갈등"이 영화가 마지막 작품" 대종상 유감독에 안겨드려부산영화제서 만난 임감독 "내 영화 출연 한 번 허재"

1980년, 배우생활을 마무리 하고 감독 준비를 하며 마지막 출연작을 선정하기 위해 고심할 때였다. 한국의 대표 감독인 유현목 감독의'사람의 아들'과 임권택 감독의 '짝코'가 내 출연 결정을 기다리고 있었다. 두 감독 모두 나에게 대종상 주연상을 안겨준 은사였다. 그런데 두 감독 모두 내가 자기 작품 하나에만 출연하기를 원했다.

나는 두 분에게 나의 감독 전향 계획을 말하지 않았다. 그분들의 마지막 수업을 마치고 떠나고 싶었다. 나는 두 제작사에게 기간을 나누어 촬영 할 것을 제안하였다. 그러나 두 작품 모두 동기간에 촬영을 마치고 그 해 대종상에서 자웅을 가리겠다며 준비하고 있었던 터라 나의 제안을 단호히 거절하고 압박을 가해 왔다.

임권택 감독의 '족보'와 '깃발 없는 기수'를 함께 만드는 동안 그분의 천재적인 영화재능과 인품에 완전히 매료되었던 나로서는 다른 선택을 하기가 힘들었다. 더군다나 2년 연속 함께 대종상을 거머쥐며 임권택 영화세계를 바꿔놓았다는 평을 들었던 이른바 '콤비'가 아닌가.

유현목 감독. 그 분의 완벽한 연출력에 관해서는 두 말이 필요 없었다. 게다가 어린 시절 그의 '오발탄'에 빠져 영화판에 뛰어들었고 그의 '불꽃'으로 나는 최연소 대종상 주연상을 수상하게 되었다.

나의 이러한 고민이 제작사에 전해지자 유현목 감독이 나를 불렀다. "아...이 영화가 나의 마지막 작품이 될지 몰라." 유현목 감독이 흘러내리는 안경을 올리며 나를 쳐다보셨다. 나는 아무 대답도 못하고 발길을 돌렸다. 이어 임권택 감독이 나를 불렀다.

충무로 한복판 어느 여관방. 시나리오 작가 송길한 선생과 앉아 낮 시간인데도 벌써 술이 많이 취해 계셨다. 앉자마자 술을 권하더니 감독님 특유의 말투로 더듬거리며 말문을 여셨다.

"고민... 할 거... 뭐 있어..." 나는 난감했다. "감독님, 시간을 나눠서 하면 안 될까요?" 창 밖이 어두워지고 방안에 빈 맥주병이 잔뜩 쌓이는 동안 아무 말도 못 하고 주는 술만 받아 마시던 내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두 감독을 모실 방법은 그 길 밖에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내 말이 떨어지자 정적이 흐르던 방안에 갑자기 지진이 일어난 듯 그의 곁에 쌓였던 책들이 와르르 넘어졌다. 그가 벌떡 일어난 것이다.

"안 뒤어. 내... 영화 밖에... 못 혀." 나는 이미 유 감독께 나의 심정을 설명하고 제작사에게 두 작품을 동시에 하는 조건으로 출연료도 절반을 받기로 하고 임 감독을 만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임 감독은 한 치의 양보도 할 생각이 없었다.

"나도... 이 영화가 마지막 작품이여." 나는 작중의 앞니를 빼는 장면에서도 실제 빼겠다고 까지 하며 그의 마음을 달래려고 하였다. 그는 단호했다. " 하명중씨... 없다고... 내가... 영화... 못 하는지... 어디... 두고 보시오." 나는 더 할 말이 없었다. 한 배우를 사랑하는 그의 절규는 나의 가슴을 찢어 놓았다.

나는 그에게 아쉬움을 남긴 채 그 곁을 떠났다. 그리고 유 감독과 '사람의 아들'을 완성, 그 해 대종상 작품상을 유 감독에게 안겨드렸다. 유 감독과 일하는 동안에도 임 감독이 촬영 현장에서 매우 우울해 한다는 소식을 들으며 마음이 내내 편치 않았다.

유 감독은 그 이후 한 두 편의 영화를 더 만드셨으나 '사람과 아들'이 후기 대표작으로 남았다. 임 감독은 그 이후로 안성기 등 배우들을 많이 키워 당신의 새로운 영화세계를 개척해 나갔다. 그는 그의 말대로 나 없이도 최고의 영화를 만들었다.

내가 배우 생활을 접고 감독으로 활동하던 어느 날, 한 치과에서 그를 만났다. 그와 헤어진 지 10년이 지나서 였다. 우리는 대낮부터 취했다. 똑같이 이를 뽑아 퉁퉁 부은 얼굴을 서로 어루만지며 마시고 또 마셨다. 어깨동무를 하며 걷다가 쓰러지면 다시 일어나 놓치면 없어질세라 다시 어깨동무를 하고 또 걸었다.

한 밤중 어느 술집에서 둘은 정신을 잃은 채 쓰러져 잠들었다. 다음 날, 눈을 떠 보니 각기 제집이었다. 임 감독의 부인 채영 여사가 뒤처리를 해 준 것이다. 그 날 그가 말했다. 수없이... "나하고... 한 편... 더 허재..." 나는 그의 애정 어린 눈빛을 바라보며 그가 나를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알았다. 그렇게 재주 없는 배우를 사랑한 그 감독을 나는 떠났던 것이다.

몇 년 전, 유현목 감독 8순 잔치가 있었다. 휠체어에 몸을 싣고 나타난 유 감독 뒤로 한국의 수난사를 한 눈에 보는 듯한 영화 스틸 컷들이 줄줄이 수놓고 있었다. 그 중 한 사진이 내 발길을 멈추게 하였다.

안경 낀 대학시절의 유 감독의 모습과 그의 마지막 영화가 되다시피 한 '사람의 아들'의 '민요섭'의 안경 낀 모습이 거의 동일하였다. 유현목 감독 후기 영화의 페르소나(영화감독의 분신으로 특정한 상÷?표현하는 배우를 이르는 영화용어)는 배우 하명중이었던 것이다.

지난 해 오랜만에 부산 국제영화제에서 임권택 감독을 만났다. 우리는 둘이서 해운대 모래사장을 걸었다. 내 손을 꼭 쥔 그의 손은 땀으로 꽉 차 있었다. 그리고 그가 나를 바라보며 말을 하였다.

"우리... 그 때가... 좋았제..." 임 감독의 70년대 후반 영화 페르소나는 배우 하명중이었던 것이다. 임 감독님이 요즘도 가끔 내게 말씀하신다. "내 영화에... 출연... 한 번 허재..." 나는 웃으며 말한다. "재주 없어서 못해요."

감독은 외롭다. 감독의 영화 속 분신을 찾기란 너무나 어렵다. 이미 고정화된 캐릭터의 배우를 기용하면 감독의 작품 세계는 독창성을 잃게 된다.

나는 매 번 영화를 준비하며 두 거장 감독이 그의 페르소나가 떠난 것을 아쉬워하던 때의 일들을 경험한다. 그럴 때마다 그 분들에게 미안함을 느낀다. 그러나 감독은 새로운 영화를 위해 새로운 그들의 페르소나를 만들어야 한다. 그것을 위해 거리로 나선다. 나의 신작 '주문진'의 페르소나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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