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하연남' 보다 발명가로 기억되고 싶다

2008. 5. 19. 2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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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한겨레가 만난 사람-'세리온' 연구 40여년 하상남씨

스케이트 선수 이효창씨와 부부사업가92년 독일 발명전 대상…특허 30개

하상남은 50년대 이름 난 영화배우를 거쳐 60년대 이후 발명에 눈을 떠 1993년 여성발명가협회를 창립해 후진양성에 힘써오고 있다. 그가 개발해 특허를 따낸 '세리온'으로 1992년과 2002년 독일 뉴른베르크에서 열린 국제발명특허전(IENA)에서 거푸 금상을 탔다. 세리온은 상처에 바르면 피를 멎게 하고, 이를 비누로 상품화한 세리온비누는 아토피 및 알레르기성 피부병과 가려움증, 전염성 눈병 등에 특히 효능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국전쟁때 파편에 맞아 오른쪽 손목이 잘려나갈 뻔한 일이 그에게 두가지 기회를 가져왔다고 한다. 세리온을 발명해 꾸준히 발라 혈액이 돌게 해 지금은 손가락을 움직일 수 있게 된 것이 그 하나요, '손 병신'을 이겨내고 50년대 최고 배우 반열에 올라선 게 그 둘이다. 1927년 2월19일 충북 청주에서 났다. 1946년 <자유만세>로 데뷔해 56년 대히트작 <처녀별>(윤봉춘! 감독) <노들강변>(57년, 신경균 감독)등 10여편에 출연했다. 당시 예명은 하연남.

여배우 출신의 발명가로 팔순을 훌쩍 넘긴 하상남(82)씨는 발명의 날인 19일 하루 종일 동분서주해야 했다.

오전 11시 서울 이태원 집을 나서 정오 '한국의 집'에서 열린 국제발명수상자협회 오찬장에 도착했다. 국제대회에서 각종 상을 받은 발명가들 모임 자리다. 그는 곧바로 오후 2시 코엑스에서 특허청과 한국발명진흥회가 주관한 '제43회 발명의 날' 기념식에 참석했다.

1982년 이후 특허권 30개를 갖고 있는 그는 '할머니'라고 부르기엔 피부고 얼굴이고 너무 젊다. 그렇다고 아주머니라고 하기엔 나이가 너무 많다. 서울 용산구 이태원동 ARMS 빌딩 2층, 지난달 이사를 마친 그의 셀레늄생명공학연구소 겸 살림집에 들어서니 온 벽면을 가득 채운 사진과 상장들이 먼저 눈에 띈다. 생모리스 동계올림픽에 출전한 국가대표 스케이팅 선수 출신으로, 2006년 여름 별세한 남편 이효창씨의 사진, 이승만 대통령, 프란체스카 여사 부부와 찍은 사진, 50년대 영화계 인사들과의 사진,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등 역대 대통령 이름이 붙은 표창장들. 마치 자그마한 역사전시회에 들어선 기분이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50년은 족히 됐을 법한 흑백사진 속의 당대 최고의 여배우 하연남이었다. 오드리 헵번이 연상됐다.

"영화요? 그럼요…제 이야기도 볼 만 할거예요"

-하상남과 하연남, 이름이 둘이시죠?

=하연남은 영화 찍을 때 썼던 예명이고. 하상남이 본명이에요. 제비 '연'자에 원래의 남녘 '남'자를 써서 윤봉춘감독이 지어준 이름이에요. 원래는 내가 경성여의전을 다니던 의학도였어요. 해방이 되는 바람에 끝까지 마치지는 못했고 후에 경기산파학교를 다니고 면허를 받아서 산파 일도 하고 나중에는 약국도 했었죠. 그러다가 46년에 최인규 감독의 '자유만세'를 전창근, 황여희랑 같이 찍은 거야. 자유만세가 첫 번째 유성영화였는데 그때 내가 많이 유명해진 거지. 너무 예쁘다고 다들 데리러 와서 영화를 찍자고 해서 학교도 그만둔 거에요. 그러다가 6.25때 피난 가는 길에 서대문에서 박격포 파편에 손을 다친 거야. 오른손 팔목이 너덜너덜 해질 정도로 심하게 다쳤어. 지금이야 의학이 발달해서 그 정도야 쉽게 고치지만 그때 당시에는 손을 쓸 방법이 없었던 거야.

