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드만 보던'백수폐인'취업전문가 되다

2008. 10. 7. 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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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히피 대학생… 영어회화실력과 자신감으로 당당히 취업"목포.울진 등 전국구 강의 일주일에 3000~4000㎞ 운전도"학창시절 경험이 가장 큰 자산…안되면 배낭여행이라도 하라"

"너 도대체 4년 동안 뭐했니?"

그의 따끔한 한마디에 상담받으러 온 졸업반 여대생 열에 아홉은 주르르 눈물부터 쏟아낸다. 서울 강남 테헤란로(여대생이 선망하는 근무지 1위)를 무대로 활동하는 멋진 커리어 우먼을 꿈꾼다. 그러나 평범한 학점에 그저그런 영어실력, 사회경험이라고는 과외교사나 서빙 아르바이트 말고는 찾아볼 수 없다. 이런 졸업반 여대생과 마주하고 있노라면 가슴이 답답해 한숨밖에 나오지 않는다. 최경희(30.인크루트) 씨. 그는 취업컨설턴트다. 그래도 오늘도 이들 앞에 서 '이력서 잘 쓰는 법'을 강의하고, 사연 절절한 e-메일에 답장하며 진로를 함께 고민한다. "취업컨설팅이 결국 인생컨설팅이더군요." 이제 갓 '계란 한 판' 나이인 그녀가 또래보다 의젓하고 성숙해 보이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1일 오후 3시 목포 모의면접, 2일 오전 10시 울진 강의

대기업 인사과 출신, 그것도 남성이 대부분인 취업컨설팅 세계에서 최씨는 변변치 않은 이력과 짧은 경력(1년7개월)에도 불구하고 '잘 나가는' 취업강사로 꼽힌다.

처음에는 어린 나이와 앳된 모습에 강의 맡기기를 꺼리던 대학 측도 나중에는 팬이 되어 꼭 그녀를 고집한다. 요즘 같은 취업시즌에는 많게는 한 달에 스무 건의 강의일정을 소화해야 한다.

지난 1~2일 스케줄을 보자. 1일 오후 3시 전남 목포에서 대학 모의면접에 면접관으로 참석했다. 다음날 오전 10시 경북 울진에서 강의해야 하는 빠듯한 일정. 하지만 이날 설상가상으로 고물 애마가 말썽을 부려 목포에서 렌터카를 빌려 타고 간신히 울진에 당도했다. 귀경한 시간은 3일 정오.

보통 직접 운전해 일주일에 3000~4000㎞를 달린다. "하루 1000㎞를 달린 적도 있어요. 어느 정도 거리인지 감이 안 오죠? 제가 사는 안양에서 경남 거제까지 왕복한 거리 정도돼요." 전국 취업캠프에 참여하다보니 이제 전국 도로망을 다 꿰뚫게 됐다. 지역 축제와 특산물도 줄줄 읊는다. 인터뷰 이후 일정은? 밤늦은 춘천행이란다.

▶재미있게 읽은 이력서? 취미는 축구에, 특기는 스루패스(Thru Pass)래요

취업지원자의 이력서를 미리 검토해주는 것은 그녀의 주요 업무 가운데 하나. "하루는 이력서를 보다가 배꼽 빠지게 웃은 적이 있어요. 취미와 특기란에 뭐라고 썼는 줄 아세요? 글쎄 취미는 축구고, 특기는 스루패스(공격팀에서 상대팀 선수 사이로 볼을 차서 보내는 기술)라는 거예요. 이 학생 얼굴이 너무 궁금해서 직접 찾아가서 봤는데…. 뭐가 이상한지 전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더군요."

생각할 때마다 가슴 뿌듯한 학생도 있다. 휴학을 하고 2년간 공무원시험을 준비했던 탓에 또래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한국외대 4학년생 L씨(여). 결국 공무원의 꿈을 포기하고 금융권에 문을 두드렸지만 이력서를 낸 50군데에서 번번이 낙방하고 피폐해질대로 피폐해진 상태였다. L씨는 최씨로부터 세 차례 컨설팅을 받은 뒤 결국 국내 굴지 은행에 합격했다. L씨는 신입사원 연수원에서 장문의 편지와 각종 과자가 가득 담긴 선물상자를 보내왔다. "편지 곳곳이 눈물자국으로 번져 있는데…. 저도 같이 울었어요." '기억이 나실는지 모르겠지만…'으로 시작하는 취업준비생의 e-메일은 하루에도 수십통씩 메일박스를 채운다.

