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집'이 아니라 '희망'일 거야

2008. 6. 27. 1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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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매거진 Esc] 유성용의 스쿠터 다방 기행 9

하얀 소금 사러 갔다 검은 연탄 사올 것 같은 순창 시장의 희다방

스쿠터로 다니다 보면, 고속도로를 탈 수 없어서 국도나 지방도로로 낯선 지역에 들어서게 된다. 그럼 굳이 찾아 헤매지 않아도 저절로 그 지역의 경륜 있는 곳으로 이어진다. 요즘은 고속도로가 사통팔달이니 교통의 요지가 따로 없지만, 자잘한 지방도로를 타고 다니다 보면 한 지역이 인근의 다른 지역들과 어떠한 모양새로 엮이어 있는지 대충 짐작이 간다.

결코 믿을 만한 것이 못되는 간판들

지리산 자락에서 출발해서 곡성과 남원 그리고 옥과 등을 거쳐 오다 보면 평야지대에서 갑자기 노령산맥을 만나고 그곳 어디쯤에서 순창 읍내로 이어진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자연스레 순창 재래시장으로 이어진다. 따로 무슨 갈 곳이 있는 것도 아닌지라 목표나 계획이 없고 그냥 길 따라 대충 동서남북 방향을 잡고 흐르다 보니, 어디에 도착하고서도 이곳이 어딘지 모르는 경우가 잦다. 대충 지나가는 간판을 보니 이곳이 순창이다. 지금은 비록 건물들이 오래되고 낡았지만 한때 그 규모를 짐작하고도 남겠다.

스쿠터를 '화신라사' 앞에 세워두고 '순창모자점'을 들렀다가 오래된 문방구 '학우사' 쪽으로 들어선다. 하지만 순창 시장을 잠시만 돌아보면 이곳의 간판들이 결코 믿을 만한 것들이 못 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간판은 라사인데 막상은 양복 대신 화분 파는 가게이기도 하고, 화장품 가게에서 화장품 대신 옷을 팔기도 한다. 그리고 간판에 적힌 전화번호는 대개가 여직 국번이 두자리 숫자다. 순창 고무상회와 지업사를 지나면 '평산닭집'과 '서울연탄'이 있다. 서울연탄에는 소금도 함께 판다. 한데 간만에 세자리 숫자 국번이 똑똑히 찍혀 있는 간판이 눈에 박힌다. '희다방'. 하긴 커피배달 나가야 되니 전화번호 똑바로 적힌 간판 없이 뭔 물장사를 하겠는가.

옛날 서울 종로에 엘피(LP)음반 틀어주던 유명한 '희다방'이 있었다. 이 다방을 열었던 마담이 서울 구경 갔다가 종로 희다방 디제이 오빠한테 꽂혔나? 그나저나 희다방 간판 아래에 웬 건어물이라는 작은 입간판이 서 있다. 다방에서 오징어 파나, 아님 레지들이 바짝 말라 빼빼하다는 건가. 아무튼 이곳의 간판들과 가게의 속사정을 매치시키는 것은 이방인에게는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이 지역 사람들은 아무도 불편해하지 않겠지. 한 목욕탕에 같이 다니니 똥구녕에 난 털 개수를 하마 모를까. 하굣길에 자전거를 타고 귀가하는 꼬맹이가 희다방 앞을 휙 지나간다. 저 어린 녀석도 다 아는 가게들 사정을 나만 모르고 다니는 셈이다. 이 동네 아그들은 자라서 크게 되겠다. 겉에 드러나는 것과 세속의 속사정이 이토록 다르다는 걸 어려서부터 환히 알고 있을 테니, 훗날 서울 가도 돌려 먹히지 않을지도.

기다리던 사람은 영영 오지 않을테고…

그나저나 희다방은 무슨 뜻일까. 70~80년대 여자애들 이름에 계집 희(姬)자 많이 넣었는데 그래서 희다방인가. 이 다방 아가씨들 이름이 궁금하다. 순희·옥희·경희·문희·숙희·상희·복희 … 이렇게 다 '희'자 돌림일라. 간판을 돌아 다방 안으로 들어서려는데 저런! 가게문이 닫혔다. 때마침 지나가는 집배원이 말하기를 몇 개월 전부터 공사 중이란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간판만 남은 다방인 셈이다. 그래도 설마 계집 희자 썼을까. 아마도 바랄 희(希)자 써서 희다방일 거다. 말하자면 희다방은 희망의 다방이었겠지. 사람들은 다방에서 누군가 만날 희망을 꿈꾸기도 했겠지만 기다리던 사람은 영영 오지 않는 거다. 희망이란 건 어쩌면 하얀 소금 사러 소금가게 갔다가 검은 연탄 사오는 격, 다른 말로 하면 순희 만나러 가서 영희 만나 아들 낳고 딸 낳고 이혼하는 이야기와 같은 것일 수도.

방금 지나간 소년은 희다방 순희의 남동생 아닐까나. 순희가 빨아 널은 분홍 빤스가 소년의 집 마당에서 하늘하늘 지금쯤 다 말랐을까. 착한 아이야, 어여 학교 끝나고 집에 가서 누나 빤스 걷어야지.

날이 저문다.

유성용 여행생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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