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드 기획] 헌책을 애타게 찾아서

2008. 10. 10. 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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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느림과 여유'에서 '빠르고 편리한'으로 변하고 있는 헌책 시장

블로거 '회색연필'은 8월 초 5권의 책을 한 온라인 중고서점에서 샀다. 온라인 중고책 사이트에 갈 때마다 늘 검색하는 판타지 소설 영어 원서 <라이온 보이> 퍼핀북스판이 이날 딱 걸렸다. <라이온 보이>는 판권이 퍼핀북스에서 펭귄북스로 넘어갔다. 그 뒤 국내에는 퍼핀북스에서 출판된 책이 수입되지 않는다. 6~7년 전 퍼핀북스판 <라이온 보이> 제1권을 샀던 '회색연필'은 늘 제2권, 제3권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 한구석이 찝찝했다. 마침 이번에 제2권을 찾은 것이다. "이제 3권만 구하면 돼요." 회색연필은 짬날 때면 제3권을 찾아 온라인 헌책방 홈페이지를 뒤진다.

'헌책방 키드'는 '온라인 헌책방 가이'로

희귀본이나 절판본만이 아니라 값이 싼 책을 구하기 위해 온라인 중고서점을 이용하기도 한다. 회사원 박민우(31)씨는 "가격적 이득과 편리함이 온라인 중고서점의 장점"이라고 말했다. 그는 한 달에 10권가량 책을 구매한다. 매번 새 책 6~7권, 헌책 3~4권을 산다. 새로 나온 소설을 샀는데 작가가 마음에 들면, 중고책 사이트에서 그 작가로 검색을 한 뒤 나머지 작품들을 사서 보는 식이다. 헌책을 살 때는 고고북, 노란북, 마북닷컴, 헌책사랑 등 헌책 가격 비교 사이트에 들어가 가격을 비교한 뒤 가장 싼값에 나온 책을 산다. 박씨는 "새 책을 사는 것이 작가에 대한 예의일 수도 있겠지만, 보고 싶은 대로 다 샀다가는 경제적으로 부담이 크다"고 말했다. 청계천 헌책방을 뻔질나게 드나드는 '헌책방 키드'였던 박씨는 그리하여 '온라인 헌책방 가이'가 됐다.

'헌책 문화'가 바뀌고 있다. 헌책방을 유유자적하며 그 안에서 '느림과 여유'를 찾던 사람들이 '빠르고 편리한' 검색을 선호한다. 책을 소장하던 사람들이 점점 책을 소비한다. 필요한 책을 온라인 홈페이지에서 싸고 빠르게 구매하고, 다 본 뒤에는 재판매한다. 책의 회전율이 높아지고 있는 것이다. 온라인 중고책 직거래 서점 북코아(www.bookoa.com)의 선전은 이런 흐름을 보여준다. 2005년 처음 생긴 북코아는 해마다 성장률이 200%에 이른다. 누구나 판매자로 등록해 자신의 책을 팔 수 있고, 올라와 있는 책들을 검색해 원하는 책을 살 수 있다. 회원은 약 43만 명. 2만여 명의 판매자들이 300만 권의 책을 올려두고 있다. 매일 5천여 권의 책들이 새롭게 등록되고, 그 절반 수준의 책들이 팔려나간다. 부산의 훈민정음, 서울의 청구헌책백화점 등 기존 오프라인 헌책방들도 대거 입점해 있다. 황영섭 청구헌책백화점 대표는 "오프라인에서만 헌책을 팔다가는 문을 닫을 지경이어서 4년 전 홈페이지를 열었고 지금 북코아를 통해서도 거래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런 추세에 힘입어 지난 2월에는 업계 3위 온라인 서점 알라딘도 '중고샵'을 열었다. 하루 등록되는 책이 약 4500부. 현재 보유하고 있는 중고책만 14만 권이다. 알라딘에도 북마트 등 오프라인의 전문 중고책 서점 15업체가 입점해 있다. 중고샵은 매달 20%씩 매출이 성장해, 지금 하루 평균 거래되는 책이 3800권(2200만원)가량이다. 김성동 알라딘 마케팅팀장은 "헌책은 등록된 뒤 평균 2.8일 만에 판매된다"며 "옛날에는 헌책이라고 하면 너덜너덜하고 낙서가 된 책이라고 생각했는데 요즘은 점점 새 책처럼 보는 등 책 보는 문화도 바뀌어서 헌책 시장이 점점 클 수 있는 여건이 된다"고 말했다.

같이 오는 메모 "저는 이런 부분이 좋아요"

발품 대신 손품을 팔아 편리하게 구할 수 있는 온라인상의 헌책 거래에도 특유의 '사람 냄새'가 있다. 책 구매자로만 살다가 1년 전부터 '판매자'를 겸업 중인 이은지(27)씨는 100여 권의 책을 온라인 사이트에 올려두고 있다. 좋아하는 일본 소설부터 컴퓨터 관련 전공서적까지 그가 판매목록으로 올려둔 책만 100여 권이다. 1년간 판매 실적은 50여 권이다. 이씨는 책을 주문하는 '고객'들에게 손수 쓴 메모도 함께 전한다. 요시모토 바나나의 책을 대량 주문하는 이에게는 "저도 좋아하는 작가랍니다"로 운을 떼는 쪽지에 책 읽는 순서, 읽을 때 눈여겨볼 부분 등을 '공유'의 차원에서 함께 적어 보낸다. 때때로 많이 주문하는 손님에게는 덤으로 한두 권 더 끼워 보내주기도 한다. "오고 가는 정이랄까요." 블로거 '회색연필'은 "온라인상의 책거래에도 사람의 손을 타서 온다는 특유의 느낌이 있다"고 말했다.