내 인생에 위기는 있어도 좌절은 없다

-그 사고가 선생님 인생에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 궁금합니다. 웬만한 사람 같으면 평생 좌절을 하고 그랬을 것 같은데...

=손을 다친 것이 내 인생에 가장 큰 사건이었지. 손을 다치고 두 해 쯤 있다가 자살까지 하려고 했었으니까. 극약을 먹었는데 서울대병원으로 갔더니 벌써 죽었다고들 했다더라고. 우리 오빠가 너무너무 안타까워서 몸이 완전히 식을 때까지 강심제를 5분에 한 번씩 놨다고 하더라고. 독약 마흔 알을 내가 만들어먹었거든. 바르비타 수면제하고 학질에 쓰는 키니네로 만든 약이었어요. 이 두 가지를 섞으면 웬만하면 못살거든. 내가 약방을 할 적이니까 그걸 알고 있었지. 지금은 한 알에 200mg지만 그때는 캡슐이 500mg짜리였어. 근데 그래가지고는 나중에 깨가지고 아마 달 반 만에 정신이 났다나봐. 그리고 깨어나서는 내 기억에 일어나지를 못해서 기어다녔어. 어머니가 줄을 매주고 말예요. (하씨는 3급 장애인이다. 지금은 신경이 많이 살아났다고는 하지만 대부분의 일은 왼손이 도맡아서 한다고 했다.)

-영화데뷔는 어떻게 하셨죠?

=그러고 나서 56년에 윤봉춘 감독이 유치진 원작의 '별'을 가지고 '처녀별'이라는 영화를 찍겠다고 나를 데리러 온 거야. 첫 작품은 10년 전에 한 자유만세였지요. 그때 사람들이 다들 손 병신이 주연을 한다고 난리를 친 거지. 근데 윤봉춘 감독이 고집을 부린 거야. 그 양반이 꿈을 꿨는데 오드리 헵번이 죽었는데 그 얼굴이 내 얼굴로 바뀌더래. 너무 예쁘고 연기가 좋으니까 꼭 나를 써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나를 데리러 온 거지. 그때 김진규, 김승호씨랑 같이 영화를 찍은 거에요. 아닌 게 아니라 그 영화가 대히트를 쳤잖아. 하여간 그때 굉장했어요. 극장마다 만원이었고 내가 극장마다 무대인사를 다녔어요. 누가 그렇게 손 병신이 영화를 찍고 인기를 얻을 줄 알았겠어요?

(기사에 쓰일 사진 몇 컷을 찍자 하니 잠시만 기다리라며 화장과 옷매무새를 고치고 돌아왔다. 여든 둘 나이가 무색할 만큼 아직도 아름다웠던 배우 시절의 마음가짐을 잊지 않은 듯 보였다. 그 후 몇 차례 계속된 사진과 동영상 촬영 주문 때 거울로 모습을 꼭 확인하고서야 응했다. )

한국의 오드리 헵번, 50년대 대히트 '처녀별' 주연

-이효창 선생님과는 어떻게 만나신 건가요?

(하씨 남편 이효창은 보성전문 출신으로 일제 시대 전일본 빙상선수권대회를 석권하고 1948년 노르웨이세계선수권대회 1500m 2위, 5000m 3위를 차지한 스케이트 선수 출신. 자유당 시절 상공부장관 비서관과 외자구매처 비서실장을 지냈으며 1993년 하씨와 함께 효창세리온을 설립했다. 재작년 8월 숨졌다)

=아무래도 손을 그렇게 다치고 나니까 힘이 들게 살았지. 그래도 그이를 만나면서부터 많이 좋아졌어. 그때 내가 남자들을 너무 싫어했던 시절이야. 중매는 나랑 친하던 측근이 해줬어. 어느 날 명동에 아주 물만두가 맛있는 데가 있는데 만나자고 해서 나갔더니, 어떤 남자가 들어오더라고. 좋은 친구 소개할 테니 앉으라 하길래 내가 옆구리를 쿡 찔렀지. 내가 그때 남자들을 너무 너무 싫어했던 거야. 그랬더니 아주 좋고 유명한 분이라고 하더라고.

