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서가는 유로기행] 사무엘 에투와 함께 한 어느 멋진 날

2008. 6. 29. 10:37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스포탈코리아=빈(오스트리아)] 서호정 기자= "미안합니다. 10분 정도 더 기다리셔야 할 것 같네요." "10분? 헤이, 난 벌써 30분 넘게 기다리고 있다고요." "우리도 어쩔 수가 없네요. 이해해주세요."

이 곳은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 그 중에서도 쇼핑가로 유명한 '마리아 힐페' 스트라세(거리를 뜻하는 독어)의 푸마 매장이다. 푸마 본사에서 온 마리아 크리스티나 바게티라는, 이름도 심상찮은 이 이탈리아 출신의 여성은 거듭 "이해해달라"며 나를 진정시키고 있다. 이제 서있기도 지쳤다. 잠시 앉아서 기다리자. 언제 올 지 모르는 사람인데…

왜 여기서 이러고 있냐고? 내 기자 생애 만난 최고의 스타일지 모를 사무엘 에투(27, 바르셀로나)를 인터뷰하기 위해서다. 그러니까 지금부터 30분 전이었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숙소에서 망중한을 즐기던 중 온 전화. 전날 귀국한 서형욱 편집장이다. "10시 15분까지 마리아 힐페 스트라세 52번지로 가. 거기 에투가 온댄다."

'오~ 에투라고! 에잉? 근데 마리아 힐페는 어디며 10시 15분이? 끄악~ 고작 30분 밖에 안 남았는데.'

그때부터 에투를 만나러 가기 위한 짧은 고난의 시간이 시작된다. '일단 간다. 만나고 보자. 다름 아닌 사무엘 에투다. 그래, 에투가 나를 기다리고 있어. 나와 인터뷰를 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고!'

순간 이번 대회를 통해 만난 유명 축구인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카를로 안첼로티, 아르센 벵거, 베르티 포그츠, 마르셀 드사이, 아! 지네딘 지단도 만났다. 지난 일요일. 스폰서 행사를 위해 빈의 어린 축구 선수를 상대로 '마르세유 룰렛'을 비롯한 자신의 테크닉을 전수해주고 직접 5대5 경기도 뛰던, 전혀 은퇴한 선수처럼 보이지 않던 지단도 5미터 앞에서 봤다.

그런데 이번에는 더 특별하다. 1미터? 아니 한 30센터미터? 내 바로 앞에서 에투를 볼 수 있다. 그것도 뒤에서 에투 얼굴이라도 제대로 나올까 카메라를 들고 기다리지 않아도 되고, 정중하게 시간 좀 내줄 수 있냐고, 사진 찍어도 되냐고 할 필요도 없다. 단독 인터뷰다.

부리나케 준비하고 호텔 데스크로 나와 마리아 힐페 스트라세의 위치를 물었다. 다행히 멀지 않았다. 호텔 근처의 로트하우스(시청) 역에서 겨우 두 정거장. 한번의 환승, 그리고 52번지를 찾기 위한 시간이 예측불가였지만 푸마 측이 신신당부했다는 약속 시간에는 아슬아슬 맞출 수 있을 듯 했다. 출발 전 인터뷰 담당자인 마리아 크리스티나에게 전화해 사정을 설명했다. "인터뷰 약속을 10분 전에야 확인했소. 약속 시간에 겨우 도착할 것 같은데 이해 좀 해주시길." "로트 하우스면 20분 정도면 충분하겠네요. 약속 시간에 맞춰서 오세요."

약속 시간 칼 같이 자른다는 서양 사람들 겁나서 빠르게 걷지도 않고 뛰어서 왔는데, 결국 이 꼴이다. 10시 15분이면 푸마 매장에 올 줄 알았던 에투는 11시가 다 되어 가도록 안 온다. 습기는 심하지 않지만 태양이 내리쬐는 직사광선의 양이라면 한국 이상인 오스트리아의 6월 날씨 속을 달려온 탓에 땀에 절었지만 물 한잔 안 챙겨주는 각박한 유럽 인심이란… 대기 중인 그 많은 물과 음료는 다 에투 전용인가요?

애처로운 눈빛으로 한숨을 쉬고 있는 또 다시 그녀, 마리아 크리스티나 바게티가 온다. 라스트 10분이랜다. 그러면서 은근슬쩍 이날 에투의 스케줄 표를 보여준다. 별 세계 사람의 사정을 범인이 이해하라는 의미인가.

그런데 그 스케줄이란 게 참으로 살인적이다. 전날 밤 빈에 도착한 에투는 이날 오전부터 저녁 7시까지 무려 12개 언론사와의 인터뷰가 잡혀 있었다. 푸마 매장에서는 오스트리아 방송국과 언론사, 그리고 아시아에서는 유일하게 스포탈코리아의 인터뷰가 진행됐다. 점심 이후에는 장소를 옮겨 빈 중심지인 볼크스시어터 부근에 위치한 푸마의 유로 2008 행사 매장에서 BBC, ESPN, CNN, 가제타델로스포르트, 키커, 유로스포츠, 프랑스 풋볼 등 이름만으로 기 죽이는 언론매체 라인업이 줄을 잇고 있었다. 그리고 저녁 7시, 이날 밤 열릴 스페인과 러시아의 경기도 보지 못하고 돌아간다. 순간 에투가 측은해 보였다. 가뜩이나 최근 프리미어리그로의 이적설로 말 많은데 같은 질문에 몇 번의 답을 해야할까.