온라인 책방을 통해 점점 중고서적 이용자들이 늘어나는 가운데 지난 9월1일 시작된 북리펀드 제도도 눈길을 끈다. NHN, 한국출판인회의, 교보문고, '작은 도서관 만드는 사람들' 등이 손잡고 시작한 캠페인이다. 매달 한국출판인회의에서 선정한 20권의 책이 교보문고 '북리펀드' 서가에 별도로 비치된다. 10월에 선정된 책은 오주석의 <그림 속에 노닐다>, 알랭 드 보통의 <행복의 건축>, 김용택의 <사람> 등이다(bookcampaign.naver.com/bookrefund/참조). 이 책들을 사서 한 달 안에 읽고 다시 반납하면 책값의 50%를 돌려준다. 반납된 책은 '작은 도서관 만드는 사람들'이 운영하는 학교·마을 도서관과 '책 읽는 버스'를 통해 산간벽지 주민 등에게 전달된다.

산 책 50% 돌려받고, 공짜로 얻고

북리펀드와 비슷한 제도로 무료 책 교환 전문 홈페이지인 '북스프리'(www.booksfree.co.kr)도 있다. 자신에게는 필요 없지만 남에게는 도움될 만한 책을 등록해 기증하고, 필요한 책은 신청해 가져가는 형태다. 단 포인트가 필요하다. 자신이 읽고 난 책을 올리면 1천 포인트가 주어지고, 다른 책을 받아가려면 1500포인트를 내야 한다. 책 두 권을 내고 한 권을 얻을 수 있다. "책장 속에 잠자는 책을 깨워서 나누자"는 정신으로 시작된 북스프리 운동은 2001년 '전세계의 도서관화'를 주창했던 미국인 론 혼베이커의 북크로싱 운동에서 영향을 받았다.

다양한 방식의 '책 돌려보기'가 여기저기서 이뤄지고 있다. 손에 손을 거치는 헌책의 자기 진화는 오늘도 내일도 계속된다.

글 박수진 기자 jin21@hani.co.kr

사진 윤운식 기자 yws@hani.co.kr

예기치 못한 선물

책 속에 사람이 있었네

'헌책'에는 특별함이 있다. 이문영 <한겨레> 기자는 2000년 한 헌책방에서 1982년 출간된 <사회사상사>를 샀다. 무심코 뒤적이던 이 책에서 그는 '도서열독허가증'(사진)이라는 쪽지를 발견했다. 이 허가증에는 '2589'라는 번호와 함께 '백태웅'이라는 이름이 쓰여 있었다. 허가증에는 '보안검인'란과 '교무계장·교무담당·영치담당'이 차례로 확인 도장을 찍는 란이 있었다. 대출 일자는 1985년 1월.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사노맹) 사건의 총책으로 구속됐던 백태웅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대 교수가 감옥에서 봤던 책인 것이다. 1985년 말이면, 사노맹 사건에 앞서 1984년 서울대 학생회를 재건하고 총학생회장으로 당선된 백 교수가 '학원 프락치 사건'으로 구속됐던 시기다. 이씨는 "이 책이 어떻게 흘러나왔을지, 정말 백 교수가 맞는지 나중에 그를 만나거나 인터뷰하게 된다면 꼭 물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며 "허가증 아래에 '반납 기한이 경과된 책을 소지할 경우 법에 따라 처리하겠다'는 주의사항이 써 있어 수인의 답답함이 잠시나마 느껴졌다"고 말했다.

자유여행자 황유원씨. 황씨는 2003년 여름 영국 웨일스 지방을 여행하다가 헌책방에 들렀다. 그곳에서 우연히 좋아하는 시인 딜런 토머스의 시집 <컬렉티드 포엠스>(Collected Poems) 1953년판을 7.5파운드(약 1만5000원)에 샀다. 흥분된 마음으로 빛바랜 50여 년 전의 책을 뒤적이는데, 마침 시집 출간 당시의 소개 기사가 오려져 책 속에 들어 있었다. "모순되는 이미지 간의 투쟁 속에서 순간적인 평화 상태를 만들기 위해 애쓴다. 그리고 그게 시가 된다"는 기사 속 딜런 토머스의 말이 기억에 남았다. 낯선 땅에서 1950년대라는 낯선 시간을 공유하는 경험이었다.

서강대 대학원생 정다정씨는 최승자 시인의 <이 시대의 사랑>을 한 헌책방에서 샀다. 시집에는 '연애'의 흔적이 녹아 있었다. 첫 장에는 '사랑하는 H.S'라는 글귀가, 그리고 시 중간중간에는 '왜 화가 났는지 알고 싶어. 너도 이런 마음이었을까' '무심한…' 등의 글귀가 쓰여 있었다. 정씨는 "우연히 들여다보게 된 누군가의 마음이 내 옛 경험과 만났는지 간절한 기분이 들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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