그래서 그렇게 만나서 결혼은 66년쯤에 했어요. (혼인)신고는 10년쯤 지나서 했어. 왜냐하면 어떻게 사람을 믿어 손이 이런데... 눈치 주면 내 성격에 못사니까. 근데 너무너무 저이가 머리까지 빗겨주고 절대 손에 대해서 모른 척 하는 거야. 침대에 들어가서 이 손이 얼마나 찰 거야. 하얗게 신경이 다 죽어서 손이 얼음장인데, 그거에 대해서 말을 안하는 거야. 결국에는 나도 모르게 사랑한 거 같아. 아직도 내 태양은 이효창이야. 너무너무 인간적이고 정직하고 참 똑바른 사람이야. 혁명가라고 봐도 될 정도의 사람이에요. 자기 자신을 버리고 헌신적으로 하는 사람이야. 그렇게 둘이 살면서 같이 세리온을 발명하게 된 거에요.

-세리온을 발명할 때 상황을 좀 더 자세히 설명해 주시지요.

=우리가 정릉 별장에서 살 때 꿈을 꿨는데 그 별장 앞마당에 똥이 가득찼더라고. 그리고는 며칠 있다가 어떤 사람이 셀레늄 분말을 가져왔어요. 광산을 가지고 있는데 당신네들이 성공을 시키라고 해요. 그래서 분말을 먹어보라고 주는데 광물질이니까 처음에 찌걱찌걱 거리는 거예요. 그이 친구였는데, 광산을 사라고 해서 그 당시에 100만원이었는데 그걸 우리가 샀어. 아산에 있는 광산이었지. 그 근처가 온천지대라서 좋은 물질들이 많았어요. 그걸 곱게 절구로 빻아가지고... 그 사람들은 그걸 그냥 썼었나봐. 그러면 큰일 나는 건데. 그래서 거기에 몇 가지를 혼합해서 연구를 했지. 또 내가 한방공부를 미리 했었으니까 쉬웠던 거지. 그래서 그걸 환자를 먹이니까 기가 막히더라고요. 청산가리를 마신 여자가 죽기 직전이었는데 세리온 분말을 자꾸 떠 넣어줬지. 자꾸 넣어주니까 30분 되니까 펄펄 뛰던 사람이 조용해지더라고. 그 후에 쉬지 말고 계속 먹였더니 그 이튿날 바로 밥을 먹겠다고 하더라고. 세리온 반 달분을 사흘에 다 먹였는데도 부작용이 없다는 게 그게 참 중요한 사실이죠. 그렇게 계속 실험을 한 거지.

인생의 태양, 이효창과 하상남의 만남

(그의 책장에는 기초분자생물학, 해양자원론, 광물학원론, 토양과 문명, 요업공학개론, 피부과학, 화장품원료학 등의 손때 묻은 책들이 가득 꽂혀 있다. 그가 세리온 연구와 실험에 얼마나 고심했는지 가늠해볼 수 있다. 발명 이야기가 나오자 그는 흥에 겨운 듯 말문을 닫지 못했다.)

한번은 아내가 곧 죽게 됐다고 남편 되는 사람이 한의학을 전공한 정해철 박사 추천 편지를 가지고 왔더라고. 그때는 전화도 잘 안될 때야. 그래 가지고 그냥 (환자한테) 갔어요. 사람 살리는 게 목적이니깐 그 남편을 따라서 갔어요. 갔는데 눈도 못 떠, 배는 남산만하고... 그래서 셀레늄 분말을 커피 잔에 한 숟갈 진하게 타서 숟갈로 떠 먹였어요. 물도 잘 못 넘긴다고 해서 그냥 넘기라고, 하고는 배에다 손을 딱 얹고는 기도를 하는 거에요. 그거 한 숟갈씩 떠넣기를, 아마 30분 넘겼을 거야. 1시간을 했는지 하여간 오래됐어요 그런데 나도 모르게 눈물, 콧물이 나오더라고. 하고 나니깐 휘익 소리가 나요. 눈을 뜨고 나를 일으켜주세요 하는 거야. 그 순간 환희는 형용을 못해, 환자가 그럴 때 아주 기분 좋은 거야. 일어나지 못하던 사람이 부축을 해서 앉는 거야. 1시간을 앉더라고. 말도 못하는 사람이 고맙다는 인사야! 이걸(셀레늄) 두고 갈 테니까 틈나는 대로 먹이라고 했어. 1시간이든 2시간이든 '물먹고 싶다' 그러면 주라고. 밤새도록 그걸 먹였대. 그 다음날 전화가 왔어요. 눈을 뜨고 일어났다는 거야.