게다가 에투는 최근까지 우간다 캄팔라에서 축구 봉사 활동을 하고 왔다. 디디에 드로그바나 에마뉘엘 아데바요르가 그러하듯 에투라는 이름은 카메룬뿐만 아니라 아프리카 땅에서 희망의 동의어쯤 된다. 여전히 소수만이 부를 향유하는 가난과 궁핍이 일상화 된 검은 대륙에서 육체가 만들어 낸 힘으로 세계 축구의 정점에 선 그들의 성공 사례가 곧 역할 모델인 것이다. 에투는 아프리카의 스타인 자신에게 주어진 의무와 책임을 피하지 않고 있었다.

1시간 가까이 기다리는 내 신세와 에투의 조금은 힘들어 보이는 사정에 한 숨을 쉬고 있는데 인상 푸짐하게 생기신 독일 아저씨가 와서 앉더니 대뜸 악수를 청한다. 아하, 오늘의 통역을 맡으실 분. 에투는 카메룬의 공용어인 프랑스어와 약간의 스페인어를 한다고 한다. 영어는 전혀 안 된다. 가뜩이나 영어 실력도 변변찮은 내게는 최악의 인터뷰 대상자다. 인터뷰 시간은 20분. 영어에서 프랑스어로 통역되는 시간도 꽤나 걸린 텐데 어학 연수 한번 못 다녀온 내 싸구려 영어가 시간을 잡아 먹는다면 큰 낭패다.

아저씨랑 합의를 했다. "에투가 오기 전에 미리 질문을 만들어 놓읍시다, 유 언더스탠드?" 영어와 프랑스어 거쳐가며 질답할 시간에 그냥 질문 하나 더 하자는 생각에서였다. 그때부터 독일 아저씨와 한국 청년이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팀이나 선수 이름은 괜찮은데 몇몇 용어가 이 독일 아저씨에겐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나 보다. 예를 들면 이런 거다. 우리가 흔히 아는 유로 2008? 독일 문화권에서는 EM 2008이다. EM이란 유러피언 마이스터샤프트(유럽 챔피언십)를 뜻한다. 올림픽 와일드 카드를 얘기하는데 아저씨 이해를 못하겠단다.

그때 구세주가 납셨다. 옆에서 두 남자의 대화를 듣던 또 다른 푸마 직원이 왔다. 팀 스테드먼이라고 자신의 이름을 소개한 그는 영국 맨체스터 출신의, 그나마 오리지널 영어와 축구 용어에 있어 어느 정도 통하는 사람이었다. 게다가 독일어도 가능했다. 맨유 팬이라는 이 팀이란 총각은 지치지 않는 아시아의 빅 플레이어, 박지성의 존재 때문에 한국에서 온 기자에 대해 큰 호감을 보였다. 그 순간 외치고 싶었다. '땡큐, 박지성!'

팀의 도움으로 올림픽 출전 여부, 바르셀로나에서의 생활, 이적설에 대한 질문 7-8개를 뽑은 그 시점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에투님이 나타나셨다. 마리아가 말한 라스트 10분은 결국 20분이나 지나 있었다.

매장으로 들어오는 에투의 모습은 퍽이나 인상적이었다. 그의 별명인 흑표범과 너무나 잘 어울리는 푸마 로고가 가슴에 크게 박힌 유달리 하얀 티에 반바지, 하얀 이를 드러내며 들어오는 그의 풍모는 뭔가 다른 기운이 느껴졌다. 팔목에 채워진 번쩍이는 금 시계와 손가락의 큰 반지, 가끔 아프리카 선수들의 패션 컨셉은 이해가 안 되지만 꽤나 어울렸다. 무엇보다 내 바로 앞을 지나가는 에투의 몸이 대단했다. 큰 키도 우람한 근육질도 아니지만 매끈하고 탄력 있어 보이는 몸과 반듯한 자세, 거기에서 프리메라리가를 정복한 그의 경이로운 플레이가 만들어진다는 게 대단해 보였다.

'이제 시작인가?' 했지만 역시나 땡! 오스트리아 국영방송 ORF가 먼저랜다. 그래, 방송 인터뷰란 건 금방 끝날 거고… 그때 또 마리아가 온다. 뭔가 느낌이 안 좋다. 또 기다리란 건가. 마리아 왈, 방송 인터뷰가 끝나면 두 번의 인터뷰가 있는데 바로 나와 오스트리아 기자단이다. 먼저 할 지, 나중에 할 지를 선택하란다. 뭐가 좋은 거냐고 물으니 나중이란다. 사람들 시선이 적을 때 원온원(1대1)으로 하는 게 낫지 않겠냐고.