L씨의 취업비결은 무엇이었을까. "본인의 꼼꼼하고 세심한 성격이 은행업무에 잘 맞는다고 막판에 어필한 게 효과를 본 것 같다"는 것이 최씨의 분석.

여대생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해보라고 멍석을 펴주자 봇물 터지듯 할 말을 토해내기 시작한다. "기업은 점점 더 지원자의 실무경험이나 학창시절 가시적 성과를 중시하는데 여학생은 그런 면에서 남학생에 비해 절대적으로 취약해요." 해외연수나 배낭여행 경험조차 없는 여대생에게 그 이유를 물으면 "부모님이 엄하셔서…"라며 말끝을 흐리기 일쑤라고.

일부 소극적인 여학생과 정확히 반대되는 한 남학생의 실례를 보자. 천안기술교육대 경영학과 4학년생 P씨. 학벌과 학점, 토익점수라는 소위 '스펙'면에서 딱히 내세울 게 없는 처지였지만 대학시절 따놓은 각종 자격증이 무려 26개, 응모해 당선된 공모전이 11개에 달했다. 거기다 각종 기업체와 기관 후원을 이용해 자기 돈 한푼 들이지 않고 수차례 해외여행을 경험했다. P씨는 졸업도 하기 전에 한국리더십센터 인턴에 합격했다.

최씨는 대부분의 여학생이 선호하는 마케팅 분야 대신 남성만의 세계에 뛰어들라고 조언한다. "여성은 일반 남성만큼만 일해도 더 주목받고 높이 평가받아요. 남자보다 쉽게 상위 1%에 속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말이기도 하다.

▶취업재수생이 취업전문가가 되기까지

최씨 역시 한때 방 안에 틀어박혀 미드(미국드라마)만 줄곧 보던 백수폐인이었다. 소설 '향수'에 꽂혀 향수전문가가 되기로 마음먹고 무작정 진학한 대학(경기대 화공과)은 적성에 맞지 않았고, 기자를 꿈꾸며 다시 들어간 대학(한양대 안산캠퍼스 신방과)에서는 광고에 매력을 느껴 광고홍보학과 강의를 더 재미있게 들었다. 1년6개월간 영국 연수까지 다녀와 나이는 먹을대로 먹었지만 막상 졸업을 해야 할 순간이 오자 막막하고 무섭기는 마찬가지였다.

"당시 토익점수도 없는 상태였죠. 외국에 비싼 로열티 주는 게 싫어서 일부러 안 봤거든요." 사실 대학시절 내내 '취업'이나 '성공'이란 단어보다 사회소수자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히피 대학생'이었다. "차림새도 딱 그랬어요. 동생이 중세시대 마녀같다고 할 정도였으니까요."

결국 졸업 이후 6개월간 백수로 지내며 'CSI시리즈' 'Law & Order' 'Sex & the City' 등 미드란 미드는 모두 섭렵하다 다시 학교(경희대 국제대학원)를 들어갔다. 최씨는 그 시절을 "무엇을 해야 할지, 내가 잘하는 게 뭔지도 잘 몰랐다"고 회고한다.

정작 본인의 취업비결은 무엇이었을까. 그는 영어회화 실력과 자신감 있는 태도로 정리했다. 무역업을 하는 부모님 덕분에 집에는 홈스테이하는 외국인 관광객이 끊이지 않았고, 자연스레 외국인 친구를 사귀고 대화를 나누게 됐다. 자료분석에 소질이 있다는 것도 나중에 알게 됐다.

이날 인터뷰 사진 촬영을 위해 이리저리 포즈를 잡던 그녀는 "만족도 최하인 직업이 뭔 줄 아느냐"며 분위기를 이끌었다. "바로 모델이에요." 그럼 직업 만족도 꼴찌에서 두 번째는? 바로 '의사'란다.

정은정 기자(koala@heraldm.com)

사진=이상섭 기자(babtong@herald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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