(하씨가 흥이 났다. 오랜만에 기자 앞에서 자신의 과거 환자치료 경험을 얘기하는 게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다고 했다.)

관절염에도 이게 참 좋아. 금침을 갖고 15개를 맞았던 사람이 있었어요. 봉천동 사람이야. 근대 봉천동에서 와달라 그래가지고 왕진을 다녔지요 그때 그 양반이 62세인가. 밭을 매고 호미질하고 쭈그려서 많이 앉아있었대. 그분을 30분 동안 마사지하다가 내 팔이 아파 딸을 시켰는데 1시간 만에 다리를 펴지 못했던 사람이 펴더라고요. 하여간 나는 신기하게 많이 고쳤어. 세리온 분말 먹이면서.

그러고 또 하나는 아들이 있는 집을 갔는데 고혈압에 쓰러져가지고 한쪽에 마비가 온 거야. 그런데 교통사고까지 난 거라. 경희의료원 처음 생겼을 적에, 우리 영감님도 있을 적에 같이 살면서 내가 왕진 다니면서 했는데, 경희의료원에서 한달을 아프다고 다녔는데 몸을 오그린 거를 그냥 놔뒀네. 손도 안 들어가. 그걸 30분만에 내가 손도 들어가게 만들었다니깐. 그걸 세리온을 먹이면서, 아들들보고 마사지하라고 하고요. 그걸 먹으면 혈액순환이 잘 되기 때문에 그게 되는 거야. 30분을 했는지 1시간을 했는지 그때는 내가 기운이 있어가지고 그렇게 오래 한 거야. 계속 환자가 밀려있으니깐 내가 계속할 수도 없고, 아들 보고 하라고 했어. 가족끼리 하면 더 빠른 거야. 그걸 속으로 빌면서 하라고 하거든, 병이 낫게 해달라고 말예요. 나도 제3잔데 이렇게 기도하면서 하는데, 난 교회는 안 나가지만 따로 믿음이 있어요. 가서 ? ?기도 해.

(그는 개나 고양이는 수없이 살렸다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개가 쥐약 먹고 펄펄 뛰잖아요? 기운이 없어 퍽 쓰러질 적에 사람들 보고 다리 붙들라고 하고, 난 아구통 붙잡고 이런 컵으로 그냥 집어넣는 겁니다. 그럼 금방 눈을 뜹니다. 개가 컵으로 하나 다들어 가면 요동을 쳐요, 막 물려고 그래요. 낫다는 얘기지. 예전엔 개들이 쥐약 먹고 많이 죽었는데 내가 그거를 많이 살렸다니깐. 그래서 내가 그런 것 살아나는 걸 보고 용기를 얻은 거야. 내가 직접 실험해보지 않으면 안되잖아요? 그래서 내가 직접 (실험도) 다했어요. 내가 실험대상도 되고요.

한국의 화타, 죽은이도 살리다

(그는 자신이 발명한 세리온 비누를 사용해 치료한 유명인사 사진이 담긴 스크랩을 꺼냈다. 그는 지금도 활동하는 왕년의 명 탤런트였다. 하씨는 극구 그의 신원을 밝혀선 안된다고 했다. 또 세리온 가루를 발라 3도 화상을 치료한 사람들 사진도 내보였다. 자신의 환자가 치료되는 것만큼 큰 희열이 없을 거란 말과 함께...)

-세리온이 왜 이렇게 질병치료가 가능한 거죠?

=이게 셀레늄이라는 거는 우선 해독을 시키고, 영어로는 Selenium 이게 원소기호로는 Se예요. 셀레늄은 해독시키고 이온화, 세포조직을 살리는 역할을 해요. 쥐약 먹은 개나 환자 살린 거는 셀레늄을 활용한 것이고요. 내가 발명한 게 셀레늄에서 나온 세리온이죠. 이게 나중에 유명하게 되면 하나의 원소기호를 만들고 싶어요.

