낱글자만 외게 하는 '속 빈' 한자열풍

2008. 9. 28. 1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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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상당수 초등학교가 한자 가르치지만

글자 쓰고 급수시험 치는 것이 전부

'어떻게 가르칠까' 공교육 고민 필요

초등 한자·한문 교육 교수법 '주먹구구'

"얘들아, 한자책 펴자." 아침 8시30분. 아이들이 제자리에 앉자 교사가 말한다. 학교에 갓 입학한 초등학교 1학년 아이들의 고사리 손이 책가방을 뒤적거려 한자책을 편다. 한자책은 학교가 제본해 나눠준 것이다. 아이들은 묵묵히 그날 배정된 한자를 쓰기 시작한다. 어떤 아이들은 부수도 알고 획순도 알지만, 그렇지 않은 아이들은 그저 한자를 '그린다.' 한자를 힘겹게 그리고 있는 아이들의 얼굴에는 지겨움이 묻어난다. 이날 교사는 집으로 돌아가는 아이들에게 학교에서 단체로 치르는 한자급수시험에 응시하라는 가정통신문을 나눠준다.

한 초등학교의 아침 풍경이다. 서울 강남교육청이 초등학교에 한자 교육을 도입하겠다고 발표해 뉴스가 됐다. 그런데 이미 많은 학교가 비슷한 형태로 한자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학교 현장에서는 강남교육청의 시도를 "새삼스럽지 않다"고 말한다. 성남시 분당구 정자동의 한 초등학교 권아무개(28) 교사는 "일주일에 두 시간 있는 재량활동 시간에 한자 수업을 하고 있으며 한 학기에 한번 교사들이 문제를 출제하는 한자경시대회도 연다"며 "비슷한 형태로 한자 교육을 하는 학교가 적지 않다"고 했다.

서울 강남교육청이 관내 초등학교를 조사한 결과, 51개 학교의 30% 정도가 아침 자습 시간 등의 자투리 시간을 활용해 한자 교육을 하고 있었다. 진철용 내발산초교 교사(전 서울초등한자교육연구회 회장)는 "아주 일반적인 현상은 아니지만 담임교사 차원에서 학생들의 학습을 돕기 위해 틈틈이 한자 학습이 이뤄져 오고 있던 것으로 안다"고 했다.

학부모들은 한자를 공부하는 게 교과학습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상식'처럼 받아들인다. 초등학교 1학년 자녀를 둔 강아무개(37·경기 동두천)씨는 "입학하기 전에 이미 한자급수시험 8급을 땄는데 엄마들 사이에서는 1학년이 8급부터 하는 건 좀 늦었다고 친다"며 "교과과정이 갑자기 어려워진다는 4학년부터 한자를 하는 건 더 늦지 않겠나"고 되물었다.

한자 학습에 대한 학부모의 관심은 출판시장만 봐도 여실히 드러난다. 2003년 나온 <마법천자문>시리즈는 지금까지 1000만권이 팔렸으며 가장 많이 팔린 1권은 200쇄를 넘게 찍었다. 출판사의 매출액만 500억원이 넘는다. 이 책을 기획안 이후남 아울북 본부장은 "한자급수시험 등 학부모들 사이에서 한자 학습 열풍이 불기 시작할 때 책이 나온 게 주효했다"고 말했다. 교육부 공인을 받아 민간단체가 치르는 한자급수시험만 7개에 이르며 한해 응시생은 150만명 정도로 추산된다. 92년부터 급수시험을 치러온 한국어문회 관계자는 "한해 응시생의 50~60%가 초등생"이라고 말했다.

문제는 이런 한자 학습 열풍만 있다는 점이다. 한자 교육에 대한 체계적인 접근이 부족하다. 어느 학년에게 어떤 한자를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 지 뾰족한 교수법은 없다. 공교육 현장도 마찬가지다. 학교장이나 담임교사들이 한자 교육을 한다고는 하지만 주먹구구식으로 이뤄지는 일이 많다. 기껏 10~20개의 한자를 10번씩 쓰도록 하거나, 이런 한자가 포함된 사자성어가 있는 것이 고작이다. 초등학교 4학년 자녀를 둔 이아무개(40·경기도 성남)씨는 "세 쪽 정도의 교재에서 '제일 어려운 글자 10개를 골라 10번씩 써오라'는 숙제로 애들이 한자를 제대로 배울 수 있겠냐"고 반문했다. 서울 강동교육청 관할 초등학교 김아무개(28) 교사는 "아침 자습 시간에 한자를 쓰고 외도록 하지만 내가 특별히 가르치는 건 없고 가끔 쪽지시험을 보는 정도"라며 "교내에서 치르는 한자경시대회도 교사들이 20문제 정도를 출제하는데 잘하는 애들은 5분 만에 다 푸는 수준"이라고 말했다.

이렇게 무조건 암기하고 급수시험을 보는 식으로 한자를 배우다 보니 아이들은 한자에 대한 흥미를 잃는다. 학부모 서아무개(33·경기 동두천시)씨는 "초교 2학년인 딸이 5급에 도전하면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다"며 "급수시험 대비하다 보니 글자만 알았지 문장 속에서 뜻을 찾지 못하니까 어려움을 느끼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호준 숙명여중 한문교사는 "한자에 대해 거부감을 느끼는 중학교 신입생들이 크게 늘었다"며 "강남권 초등학교에서 한자 교육을 시키면서 벌어진 일인 것 같다"고 했다.

초등학교에서 재량활동 등의 시간에 한자 교육을 하겠다고 하면, 학생들의 흥미를 돋울 수 있는 다양한 교수법이 먼저 개발되어야 한다. 물론 한자 교육에 대한 수요을 공교육이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에 대한 근본적인 합의도 필요한 시점이다.

우지영 서울 신당초 교사는 "사립초교에 있을 때 특기적성 시간을 활용해 한자를 가르쳐 봤는데 아이들의 다양한 수준을 맞추기도 어렵고 여러 단어로 파생되는 한자어의 특성을 설명하기도 힘들었다"며 "교사도 가르치기 버거우니 학생들이 흥미를 잃을 수밖에 없다"고 했다. 진재교 성균관대 한문교육과 교수는 "한자 교육이 필요하다지만 공교육이 이런 식으로 대응하면 한자 학습지나 급수시험 등 한자 사교육의 덩치만 불려주는 셈"이라며 "누가, 어떻게, 왜 한자 교육을 할 것인지에 대한 사회적인 논의가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진명선 기자 edu@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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