그래서 또 15분을 기다렸다. 드디어 내 차례가 왔다. 이제는 에투가 잠시 일어섰다. 기자들 너머로 에투에게 계속 손짓을 하던 스페인 유니폼을 입은 커플을 가리키며 잠깐 가도 되겠냐는 사인을 보낸다. 뭐 하나 싶었더니 잠시 사진을 찍어주고 사인을 해줬다. 알고 보니 그 스페인 부부가 바르셀로나 팬이었다.

에투의 스페인 사랑은 특별했다. 1996년 레알 마드리드 B팀에 입단한 뒤 12년 째 스페인에서 모든 프로 경력을 보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유로 2008 개막 전 <포포투>와의 인터뷰에서 스페인의 우승을 예상했던 그에게 인터뷰 당일 러시아와 4강전을 치를 스페인의 경기에 대한 예상을 부탁했다.

"스페인 축구는 지금 세계를 통제하는 큰 리그 중 하나다. 이번 대회에서 가장 수준 높은 경기를 보여줬다. 오늘도 스페인이 이길 거라 본다. 거기서 뛰는 내 팀 동료들에 대한 기대도 크다. 아마 이번에는 우승할 거 같다."

자신이 소속된 리그와 팀에 대한 자부심을 한껏 자랑하는 에투의 표정은 꽤나 진지했다. 특히 놓칠 수 없는 건 그의 크고 맑은 눈이었다. 최근의 계속된 여행으로 인한 피로 때문인지 조금은 충혈됐지만 유달리 큰 눈은 진지한 이야기를 할 때면 더 커졌다. 레알 마드리드에서 바르셀로나로 이적하는 과정에서 살해 협박을 받았고, 인종차별주의자들로부터 집중 공격을 받고, 적잖은 부상으로 수술대에 올랐고 쉽지 않은 축구인생을 살아온 축구 선수가 그렇게 맑은 눈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이 의외였다.

에투가 스마트한 선수라는 것은 이미 내가 던진 첫 질문에서 느낄 수 있었다. 한국을 무엇으로 기억하느냐는 질문에 에투는 큰 미소를 보이며 한국을 찾았던 기억을 모두 쏟아냈다. 2001년 한국과 일본에서 열린 컨페더레이션스컵을 위해 잠시 머물렀던 시간을 찾아낸 그는 친절하고 아름다웠던 기억을 털어놨다.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멀지만 않다면 다시 한번 가고 싶다"는 말이 접대성 멘트가 아닌 진심으로 다가왔으니 말이다.

진지한 얘기를 하는 에투에게서 나타나는 또 다른 특징은 이마에 그려지는 석 삼자의 주름이었다. 베이징 올림픽, 이적 여부, 유로 2008에 대한 얘기들(자세한 인터뷰는 <포포투> 8월호를 통해 소개될 예정)을 나눈 뒤 마지막에 추가로 던진 박지성에 대한 얘기에 에투는 이전의 그 어떤 질문보다 진지하고 성의 있게 답해주었다. 지난 챔피언스리그 준결승 1차전, 누 캄프에서 열렸던 그 경기에서 박지성의 플레이를 너무나 인상 깊게 지켜봤다는 에투는 "박지성은 이제 유럽의 축구 선수라면 모두가 아는 하이 레벨의 선수"라고 평가해줬다. 누 캄프에서 박지성에게 당했던 자신의 동료들에 대해 얘기할 때는 홈에서의 안타까운 무승부가 생각났는지 얼굴을 찡그리기도 하는 에투였다.

다시 마리아가 왔다. 시간이 다 됐다고 한다. 손목 시계를 보니 정오다. 다시 멍하니 에투를 바라봤다. 나를 보고 씽긋 웃는 에투. "언젠가 다시 한국을 찾길 바란다. 한국에도 당신을 좋아하는 팬이 정말 많다"는 내 영어를 알아들었는지는 모르지만 어깨를 두드려주며 웃음 짓는 그의 친절함에 나는 에투의 팬이 되고 말았다. 마지막으로 그와의 기념 사진을 찍고 떠나는 순간 에투가 악수를 위한 손을 내밀었다. 다른 축구 선수들도 그렇지만 꽤나 고운 손이다.

30분을 찾아 헤매고, 그를 위해 1시간을 기다렸지만 2008년 6월 27일, 그날은 내게 어느 멋진 날(One fine day)로 남을 것이다. '에투, 다시 당신을 만날 날이 올까? 다시 만난다면 서로를 바라보며 얘기하던 날 기억할까? 아디오스 아미고, 아니 아듀 에투'

사진=오스트리아 방송사와 인터뷰 중인 에투/인터뷰 중의 멋진 웃음/스페인 팬들에 대한 에투의 로얄티/에투와 카메룬을 위해 만든 푸마의 특별한 운동화, 에투의 친필 사인이 수제되어 있다. ⓒ스포탈코리아

깊이가 다른 축구전문 뉴스 스포탈 코리아(Copyright ⓒ 스포탈코리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Copyright © 스포탈코리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