-상품화시킨 발명품인가요, 그럼?

=세리온은 상품의 이름인 거지요. 맨 처음에 분말을 가지고 수십 년을 연구, 실험했어요. 처음에 우리 두 부부가 직접 실험하고 개, 고양이에도 먹여보고 환자들에게 직접 투여를 했죠. 근데 내가 밥을 못 먹던 사람이 먹게 되고 여기 가도 안되고 저기 가도 안 되는 사람들에게 먹여 낫게 했어요. 마약을 넣었냐고 하는 사람들도 있었죠. 지금 내가 만든 이 세리온 분말들은 다 나노입자로 만든 거죠. 예전에는 찌걱거리는 느낌이 있었는데 지금은 나노입자로 해 먹기도 아주 좋아요.(그러면서 그는 기자 일행 입에 한 스푼 넣어주었다.)

그리고는 세리온을 주성분으로 하는 비누를 만들기 시작한 거죠. 셀레늄은 일종의 독극물이에요. 그러니까 아주 극미량이 들어간 거지요. 거기에 다른 각종 미네랄들을 섞어서 만든 겁니다. 우리 몸 속의 미네랄 4%가 자꾸 균형을 잃게 되는데 그게 문제지. 효모셀레늄은 또 다른 것이지요. 마늘, 옥수수, 수수에서 셀레늄이 많이 나와요. 그걸 모아서 메주처럼 띄운 게 효모셀레늄인데 그건 제대로 된 셀레늄은 아니지요. 지금 전세계에 퍼져있는 셀레늄은 효모셀레늄입니다. 근데 그게 아주 극미량에 다른 것들이 섞여 있으니까 효과가 그리 좋지는 않지요. 순수 미네랄 성분, 인체에 꼭 필요한 성분들만 들어있는 게 세리온입니다.

비누 하고 나서 화장품을 만들었어요. 93년 시제품이 나왔는데, 기미가 없어진다고들 난리였어요. 이걸 2001년도에 또 만들어 나오고 2003년도에 내려고 했는데 우리 영감님이 편찮으셔서 중단된 거지요. 1992년 IENA상을 타고 나서 영감님이랑 준비를 했는데 중단된 거지요. 남에게 일을 맡겼다가 지금 이렇게 됐어요.

세리온을 발명하기까지…생명 있는 곳은 지옥이라도

-특허는 얼마나 내셨는지요?

=82년부터 지금까지 한 30개 정도 받았다고 특허청에서 그러더라고요. 전부다 세리온으로 만든 거지요. 삼성전자에서 87년도에 계약을 해가지고 첫 납품했어요. 84, 85. 86년도 그때는 여자들을 직원으로 거의 데리고 있지 않을 때야. 그때 내가 계약을 했어요. 92년엔 식이성무기조성물의 제조방법으로 받아 세리온을 본격 개발한 거죠.

삼성전자 계약한 거 봐 봐요. 이게 있을 수 있는 얘기야? 부품품질비용 보상계약서라고요. 이렇게 합격이 돼 가지고 2년인가? 제3연구소에서 삼성전자 연구원들이 일부러 3~4시에 오라 그래서 내 얘기 들어가면서 이 비누계약을 했어요. 내가 삼성전자만큼 앞섰던 사람이죠. 단일품목으로 한 것이 아니라 이미 삼성전자에 87년도 계약을 해가지고 가습기 부품도 우리 부품을 썼다니깐.

그렇게 92년도 11월 독일 뉘른베르크에서 IENA상을 타게 된 거야. 한국발명진흥회(당시 특허협회)에서는 은상 밖에 못 타서 기대를 별로 안했었는데 시상식에서 "코리아 하상남" 하고 부르는데 다들 깜짝 놀랜 거지. 당시 인솔자들이랑 다들 소리를 지르고 정말 놀랬지. 더구나 비누니까 설마 비누가 대상을 탈까 한 거지. 그날 저녁에 파티를 여는데 난리들이 났었어요.

