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상자 구한 그날의 헌혈행렬..광주, 다시 줄을 서다

2008. 12. 17. 2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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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5·18 31돌] 나눔 새긴 헌혈릴레이

"숭고했던 나눔정신 다시한번 되살리자" 시민들 아름다운 동참

피·얼음·빵과 우유 아낌없이 내놨던 과거 떠올리며 '눈시울'

5·18 민중항쟁 31돌을 맞은 광주에서 5·18 정신의 하나인 '나눔'을 실천하려는 헌혈 운동이 대대적으로 펼쳐지고 있다. 17일 오후 광주광역시 동구 금남로3가에서 열린 '5·18 헌혈 릴레이'에는 5·18 유공자를 비롯해 시민·학생·경찰관·장애인·공무원 등 500여명이 줄을 섰다. 이들은 현장에서 헌혈하거나 헌혈증을 기증하거나 헌혈 약정서를 작성했다. 광주경찰청·광주시·전남대·광주신세계 등은 16~18일 잇따라 단체 헌혈로 동참하고 나섰다. 양해지(23) 전남대 총여학생회장은 "5·18의 진원지에서 5월의 나눔 정신을 되살리려 한다"며 "사흘 동안 518명의 헌혈을 받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다.

헌혈 릴레이를 기획한 '5·18 민중항쟁 기념행사위원회'의 김태종(54) 기획단장은 "5·18은 세상과 사람에 대한 따뜻한 관심에서 시작됐다"며 "시민들의 릴레이 헌혈은 1980년 5월의 공동체 정신을 되찾고 타인의 고통에 관심을 갖겠다는 다짐"이라고 말했다.

줄지은 헌혈 행렬은, 31년 전 계엄군의 집단 발포로 시민들이 쓰러지자 금남로·양림동·산수동·방림동 등 광주시내 곳곳에서 동시다발로 헌혈에 나섰던 50~60대 시민들의 눈시울을 뜨겁게 만들었다.

당시 36살이던 시민 김봉근(67·광주 북구 용두동)씨는 "그때 '큰일났다, 피가 부족하다'고 발을 동동 구르던 의사들, '어딜 가면 헌혈할 수 있냐'고 줄 서던 학생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며 "이제야 광주의 초심이 되살아난 것 같다"고 말했다. 김씨는 1980년 5월21일 금남로3가에서 계엄군의 집단 발포를 목격하고 피범벅이 된 부상자 4명을 전남대병원 등에 옮겼다. "사람이 죽어가는데 가만있을 수가 없었다. 누구라도 그랬을 것이다."

이튿날 광주적십자병원에 나갔다가 '총상 환자에겐 약보다는 피가 절실하다'는 의사의 호소에, 전남도청으로 뛰어가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피가 없어 죽어갑니다. 젊은이들을 살려주세요. 헌혈해주세요." 누군가가 확성기를 그에게 건네줬고, 어디선가 등장한 버스가 헌혈 자원자들을 적십자병원으로 날랐다. "병원 앞에 길게 줄을 섰어요. 어린 학생들도 있었고요. 결코 잊을 수 없는 아름다운 행렬이었지요." 그 순간 광주의 희망을 보았고, 줄 선 이들의 순수했던 얼굴을 마음에 담고 살아왔다고 했다.

1980년 5월 당시 21살 회사원으로 헌혈 운동에 나섰던 김준봉(52·서울 강동구 둔촌동)씨도 광주의 헌혈 릴레이 소식을 전해듣고, '이웃에게 자신의 피와 얼음, 빵과 우유를 나눴던 시민들의 공동체 정신'을 이제 다시 살리려는 모습이라며 박수를 보냈다.

계엄군이 시민들에게 집단 발포한 그해 5월21일 오후, 그는 전남도청 근처 사무실 건물 옥상에 있다가 총탄을 맞아 피범벅이 된 초등학생을 발견했다. 아이를 데리고 광주적십자병원으로 달려갔다. 의사는 김씨 멱살을 잡고 흔들었다. "답답한 사람아, 피도 없는데 이쪽으로만 환자를 데리고 오면 어떡하나." 병원 안에도, 병원 앞 화물차에도 부상자들이 가득 차 있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피를 많이 흘려 얼굴이 백지장 같았다.

'헌혈을 좀 도와달라'는 의사 말에, 김씨는 간호사 등과 팀을 이뤄 병원차에 올랐다. 시내를 돌며 확성기에 대고 외쳤다. "공수부대가 광주시민들에게 총을 쏴 피가 부족합니다. 헌혈해주십시오." 시민들이 200m 넘게 줄을 섰다. 혈액이 쌓여갔지만 더운 날씨에 혈액을 안전하게 보관하는 게 문제였다. 다시 확성기를 잡았다. "얼음이 필요합니다." 주민들이 냉장고에 있던 얼음을 들고 나왔다. 헌혈을 마친 시민들에게 "빵과 우유라도 있으면 하나씩 드려야 하는데, 미안합니다"라고 말했다. 이를 지켜보던 슈퍼마켓 주인이 가게 문을 열고 빵과 우유를 나눠줬다.

"너도나도 팔 걷어붙이고 이웃의 아픔을 나누던 시민들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김씨는 5월22일부터는 시민군 지휘부가 있던 전남도청에 들어가 시민학생투쟁위원회 조사부장 등으로 일하다 계엄군이 진압작전을 편 27일 새벽 연행됐다. 옥고를 치른 뒤 1981년 4월 석방됐다.

김씨는 "5·18은 나누려고 한 것이지, 얻으려고 한 게 아니다"라며 "시민들이 헌혈로 공동체 정신을 회복하려 애쓰고 있는 만큼 5·18을 내세워 뭔가를 챙기려는 일부 세력은 반성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광주/안관옥, 권혁철 기자 okah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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