(그는 당시 시상식에서 '오 솔레 미오'를 불렀다고 했다. 기자가 한곡 청하자 즉석에서 끝까지 열창했다. 그러면서 "옛날같지는 않지만 괜찮죠" 했다)

당시 대만 팀들은 다 화가 나서 나가 버리고. 근데 그때도 국내에서는 뒤에서 말들이 많았어. 질투였는지 뭔지 몰라도 괜한 트집을 잡는 사람들도 있었고 IENA 자체를 비하해서 말하는 사람들도 간혹 있었어. 그때 IENA 회장이 여자였는데도 내가 뭐 썸씽이 있어서 상을 탔다는 말도 안되는 이야기들! 도 있었지. 참 그렇게 오해들을 받은 게 지금도 한스러워요.

독일선 국제발명올림픽 금메달…국내선 질시와 모함

-여성발명가협회를 설립하셨지요?

=IENA상 수상 이후에 힘을 얻어 93년에 한국여성발명가협회에 만들어서 회장을 한 3년 역임했죠. 발명 저변 확변를 위해 협회를 만든 거죠. 당시만 해도 사람들이 발명이라는 걸 제대로 인식을 못하고 있더라고. 그래도 15년 전에 그렇게 씨를 뿌려놓은 게 지금은 회원도 1000여명이 되고 얼마 전에는 큰 국제대회도 한국에서 치렀어요. 그 후에는 학생들이랑 어머니들을 교육시켜야겠다고 생각해서 어머니발명가협회를 만들었지. 전국을 누리면서 캠프를 열고 아이들에게 상을 주고 대회도 많이 했어요. 발명이라는 걸 사람들이 항상 어렵게만 생각하는데 의학이나 기초과학 같은 특수분야는 그 특수분야에서 하는 거지만, 우리 생활에서 쓰는 것들을 어떻게 더 편하게 쓸까 고민하는 게 발명이죠. 우리가 생활하는데 쓰는 모든 물건들을 한번 살펴보는 거부터 발명의 시작입니다.

-어렸을 때부터 발명에 대한 관심이 있었습니까?

=내가 보통학교를 다닐 때 도깨비불이 뭔지 혼자 알아냈어요. 그 당시만 해도 도깨비불은 요상한 귀신이라고만 다들 생각했었는데 나는 그게 뭔지 궁금했던 거야. 그래서 매일 도깨비불을 쫓아다녔는데 그러다가 도깨비불이 사기그릇 깨진 것 쌓아놓은데 있잖아요, 거기 터에서 휘휘 도는 게 보이더라고. 그걸 보고 야간에 생기는 광선굴절현상이라는 걸 알아냈어. 지금이야 사람들이 과학적 근거가 뭔지 알지만 그때는 아무도 몰랐었거든. 그런 호기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경성여의전을 다니고 약국을 하면서 사람들 건강에 관심을 많이 가지게 됐지요. 그런데 남다른 관심이 있었기에 몇년을 연구해서 세리온을 발명해낸 게 아닌가 해요.

-발명활동을 하시면서 가장 힘들었던 부분은 무엇인가요?

=머리좋은 사람들을 사장 시키려고 갖은 중상모략으로 시간을 보내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대신 칭찬을 해주면 얼마나 좋을까 그래요. 누가 가서 상을 타와도 그거 별거 아냐 이런 식으로 비하하는 사람들이 많죠. 서로 헐뜯지 않는 방법도 있을 텐데... 서로들 질투하고 헐뜯는 일이 많아요. 이렇게 되면 우리 과학이 자꾸 뒤지게 되죠. 발명과 과학이 살아야 나라도 살고 경제도 사는 건데 그걸 모르더라고요. 나는 경제의 기본에는 과학과 발명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빌게이츠만 봐도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나라 사람들이 참 머리가 좋은 사람들이에요. 근데 서로 비방을 해대니까 발전이 힘들죠. 마인드를 완전히 개조를 했으면 좋겠어요. 난 딴 거보다도 그게 소원이에요. 긍정적이고 솔직한 마인드를 가졌으면 좋겠어요. 모든 걸 다 성심성의껏 정신만 올바르면 우리도 선진국처럼 좋은 발명가들이 많이 나올 거에요.

나도 발명을 하면서 힘들었지만 대기업들이 우리 발명인들 많이 죽였어요. 발명인들이 오죽하면 대기업 때문에 데모를 한 거야. 90년대에 난리가 났었지. 요즘 시대에 그런 일들이 없어졌지만 당시만 해도 대기업에서 발명인들을 많이 무시한 거지. 의욕을 꺾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망쳐버려. 발명품들을 비하하고 뉴스나 매체에서도 나서서 완전히 죽여버리는 거야.

한국서도 제2 제3의 퀴리부인 빌게이츠 나올 수 있어

-영화배우에서 발명가로 평범하지 않은 세월을 사셨는데 나중에 사람들에게 어떻게 기억되고 싶으신지요?

=내가 참 이렇게 이야기 하면 건방지다고 할지도 모르지만 내 발명품들을 가지고 전 인류의 건강을 위해서 만분의 일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어요. 뭐라 할까 마지막이라고 하기엔 그렇지만, 내 생을 바쳤으니까 결실을, 빛을 보도록 해야죠.

저는 발명가로서 기억되고 싶어요. 왜냐면 아무도 발명에 대해서 알지 못했을 때 제가 그때부터 운동을 시작했으니까요. 그전까지는 아무도 모르던 걸 저변확대를 하고 차차 알게 되었죠. 물론 아직도 발명이 무언지 모르는 사람이 많아요. 아직도 멀었다고 생각해요. 이런 걸 알리는데 매스컴이 더 힘을 써줬으면 좋겠어. 발명이 무엇인지 또 발명인과 발명품을 소개하고 이렇게 해야 국민들이 많이 알 수 있죠. 누구나 빌게이츠를 아는 것처럼, 우리나라도 어떠한 물건을 발명했을 적에 발표를 잘 해주고 했으면 좋겠어요.

-영화에 대한 미련도 남아있지요? 만일 하신다면 참 재밌는 영화가 나올 것 같은데...

=내가 살아온 길을 영화화해도 볼만할 거에요. 참 파란만장한 세월을 보냈으니까. 6.25때 손이 부서진 일도, 경성여의전과 산파시절, 약국경영과 영화이야기, 이효창과의 이야기. 그리고 발명까지. 제목은 '나는 별, 영원한 별'로 하면 좋겠어. 내가 손 다치고 힘들었을 때 영화 처녀별로 제2의 인생을 살게 됐잖아. 그리고 언제고 별은 반짝거리니까 얼마나 좋아. 어떻습니까, 아주 볼 만하지 않겠습니까?

(인터뷰 내내 그녀는 수십 권의 스크랩북들을 기자에게 내보였다. 화려했던 여배우 시절의 흑백사진부터 환자들로부터 받은 감사편지들, 김영삼 정부 시절 받은 산업포장증을 비롯한 상장들과 신문기사까지... 스크랩북들은 가지런히 정리가 되어있었다. 여든 둘 그에게 마무리가 되어가는 삶의 회상을 들을 수 있으리라 기대했으나 그녀의 인생은 아직도 끝을 예측할 수 없는 현재 진행형이다.)

■ 하상남은

= 1950년대 이름 난 영화배우를 거쳐 60년대 이후 발명에 눈을 떠 93년 여성발명가협회를 창립해 후진 양성에 힘쓰고 있다. 그가 개발해 특허를 따낸 '세리온'으로 92년과 2002년 독일 뉘른베르크에서 열린 국제발명특허전(IENA)에서 거푸 대상을 탔다. 세리온은 상처에 바르면 피를 멎게 하고, 이를 비누로 상품화한 세리온 비누는 아토피 및 알레르기성 피부병과 가려움증, 전염성 눈병 등에 특히 효능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전쟁 때 파편에 맞아 오른쪽 손목이 잘려나갈 뻔한 일이 그에게 두 가지 기회를 가져왔다고 한다. 세리온을 발명해 꾸준히 발라 혈액이 돌게 해 지금은 손가락을 움직일 수 있게 된 것이 그 하나요, '손병신'을 이겨내고 50년대 최고 배우 반열에 올라선 게 그 둘이다. 27년 2월19일 충북 청주에서 났다. 46년 <자유만세>로 데뷔해 56년 대히트작 <처녀별>(윤봉춘 감독), 57년 <노들강변>(신경균 감독)등 10여 편에 출연했다. 당시 예명은 하연남.

글 이상기 선임기자 amigo@hani.co.kr

사진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영상 은지희 피디 eunp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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